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우의 문학 산책] 아리랑 민족의 문학, 최명희의 ‘혼불’···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1)
[장인우의 문학 산책] 아리랑 민족의 문학, 최명희의 ‘혼불’···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1)
  • 장인우<순천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8.08.0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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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봉천 서탑거리를 찾아 심양에 갔으나 번화한 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일정에 쫓겨 한국에 오고 말았습니다. 아쉬움이 남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만주의 영구에서 서탑거리를 찾아들어 제일면점 김씨네 아낙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던 김제댁의 이야기를 저의 지난날 옛이야기로 풀어내보려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들 못살았어? 지나친 과장 아니여?”라고 물으시던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일제 강점기 유랑민들의 삶은 믿기지 않을 만큼 비참했음을 전하려 하지만 늘 쭈뼛거려지고 멈칫대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해뜰날’은 제가 유랑민의 삶들에 보내는 노래이고, 우리 모두의 마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필자주)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정말 그럴까요? 봉천 서탑거리를 꿈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알고 꾸역꾸역 몰려드는 가련한 저 사람들에게 ‘쨍하고 해뜰날’은 돌아올까요?

아마도 제가 스무 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대학 1학년 해맑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라는 온통 88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떠들썩했고, 대학 캠퍼스는 각종 학내 문제들로 광장마다 학생들의 함성소리 가득 차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전주 인후동 큰오빠네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사실 얹혀살았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얹혀사는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엄마 아빠는 전주 인후동에서의 삶을 접고 서학동 ○○아파트 상가에서 잠시 동안 슈퍼마켓을 했습니다.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는 큰아들과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는 큰며느리 내외와 당신 자식들을 끼고 살아가는 삶은 엄마 아빠에겐 나름의 성공 신화였고, 자다가도 가슴 벅차오르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손녀딸들 재롱에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젊은 노인네의 삶은 아직 젊기에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엄마 아빠에겐 줄줄이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가장 큰 명분은 둘째 아들 결혼과 막둥이 아들 제 모양 갖추기, 막내딸 대학 보내고 시집보내기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를 벗고 겁 없이 뛰어다니던 대학 캠퍼스는 인생에서 가장 멋진, 가장 화려한 공간의 시간이었습니다. 은행나무 가로수길 막 새잎을 돋아내우는 봄은, 싱그럽고 신비로우면서도 심장 고동 소리 짙게 퍼지는 생명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봄날엔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같은 노랫말은 굳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단조롭지 못하고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해서 제각기 푼수에 맞추어 살아가다 보면, 얼었던 흙을 비집고 나슬나슬 세상 밖으로 얼굴 내민 나숭개 캐고, 달래 캐고, 씀바귀 캐어 데치고 무쳐내도 배고픈 사람들 얼굴에 누우런 기운은 사그라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태곳적 하늘을 닮았는지 하늘 맞닿은 바닷물 빛깔을 닮았는지 젖빛 솜털 뒷면에 감추고 움쑥움쑥 저절로 돋아난 쑥 야무지게 캐어, 흐르는 물에 살살 씻어 된장 풀어 국으로 끓이고, 쌀가루 범벅범벅 뒤섞어 쑥버무리떡으로 쪄 먹으며 보릿고개 넘어가는 사람들에게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노랫말은 눈물겨운 소망인지도 모릅니다. 

스무 살 생기발랄했던, 통통 물오르던 시절, 여름이 되면서 엄마 아빠는 태인으로 내려갔고, 태인 터미널 매표소 옆 칸에서 슈퍼라 말하기엔 너무 작고 매점이라 말하기엔 품목이 너무 다양한 가게, 점방을 열었습니다. 본래 백수라는 이름을 가진 아저씨네가 하던 것을 인수받아 했던 것인데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곳이었습니다. 

태인 터미널 매표소 맞은편 오른쪽엔 농약사, 철물점, 미용실, 문방구, 슈퍼마켓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옆을 널찍하게 형제 택시 사무실이 있었고, 형제 택시 뒤로는 후줄근하게 때 절은 집들이 올망졸망 옴팍한 곳에 엎어져 있었습니다. 전주에서 원평을 지나 태인으로 들어서는 직행 버스가 정읍에서 복흥 지나 사포에서 장재동, 분동, 서재리, 사람들 태우고 달려오는 시내버스와 엉켜 덜컹대는 터미널 입구 왼쪽 편으로는 배 나온 아줌마의 청송집이 있고, 날씬한 아가씨들 웃음소리 간간이 터져 나오는 금다방 있는 곳에 곧은 자세로 서 있는 수은등이 장대같이 솟은 키로 비추어 주어도 낯빛 밝아질 기력조차 잦아드는 곳에 어린 송대관이 살았더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어린 손녀들 걱정에 큰아들 내외 걱정에 형제 택시 부근에 살던 할머니를 큰아들 집에 곁들여 살게 했던 엄마는 늘 큰아들 내외 후덕한 공을 침이 마르게 자랑했고, 할머니는 TV에서 해뜰날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고생 지질머리 나게 했지.’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했습니다. 

“집이라고 원, 바람 한 점 막아주는 것도 지대로 못 허는디 불 땔 나무도 없고, 밥 먹을 양석도 없이 어린 것이 배 많이 곯았제. 본래 집안은 좋은 집안이었는디, 시상이 혼란허니 집안도 어그러지고, 사람들 사는 것이 참 말이 아니었지. 지금잉께 저만허지, 참 그맀어.” 말끝엔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기제.”를 덧붙이곤 했습니다. 

당신 막둥이 아들 끼니나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늘 걱정이던 할머니는 우리 엄마 막내인 저에게 켜켜이 쌓인 정을 쏟아냈고, 그 정으로 애가 타던 할머니는 큰며느리 자랑을 해대는 엄마에게 막내딸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는 인후동집을 떠났습니다. 

새삼스럽게 이 무더운 여름날에 30년도 지나버린 옛날의 일들이 어제 일인 듯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봉천역 서탑거리까지 들어와 보퉁이 끌어안고 헤어진 지 오래 된 어렸던 동기간 생각에 눈물 쏟는 스무 살 김제댁이 증언하듯 쏟아내는 넋두리 때문일까. ‘울 수 있는 것도 복이지.’, ‘나도 한번 실컷 울어봤으면.’ 고개 떨구는 오유끼의 턱없는 부러움 때문일까. 전라북도 남원땅 거멍굴에서 영흥촌으로 밀려 와 살아보려 뼈 녹이던 양판식이보다 여자라서, 기생집에서 자라난 것이 때 아닌 죄가 되던, 너무도 하찮아서 장하지 못하던 여인, 스무 살 전라북도 김제댁의 눈물 때문일까. 스산하게 밀려오는 눈물은 파도가 되지 못하는 까닭에 소리 없이 미안하고 소리 없이 안쓰럽다. 

[필자소개] 
전라북도 정읍 태인생, 순천시 거주
순천문인협회, 팔마문학회 정회원
전남교육청 학교폭력방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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