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수제자인 공손추가 스승께 “선생님은 어디에 장점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맹자는 “나는 말을 알며(知言),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길렀다”고 대답했다. 이 말은 맹자의 인생을 한마디로 압축시킨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다. 그 유명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고사성어도 여기서 생겨났다. 공손추가 다시 묻기를 “무엇을 호연지기라 합니까?”하자 맹자는 “그것은 말로하기 어렵다(難言也)”고 대답을 유보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호연지기’는 불교의 선(禪)에서 온 ‘정신을 집중시켜 화두를 타파함으로서 마음을 볼 수 있는 견성(見性)’에 비유되며 유교에서는 ‘정신을 집중시켜 온 마음을 기(氣)와 의(義)로 가득 채워야하는 선법’이라 할 수 있다.
맹자가 설명한 호연지기는 매우 난해하나 그 의미를 쉽게 풀어보면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은 마치 풍선을 입김으로 채우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이 우주 만물은 하나의 거대한 풍선이며 사람의 몸 역시 지극히 크고 강한 풍선이다.
이 풍선을 가득 채우는 것은 남을 해치는 사악한 마음의 입김으로는 불어지지 않고 오직 의로운 마음에서만 입김이 나와 채워지는 것이다. 천지와 내 몸은 혼연일체이니 내 몸을 의로운 호연지기로 가득 채우면 곧 천지를 가득 채우는 것이 된다. 이 풍선은 성급하게 하루아침에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호연지기를 길러 서서히 입김으로 불어야만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맹자의 핵심 철학인 호연지기에 대해서 이렇게 해설을 내리고 있다. ‘호연이란 성대하게 유행하는 모양이며 기(氣)란 이른바 몸에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원래는 스스로 호연하되 수양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족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잘 길러 그 본래 상태를 회복해야하는 것이다. 기를 기르면 도의에 배합되어서 천하의 일에 두려울 바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일을 당해도 마음의 동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낳은 실학파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다. ‘본래 호연지기는 마구 생성시킬 수 없으며 억지로 기를 수도 없는 것이다. 오직 도(道)로 말미암아 의(義)를 행하여 날로 쌓고 달로 쌓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살이 쪄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고 했다.
오늘날 호연지기는 ‘공명정대한 인격에서 우러나는 호방한 마음’ 또는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정대하여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는 도덕적 용기로’로 인식되고 있다. 이렇게도 뜻이 깊고 오묘한 호연지기,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지향해야 할 ‘인간의 길’이 아닐까 싶다.
요즘 젊은이들의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인터넷시대의 도래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스마트폰과 게임에 매몰되어 가는 것 같아 심히 걱정이다. 호연지기를 모르고 성장해온 내 젊은 시절도 너무 아쉽다. 청운의 꿈을 품고 미래를 개척해나가야 할 저 젊은이들에게 진정 호연지기를 키워줬으면 하는 마음 절실하다.
필자소개
수필문학으로 등단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