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삼성 독립유적지 답사기] 무순 참사 같은 참혹한 역사 반복되지 말아야
[동북삼성 독립유적지 답사기] 무순 참사 같은 참혹한 역사 반복되지 말아야
  • 이지학(선양한국국제학교 10학년)
  • 승인 2018.05.15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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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9일 아침 8시. 동북삼성 독립유적지 답사의 출발점인 한중교류문화원에 도착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까봐 걱정했지만, 같은 학교 선배나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 사라졌다. 한중교류문화원에서 역사해설서를 받고 단체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번 답사의 전체적인 콘셉트와 일정 및 여러 관계자분들의 말씀을 듣고 출발했다. 아침 일찍 나온 탓에 버스 안에서 잠을 잤는데, 한참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일정표를 확인해 보니, 오늘 총 이동 시간이 7시간이나 됐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려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는 의암 기념원이었다. 사실 12시에 도착 예정이었지만 도로가 꽤 막혀서 예상 도착 시간보다 1시간 늦었다.

그곳에서 중국 동북삼성에서 살면서도 알지 못하던 의병장에 대해 배우게 됐다. 그의 이름은 유인석으로, 이곳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보존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이제 차츰차츰 개보수 작업이 진행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마음이 괜찮아졌다. 이곳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람이 많이 불어 먼지가 많이 날렸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의암 기념원.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었다.

다시 차를 타고 양세봉 장군 기념비로 향했다. 양세봉 장군 기념비에 도착했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존이 거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스를 30여분 타고 다음 목적지인 7인 열사 능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경신참변으로 인해 희생당한 한인학교의 교사를 기리는 묘지공원으로 오늘 본 다른 곳과 같이 보존이 잘 되어 있지 않았다.

들어가는 길에 소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지만, 좁은 소나무 길을 빠져 나오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길을 지나쳐 겨우 겨우 찾았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들도 이렇게 걸었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7인 열사능원

4월30일 아침. 안개가 많이 끼었지만 낮에는 해가 밝게 비췄다. 꽤 이른 시간부터 일정이 시작돼 밤에 늦게 잔 나는 아침식사를 포기했다. 오전 9시쯤 우리는 이날의 첫 번째 일정인 경학사 본부 터에 도착했다.

경학사의 ‘경학(耕学)’은 밭을 갈고 배운다는 의미로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를 하여 내실을 다졌다고 한다. 해설을 들으러 올라간 언덕에서 한 건물이 보였는데 바로 그 건물이 신흥강습소 터였다. 옛날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사들을 양성하던 곳이 현재는 일반 가정집으로 돼 있는 것 같다.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전 재산을 처분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고 한다. 이 일화를 들으며 나는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바친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애국심에 감동을 받았다.

신흥강습소 터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밤에 늦게 자서 그런지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니 도착했다고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날 깨웠다. 우리는 신흥무관학교 터에 도착을 했는데, 강가이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벌레가 많았다.

신흥무관학교가 처음 문을 열고 첫 졸업생들의 수가 10명도 되지 않았지만 이후 3000여 명이 졸업했다는 것을 듣고, 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 수 있었다.

이후 우리는 이날 일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노학당 기념비를 향해 갔다. 굉장히 오랜 시간을 달려서 도착했는데 그래도 가장 뜻깊었던 곳이었다. 밭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 기념비는 독립운동가 윤희순을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의병장 유홍석의 아들 유제원과 결혼한 뒤 아들을 낳았지만 자신의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고도 꿋꿋하게 아들을 의병장으로 성장시켰지만 이후 아들까지 죽으며 결국 그 충격으로 죽게 된다. 그녀가 노학당을 세우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고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격려했다는 점에서 당시 여성들의 인권까지 높였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노학당 기념비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둘째 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쉬었다.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의열비.

5월1일 아침. 일어나 보니 밤새 비가 내린 것처럼 땅이 젖어 있었다. 하늘은 또 다시 비를 쏟아 낼 것처럼 꾸물꾸물 댔다. 이날은 우리 동북삼성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의열비였다. 항일 의병장인 이진룡 장군과 그의 아내인 우씨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굉장히 감동적이다. 우리 한국인이 아닌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이 비석을 세웠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진룡 장군이 일제에게 붙잡힌 후 옥사하자, 그의 부인도 그를 따라 자살했다. 이 지역 인근의 한족학교에서는 해마다 이를 주제로 한 백일장 대회를 개최하며 그들을 기억하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 한국인이 기억해야 할 위인을 이 지역의 중국인들이 기억하고 그들을 기렸다는 사실에 굉장히 부끄러웠다.

무순평정산참안기념관 내 백골관

이곳을 다 둘러보고 난 뒤, 우리는 이번 답사의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갔다. 이번 답사에서 가본 곳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보면서 분노했던 곳이 아닐까 싶은데 바로 무순평정산참안기념관이었다.

눈앞에 통 유리 안에는 어림잡아 400여구의 백골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로 총 3000여명이 숨졌다. 이것만으로 화가 났었는데 일본군은 이것을 또 은폐하기 위해 불을 붙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다시는 이런 참혹한 역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현재의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번 답사는 굉장히 좋았지만, 한편 충격적이었고, 분노했고, 보존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슬펐다. 이런 참혹한 역사를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 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느꼈고, 동북삼성에 살면서 이런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게 됐다.

이지학(선양한국국제학교 10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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