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항일유적 탐방-1]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터엔 안내판도 없어
[만주항일유적 탐방-1]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터엔 안내판도 없어
  • 통화=이종환 기자
  • 승인 2018.08.0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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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후 만주에 세운 첫 독립운동 기지...무장독립군 대거 배출

본지는 중국 심양의 한중교류문화원(이사장 안청락), 대한걷기협회(회장 김정수)와 함께 7월25일부터 30일까지 중국 동북3성지역 항일독립운동 유적을 둘러보는 ‘만주독립운동유적탐방’을 진행했다. 모두 36명이 참가한 이 탐방은 심양에서 출발해 무순, 통화, 집안, 백두산, 연길, 길림을 둘러 다시 심양으로 해산하는 5박6일간의 일정이었다. 이 탐방 여정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

경학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민가로 바뀌어 있다.

유하현(柳河縣)으로 들어서자 버드나무 가로수가 길 양켠에 서 있었다. 가지가 늘어진 수양버들로, 현(縣) 이름을 따서 가로수로 세운 것같았다.

10분여를 가자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했다. 버스를 내려 좁은 골목을 따라 오르면서 비감에 젖어들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고 만리타향에 찾아가신 분들이 오르내린 길이라 생각하니 돌부리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주민들이 길가에 세운 옥수수 저장창고를 지나자 제재소 같기도 하고, 벽돌 공장 같기도 한 길죽한 건물이 나타났다. 그곳에 가려면 짧은 진흙탕 길을 지나야 했는데, 어른이고 학생들이고 간에 신발에 흙탕물이 튀길까 조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곳이 경학사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안상경 박사가 설명을 했다. 심양에서 중한문화산업연구소를 운영하며, 독립운동과 동포, 한반도 관련 문화콘텐츠들을 연구하는 그는 이번 행사 진행을 맡아 답사팀을 안내했다.

“아무 안내판도 없군요. 길 입구에도, 그리고 여기에도.... 경학사나 신흥강습소가 있었다는 아무 흔적이 없네요.”

답사팀에서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현지에 사는 중국인 주민은 “요즘 찾아오는 한국 단체들이 더러 있다”고 말했다. 이곳이 경학사 터로 한국에서는 알려져 있는 듯했다.

천안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사연구소가 만든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지역별 정보에는 ‘경학사’와 관련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경학사는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통하여 조직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재만한인의 자치단체를 표방하였으나, 사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혁명단체였다. 책임자는 경북 안동지역에서 활동하다 망명한 이철영 또는 이상룡이었다. 경학사는 민생과 교육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마을이 새롭게 조성되어 당시 경학사가 있었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독립기념관조차 경학사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니까 ‘안내판’을 세우지 못한 것 아닐까라고 위로하면서, 길을 다시 걸어나왔다.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의 홈페이지에는 만주로 떠나던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11년 1월 종손으로서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은 후 집안의 노비문서를 태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일가 50여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안동-추풍령-서울-신의주-단동-환인현 횡도촌-유하현 삼원포에 이르는 2천5백리의 망명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석주 이상룡은 망명기록인 ‘서사록(西徙錄)’에서 ‘저녁 무렵 행장을 수습하여 홀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상룡의 처남 백하 김대락 일가와 황호 일가, 김동삼 일가 등 안동지역 사대부들이 함께 집단 망명의 길에 나섰다....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이들이 횡도촌이라는 만주의 한 작은 마을을 거쳐서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라는 마을에 집결했다.”

경학사 추정지로 가는 골목길. 뒤로 대고산이 보인다. 1911년 대고산에서 300명이 모여 경학사 설립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교육을 위해 신흥강습소도 세웠으며, 이듬해 통화현 합니하로 이동한다. 정부가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신흥강습소는 1911년 말 제1회 특기생 40여 명을 배출했다. 그러나 추가가에서는 시설이 열악하여 제대로 된 교육과 군사 훈련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12년 7월 통화현 합니하에 새 교사를 신축했다. 병영과 학년별 강당, 교무실, 취사장, 내무반이 마련돼 본격적인 군사 훈련이 가능해졌다. 교사 신축은 이석영 등의 재력으로 가능했지만, 운영비를 충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학교 당국이 산에 밭을 일구고 학생들은 노동하는 둔전병 제도를 도입해 학교 재정을 충당해 갔다. 학교는 군사 교육뿐만 아니라 역사와 국어, 지리 교육을 강조하여 민족정신 함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 덕성 교육과 경제 및 교육, 과학 교육 등도 이뤄졌다. 또 학생들은 무용(武勇)을 자랑하는 창가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터는 지금 블루베리농장과 도라지농장으로 바뀌어 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제2의 군영인 백서농장(白西農場)을 1915년 봄에 마련해 정예 훈련을 실시했다. 처음 입영한 인원은 385명이었고, 농장주는 김동삼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3월 13일 부민단은 주변 단체를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로 확대 개편되었다. 또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면서 신흥 학교를 찾는 한인들이 급증하자, 1919년 5월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로 학교를 이전 개교했다.

이렇게 해서 배출된 학생들은 나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인재들로 커 간다. 만주와 중국, 연해주 등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독립운동이 경학사, 신흥무관학교와 무관하지 않은 것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안동 임청각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표적인 곳으로 언급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그가 일가 지인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자, 일제가 그 집 마당을 가로지르도록 철도를 놓았다는 곳이다. 그 철도는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있다.<계속>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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