[기고] 단재 신채호는 왜 북경을 선택했을까?
[기고] 단재 신채호는 왜 북경을 선택했을까?
  • 홍성림 <북경보보차이나문화원장>
  • 승인 2018.05.1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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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언론인 무장투쟁론자로서 최적의 선택지가 북경

짧은 공부로 역사해설사로 나선 지 두 달 여다. 매 번 낯선 사람들과 단재 선생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북경 망명생활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지난 5월 5일의 북경단재루트 투어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내가 역사해설사라 내세우기도 민망하리만큼 한국과 중국의 근대사에 밝은 분들이 참석해 투어를 활기찬 토론의 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 던진 질문이 며칠이 지나도록 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단재 선생은 무장투쟁을 통한 자주독립을 주장하면서 왜 연해주나 만주에 터를 잡지 않고 북경을 선택하였을까요?” 지금 이 글은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단재 선생이 북경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역사학자로서의 선택이 아닌가 싶다. 단재는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작가, 사상가였다. 이 점을 간과하고, 독립운동가로서만 단재 선생을 떠올리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단재는 망명 전부터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하며 민족사학의 개념을 세우고,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동국거걸최도통전>과 같은 전기소설을 한문과 국문으로 연이어 연재하며 백성들의 눈높이에 맞춘 애국심 고취에 힘썼다. 또 여순감옥 시절 신문에 연재되었다가 단행본으로 발간된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은 망명시절 틈틈이 집필한 『조선사』의 일부로, 민족사학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단재는 이를 통해 올바른 역사인식과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고, 그것이 자주독립으로 이어지길 염원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부분이 실전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것이 통곡할 일이지만, 역사 연구는 단재 선생의 일생을 관통하는 숙원사업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망명 초기 연해주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대동청년회’를 조직하여 한국고대사와 관련한 고구려 유적지 답사나 자료수집을 쉬지 않고 이어갔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조사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해 줄 중국 사서 탐구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단재의 북경 망명생활에 관한 기록을 보면, 북대교수이자 중국인 최초의 아나키스트였던 이석증 교수의 주선으로 자금성의 문연각에 소장되어 있던 『사고전서』 등을 열람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고전서』는 건륭제의 명에 의해 10년 여에 걸쳐 모두 4천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해 완성했다는 중국 최대의 역사총서다. 뿐만 아니라, 북경대학 도서관을 드나들며 수시로 소장도서들을 열람하고, 중국 신문화운동의 주역이었던 이대조, 진독수, 노신 등과 교류하며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 선생의 역사학자로서의 가치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 가치와 업적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북경 망명시절이 단재 선생의 역사 연구 및 역사서 집필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재 선생에게 북경은 단순한 중국의 수도가 아니라 <조선사>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머물러야 할, 최고의 고대사 문헌자료 연구기지였을 것이다.

또 언론인으로서도 북경은 단재선생에게 최적의 망명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연구와 함께 단재 선생의 일생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언론이다. 망명 전의 <황성신문>을 필두로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끊임없는 언론활동을 통해 국민이 현실을 직시하길 원했고, 어려운 시국을 타개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망명 초기에 중국신문인 <북경중화신보>나 <상해중화신보> 에 시론과 사론을 100편 이상 연재하면서 신문들의 독자가 급증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뛰어난 필력을 지닌 단재 선생은 무장투쟁을 위한 ‘한중공동전선’ 구축을 주장했고, 중국인들의 공조를 끌어내기 위해 <천고>라는 순 한문잡지를 창간해 발행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정치와 사상의 중심지였던 북경은 전국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언론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무장투쟁의 후방 투쟁지로서의 북경의 중요성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장투쟁의 범위를 의용대나 독립군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직접적인 개인투쟁을 주장하고 실천하던 의열단이나 다물단까지 포함시킨다면, 정치의 중심지인 북경이야말로 최고의 투쟁지였다. 당시 북경에서 암약하던 밀정의 수가 100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가려진 격동의 투쟁 역사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역사학자, 언론인, 무장투쟁론자로서 단재 선생이 북경을 선택해 활동한 것은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홍성림 북경보보차이나문화원장
홍성림 북경보보차이나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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