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物語] 무술년의 국제 해전
[유주열의 동북아物語] 무술년의 국제 해전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전 나고야총영사)
  • 승인 2018.07.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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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무술년도 절반이 지났다. 420년 전 무술년(1598년)에 한반도 남해안에서는 한중일 3국의 국제 해전이 있었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다. 그 해 무술년 8월(이하 음력) 임진 정유양란을 일으킨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었다. 한반도에 침략하여 왜성을 쌓고 장기전을 준비한 왜군들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호남공략의 중요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한 해 전부터 전라도 순천에 왜성을 축성했다. 일본군이 남해안에 축성한 8개의 왜성 중의 하나다. 15,000명의 왜군과 500척의 왜선이 배치된 순천 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순천의 왜성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성 주위에 바닷물을 끌어넣은 해자(垓字)가 있고 그 위로 인마가 출입할 수 있는 다리(橋)가 놓여 있어 왜교성(倭橋城)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얻었다.

왜교성의 고니시도 철군을 준비했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은 수륙병진으로 왜교성 함락을 목표로 집결했다. 육군은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과 수군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함대였다.

무술년 9월20일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 해전이 시작됐다. 조명 연합수군은 초전에 왜교성에서 2.5km 떨어진 장도를 공격하여 수중에 넣었다. 장도가 아군의 수중에 놓이자 고니시군의 탈출 퇴로가 끊겼다. 육군은 왜교성에서 3.5km 거리의 검단산성에 사령부를 두었다. 총사령관 유정은 강화회담을 미끼로 고니시를 유인 생포하려다 실패하자 고니시는 아예 성 밖을 나오지 않고 농성전에 들어갔다.

10월2일 조명연합군은 수륙병진으로 왜교성을 총공격했다. 수군은 전공을 세웠으나 육군은 왜군의 대포와 소총에 역공을 당했다. 그 후 총사령관 유정은 전의를 잃어 싸우지 않고 관망만하여 조명 연합군의 수륙병진 작전을 어렵게 했다. 유정이 이끄는 육군이 잘 싸웠다면 왜교성이 함락되고 고니시군을 괴멸시킬 수도 있었는지 모른다. 왜교성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장도에 사령부를 둔 이순신 장군은 해상을 봉쇄하여 고니시군의 철수를 막고 있었다.

고니시는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인근 사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지원을 요청했다. 본래 요시히로와 고니시는 적대관계였다. 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천하를 통일할 즈음 히로시마(廣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중부지역은 모리(毛利)가문이 득세하고 규슈(九州)는 시마즈 가문이 버티고 있었다. 오다는 히데요시를 시켜 모리 가문을 정벌하는 전쟁에 보내놓고 자신의 처소였던 교토 혼노지(本能寺)에서 심복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분전 끝에 자결한다.

오다 사후 미쓰히데를 꺾고 실권을 잡은 히데요시는 주군 오다의 통일사업을 계속하여 일본 중부지역의 모리가를 정벌하고 시마즈가의 규슈만 남겨 두었다.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大名 지방영주)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20만 대군으로 마지막 정벌지 규슈로 진격했다. 임진왜란이 나기 6년 전인 1586년이었다.

규슈의 왕으로 불리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수만의 군사로 20 만 대군을 막을 수 없었다. 요시히로는 자신의 영지 사쓰마(薩摩 지금의 가고시마현)를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북부 규슈를 히데요시에게 넘겼다.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충복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나누어 주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자신의 영지를 빼앗은 가토와 고니시와 함께 조선 침략에 나선 것이다. 요시히로는 조명 연합군이 지키던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심당길(심수관의 선조) 박평의 등 수많은 도공을 납치하여 오늘 날 사쓰마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고니시의 지원 요청을 받은 요시히로는 500척의 전함을 이끌고 광양만으로 진격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조명 연합수군은 노량해협에서 막기로 하고 남해 관음포에 매복하고 있었다. 무술년 11월 19일 새벽 4시부터 조명 연합수군과 요시히로군은 서로 엉켜 싸웠다. 명나라 제독 진린의 대장선이 왜군에 의해 세 겹으로 포위되는 위기에 처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나서 진린을 구출하지만 이 와중에 자신은 왜군의 유탄에 맞고 명의 등자룡(鄧子龍) 장군도 전사한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의 어립선(御立船 지휘선)이 파손 침몰되어 다른 왜선에 의해 구출되어 겨우 탈출했다. 출동한 함대의 대부분이 침몰되고 50척만이 도주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혼란 중에 해상봉쇄가 풀린 고니시 군도 여수 앞바다로 나와 부산으로 집결 귀국할 수 있었다. 무술년의 한중일 국제해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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