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항일유적 탐방-3] 수풀을 헤치고 찾아간 유적들...이진룡 양세봉 윤희순 기념비
[만주항일유적 탐방-3] 수풀을 헤치고 찾아간 유적들...이진룡 양세봉 윤희순 기념비
  • 집안=이종환 기자
  • 승인 2018.08.0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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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이틀째 여정...옛 고구려 수도 집안에서 압록강에 발도 담궈

둘째날의 첫 행선지는 이진룡 장군과 우씨부인의 의열비였다. 비석은 길가에 있었으며, 한쌍으로 돼 큰 돌위에 세워져 있었다.

황해도 출신인 이진룡 장군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영변의 운산 금광 마차를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1917년 관전현 청산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이듬해 평양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의 순국소식을 들은 부인 우씨도 청산구 은광자에서 따라 순절했다. 관전현 청산구향 구대구촌에 서 있는 비는 이같은 충절과 정절을 기린 비였다.

이곳을 찾은 답사팀은 비석을 둘러보고는 함께 묵념을 올렸다. 그런데 한국에서 함께 탐방에 나섰던 김도 세계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가 비문을 보고는 흥미로운 해석을 했다. 이진룡장군의 의열비 옆에 나란히 세워진 우씨부인의 비문에 대해서였다.

우씨부인의 비석에는 ‘유명조선국열부유인우씨지묘(有明朝鮮國烈婦孺人禹氏之墓)’라고 적혀있었다.

“비문에 ‘유명조선국’이라고 쓴 것을 만주땅에서 보다니.... 한국에는 많이 있는데, 중국에서 이런 비석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김도 부총재가 이렇게 말하면서 ‘유명조선국’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병자호란과 관련이 있다는 게 그의 설명.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는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멸시해온 조선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치욕이자 수모였다. 그후 조선 사대부들은 청에 대한 분개의 뜻도 담아, 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를 강화해갔다.

“유명조선국이란 명나라에 속한 조선국이라는 뜻입니다. 조선 후기에 세운 한국의 비석들에 이렇게 쓴 것들이 많아요. 그런데 청나라도 망한 뒤인 1917년에 조선도 아니고 만주에 세운 우씨부인 열녀비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니....”

이같은 설명으로 ‘조선 후기 사대부’에 대한 성토 분위기가 이는 가운데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다음 행선지인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로 향했다.

노학당 기념비 앞에서 단체촬영했다.
노학당 기념비 앞에서 단체촬영했다.

한시간여를 달리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학당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이었다. 기념비는 차에서 내려서 100여 미터를 내려간 논밭 가운데 서 있었다.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해 노학당을 세운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의 숭고한 뜻이 서린 곳입니다. 1911년 춘천에서 중국 신빈현으로 망명한 윤희순은 남괴마자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세워 5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습니다. 아들들도 모두 독립운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잡혀 숨졌습니다.”

요녕조선문보 주필을 지낸 조선족 동포 전정혁씨가 기념비 앞에서 노학당과 윤희순의 생애에 대해 설명을 했다. 노학당 기념비는 2008년 세웠다고 한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연구해온 전정혁씨는 이날 마침 노학당 기념비 비석의 글씨에 검은색 덧칠을 하는 일을 관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우리 일행의 방문과 일정을 맞추었던 것 같았다. 또 현지에서 노학당 기념비를 관리해온 조선족 동포도 나와서 함께 사진를 찍었다.

이어 찾은 곳은 양세봉장군 기념비와 7인열사능원이었다. 신빈현 왕청문 협피구에 있는 양세봉장군 기념비는 커다란 탑신에 흉상이 얹혀 있는 대형기념탑이었다. 1995년 신빈현 조선족 기업가협회가 중심이 돼 왕청문 조선족 소학교에 세웠으나, 학교가 한족학교로 바뀌면서, 2008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했다고 안상경 박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양세봉장군 기념비는 큰길에서 산쪽으로 좁은 비포장도로를 500여m 들어가야만 했다. 의암 유인석 기념원이나 노학당 기념비와 마찬가지로 차량 네비게이션만으로는 찾아가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일행은 내려서 숲길을 헤치고 양세봉장군 기념비로 나아갔다. 원래 접근로가 계단으로 돼 있으나, 붕괴될 위험이 있어서 안전을 위해 수풀을 헤치고 간다는 게 안내측의 설명이었다.

양세봉 장군은 3·1운동 직후 평안북도 삭주군의 독립군 천마산부대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인 1920년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총영(總營)에 참여했다.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결성되자 소대장으로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했으며, 1929년 만주의 각 단체가 통합하여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할 때 국민부 소속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이 되었다.

그는 1931년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되었으며,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서 군대를 양성하면서 흥경성전투, 노구대전투, 쾌대모자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하지만 1934년 일본 밀정의 계략에 빠져 환인현 소황구에서 안타깝게 전사하고 말았다.

숲길을 헤치고 찾아가기는 다음 행선지인 7인열사능원도 마찬가지였다. 이 역시 좁은 길을 타고 가다가 내려서는 다시 숲길, 풀길을 헤치고 가야만 했다. 안내자가 없으면, 쉽게 찾기 어려운 위치였다. 7인열사능원은 경신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만주지역 민간인 대학살 때 당한 한인학교 교사 7명의 무덤이었다.

경신참변은 1920년의 일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지역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신흥무관학교에 뒤이어 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됐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공해 일제에 적잖은 타격을 가했다.

1920년 6월7일 봉오동전투로 독립군에게 큰 패배를 당한 일제는 대부대를 만주에 투입한다. 독립군 토벌을 빌미로 초토화 작전에 들어간 일제는 불과 한달도 안돼 민간인 3,469명을 학살했다. 이때 숨진 7명의 한인교사들의 넋이 잠든 곳이 7인열사능원이었다.

풀을 헤치며 어렵사리 찾아간 능원 둘레로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 살펴 봐야만 했다. 비석에는 김xx 승xx 조xx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풀이 비석높이로 자라서 이름 석자가 다 보이는 비석이 없었다.

일행은 능원 앞에서 함께 묵념을 올렸다. 묵념을 위해 숙인 머리 위로는 7월말의 만주대륙을 달구는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마침 탐방단에 교육계 출신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들풀로 뒤덮힌 능원의 모습이 처량해서인지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7인열사능원은 통화현 부강촌에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후 탐방단은 압록강변에 있는 옛 고구려의 수도 집안시로 향했다. 집안으로 가는 길에 오녀봉삼림공원 어귀에서 잠시 휴식했다.

집안의 압록강변에 닿자 모두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건너편이 만포로 북한땅이었다. 사진을 찍은 뒤에는 물이 흐르는 부두로 나가서 압록강물에 발을 담궜다. 이날은 집안의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계속>

집안의 압록강변에서 강물에 발을 담구는 힐링시간도 즐겼다.
집안의 압록강변에서 강물에 발을 담구는 힐링시간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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