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꿈에 그리던 곡부와 태산 
[이영승의 붓을 따라] 꿈에 그리던 곡부와 태산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8.07.1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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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에서 유학 경전을 수강한지 6년째이다. 시경을 시작으로 소학, 대학, 중용을 마치고 지금은 논어를 듣고 있다. 상반기 종강을 앞두고 수강생 중 한분이 ‘논어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어찌 공자의 고향을 가보지 않을 수 있느냐?’고 교수님께 건의하여 곡부와 태산 탐방이 전격 성사되었다. 7월1일부터 3박4일간 일정인데 유학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 40명의 대인원이 쉽게 모집 되었다

곡부와 태산은 평소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실로 가슴이 벅찼다. 나는 결혼 40주년 자축을 명분으로 아내와 같이 가게 되었다. 여름 장마철이라 날씨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 비는 한 차례도 내리지 않았으며, 매일 구름이 적당히 끼어 양산이 필요 없을 정도로 최상의 날씨였다. 여행은 무엇보다 누구와 같이 가느냐가 중요한데 모두 유학을 숭상하는 분들이고, 특히 강의를 하시는 지도 교수님까지 함께하여 가는 곳마다 식견 높은 해설을 해주시니 이보다 더 즐겁고 감동적인 기행이 어찌 또 있으랴 싶었다.

인천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2시간도 채 못 되어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에 안착했다. 버스로 다시 1시간 반 정도 달리니 꿈에도 그리던 공자의 고향, 곡부에 도착했다. 곡부는 춘추전국 시대 800년간 노나라 수도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현재 인구는 65만 정도인데 20%가 공(孔)씨 라고 하니 이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문중임을 알 것 같았다.

다음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공묘(孔廟)였다. 공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데 기원전 479년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짓기 시작하여 역대 왕조가 확대 개축하였으며 현 건축물은 청나라 때 지었다고 한다. 전체 면적이 30여만 평이나 되며 방의 수가 무려 466개로 북경의 고궁 및 태안의 대묘와 더불어 중국 3대 건축물이란다.

공묘의 본전(本殿)인 대성전(大成殿)은 높이 25m, 폭 46m, 길이 25m로 중국에서 자금성 다음으로 큰 건축물이다. 대성전에 들어가기까지에는 여러 개의 문을 거치는데 그 과정에 9개의 안뜰이 있다. 곳곳에 역사 서린 비석들이 즐비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2,100여 개나 되었다. 대성전의 정문은 대성문이며 그 동서 양측에 금성문과 옥진문이 자리하고 있다. 대성문을 지나 대성전 앞에 다다르니 정면 상단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자리한 대성전 현판이 우리를 맞이했다. 황금색의 이 현판은 청나라 옹정제의 친필이라는데 글자의 크기만도 1m가 넘어보였다.

대성전 사방의 복도는 용이 새겨진 28개의 웅장한 돌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전면 10개의 각 기둥에는 구름을 헤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2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용과 황금색은 황제를 상징하여 황궁에만 사용할 수 있었음을 감안하면 당시 공자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대성전 안에는 높이 3.3미터나 되는 거대한 공자의 조각상이 위엄을 부리고, 그 양쪽에는 안회, 증삼, 공급, 맹가 네 제자의 2.6m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 가히 장관을 이루었다.

다음에는 공묘의 오른편에 위치한 공부(孔府)로 자리를 옮겼다. 공부는 공자의 직계 장손들이 2,500여 년 동안 거주하던 관저로 1,038년에 세워졌단다. 공부의 면적은 25여만 평으로 방의 수가 463개나 되는 방대한 건축물이었다. 한(漢)나라 이후 역대 황제들은 공자를 극진히 존중하여 그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제후와 동등한 지위를 주었으며, 송나라 때부터는 공씨 가문의 대표자에게 연성공(衍聖公)이라는 지위를 내려주었다. 마지막 연성공은 공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孔德成)인데 장개석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감으로서 그 직계 후손들은 현재 대만에 거주한다고 했다.

다시 20여분 버스를 타고 공자의 묘가 있는 공림(空林)을 찾았다. 공림은 대대로 내려오는 공씨 집안의 가족 묘지다. 60만 평이 넘는 광활한 대지위에 10만여 기의 묘들이 빽빽한 나무와 함께 그야말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공자 묘 앞에 다다르니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는 8자의 비석이 우리들의 머리를 저절로 숙여지게 하였다. 무덤 앞 왼쪽에 작은 집 한 채가 탐방객들을 줄로 세우기에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았다.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수많은 제자들이 3년 상을 마치고 다 돌아갔으나 ‘자공(子貢)은 스승을 잊지 못해 묘 앞에 혼자 남아 3년을 더 시묘했다’는 바로 그 움막의 터였다. 말로만 듣던 얘기를 눈으로 확인하니 감회가 벅차올랐다.

다음 날 기행 일정은 내 나름 이번 여행의 절정이라 여기는 태산 등정이었다. 태산에는 도교 및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그리고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무수하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대묘(岱廟)인데 ‘태산의 신’을 모신 사당이다. 태산이 유명한 것은 고대 제왕들이 나라의 태평함을 고하는 봉선제(封禪祭)를 이곳에서 거행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219년 시황제의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이곳에서 봉선제를 거행했단다. 대묘 난간에서 까마득히 보이는 태산을 바라보니 학창 시절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양사언의 시조가 생각났다. 그때는 태산이 실로 엄청 높은 줄만 알았는데 태산은 해발이 낮은 평지에 솟은 산이라 그렇지 실제 높이는 1,545m로 한라산보다도 낮다. 태산은 화산, 숭산, 형산, 황산과 더불어 중국의 5대 명산으로 꼽히는데 흔히 오악(五岳)이라 불린다. 이중에서 태산을 으뜸으로 여겨 오악지장(五岳之長) 또는 오악독존(五岳獨尊)이라 일컫는다.

셔틀버스를 타고 계곡과 산등성이를 돌고 돌아 중천문(中天門)까지 오른 후 다시 이 산의 명물인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부근의 남천문(南天門)에 도착했다. 남천문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770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과정에 ‘천국의 경계선’이라고 하는 천하의 절경 승선방(昇仙坊)이 있다. 여기서 숨을 몰아쉬며 20여분을 더 오르니 드디어 정상인 옥황정(玉皇頂)이 눈앞에 나타났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가 구름을 딛고 하늘을 날고 있다. 천국에 올라있는 나야말로 신선이 아닌가 싶었다. 수많은 바위들에 새겨진 역대 제왕들의 휘호와 대문호들의 문장은 벅찬 가슴을 더욱 놀라게 했다.

공자는 30대 중반에 이 산에 한번 오르고 말년에 애제자 안회와 함께 한 번 더 올랐다고 한다. 등태산이소천하(登泰山而小天下: 태산에 오르고 나서 천하가 작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유명한 말도 이때 남긴 말이다. 오늘날과 같은 도로와 차량도 없고 케이블카도 없는 상황에서 노구를 이끌고 이 높은 정상까지 올랐다니 실로 믿어지지가 않는다.

태산! 조선의 선비들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 아니던가? 그리고 공자의 문묘에 배향 한번 하기를 얼마나 소망 했던가? 나 역시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자 그리던 곳이었다. 대묘에서 아득히 태산을 바라보고, 다시 정상에서 산하를 내려다보며 감탄하던 그 황홀의 순간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내도 함께 오기를 잘 했다며 마냥 즐거워했다. 버킷리스트 하나를 해결했으니 이 또한 의미가 크다.

필자소개
​수필문학으로 등단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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