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항일유적 탐방-4] 집안(集安)은 '무덤의 도시(?)', 1만2천개 고분 남아있어
[만주항일유적 탐방-4] 집안(集安)은 '무덤의 도시(?)', 1만2천개 고분 남아있어
  • 이도백하=이종환 기자
  • 승인 2018.08.0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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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앞에서.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앞에서.

“집안(集安)에 있는 고분 수가 얼마나 될까요? 1백개? 1천개? 1만개?”

버스안에서 안상경 박사가 퀴즈를 냈다. 누군가 용기 있게 1천개라고 불렀다. 하지만 답은 달랐다. 무려 1만2천여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 말처럼 고구려의 옛 도읍 집안은 크고 작은 고분 1만2천개를 가진 ‘거대한 무덤의 도시’였다.

‘만주독립운동유적탐방’ 셋째날은 집안의 고구려 고분 탐방으로 시작했다. 압록강가의 호텔을 떠난 일행은 먼저 장군총을 찾았다. 장군총은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 한자어로 적석총(積石塚)이었다.

무덤을 뜻하는 한자로 흔히 4개가 쓰인다. 묘(墓)와 분(墳), 총(塚)과 릉(陵)이다. 한자어원을 풀이한 ‘설문해자’ 등에 의하면 묘는 봉분이 없이 평평하게 만든 무덤이다. 분은 흙으로 볼록하게 덮은 것으로 묘에 비해 후기 양식이다. 우리나라 무덤은 한자어 뜻으로만 따지면 분에 해당한다. 총은 봉분을 높게 만든 무덤이다. 능은 총보다 더 높은 무덤으로, 왕의 무덤을 지칭한다.

우리가 찾아간 장군총은 한 변이 31.5~33m이며, 높이는 14m로 웅장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작인 피라미드였다. 집안 고분 가운데는 이처럼 돌로 쌓아 만든 무덤도 상당수가 된다고 한다.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지만,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왜 옛부터 왕릉이라고 하지 않고 ‘장군무덤’이라고 했는지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웅장한 장군총을 시계방향으로 돈 다음, 보다 작은 돌무지무덤인 배릉도 참관한 뒤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광개토대왕릉은 광개토대왕비가 부근에 있어서 그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일찍부터 태왕릉으로 알려졌는데, 무덤 돌방으로 들어가는 방향과 비의 방향이 서로 맞지 않아, 이 또한 논란이 되고 있다.

일행은 태왕릉으로 가는 길에 먼저 광개토대왕비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다. 마침 전남도교육청에서 120여명의 학생들을 인솔해 이곳을 찾아, 광개토대왕비 앞은 사진을 찍는 인파로 붐볐다.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39m로 우뚝 선 선돌 모양을 하고 있으며, 비석 4면으로 1,774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중 일부 글자가 훼손돼 현재 1,534자만 알아볼 수 있는데, 남은 글자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간에 갈등도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건국설화로부터 시작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다룬 후,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의 이름을 자세히 적었다. 비석 마지막 부분은 능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기록이 흥미롭다.

“호태왕(好太王)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위에 비(碑)를 세우고 연호(烟戶, 수묘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셨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해, ‘수묘인을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사들인 자는 스스로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수묘인이 330호라고 했다. 무덤 하나에 그만한 수묘인이 있었다면, 귀족들의 무덤까지 합치면 수묘인이 얼마나 됐을까? 당시의 집안은 수도라기 보다는 수묘인의 도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 무려 1만2천개의 고분이 남아 있는 것도 이처럼 수묘인들이 열심히 지킨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광개토대왕릉을 배경으로 기념촬영했다.

이어 찾은 광개토대왕릉은 무덤 정상에 돌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무덤 정상과 돌방이 개방돼 있어서 모두들 올라가서 보고 나왔다. 돌방 사진촬영은 금지됐고, 입구에 관리인이 지켰다.

다음 행선지은 우산고분군이었다. 그곳은 광개토대왕 무덤에서 버스로 5분 정도 거리였다. 흙무덤과 돌무덤이 섞여 있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개방된 고분은 5호분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로 유명한 고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벽면에 물기가 흘러 그림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개방하다가는 그림이 빨리 훼손될 것이라는 생각도 스쳤다.

그림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입구에서 들어오는 통로에서 탄성이 시끌벅적 울려퍼졌다. 고분벽화가 있는 석실로 오는 통로 속이 서늘해 학생들이 기뻐서 내지른 소리였다. 이날 바깥 날씨가 워낙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오회분 5호분 입구

고구려 고분을 돌아본 뒤, 버스는 집안을 떠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터를 찾았다. 집안에서 버스로 3시간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방문은 앞에서 소개했다. 굳이 덧붙인다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가 경술국치 후 만주에 처음 만들어진 독립운동기지라는 점이다.

안동의 혁신유림과 서울의 명문 사대부 집안들이 패망한 나라를 살리기 위해 땀과 열정을 쏟았던 곳이다. 그렇게 뿌린 씨앗은 이후 만주항일독립운동으로 연면히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또다른 현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추가가의 경학사와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를 둘러보고는 통화를 떠나 백두산으로 향했다. 버스는 백두산 원시림을 뚫고 가는가 했더니, 송화강도 건너고 또 건너며 길게 끼고 달렸다. 해가 지더니 커다란 보름달이 하늘로 떠올랐다. 이날은 백두산 입구의 이도백하에서 숙박했다.<계속>

광개토대왕비 앞에서.
광개토대왕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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