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용정에서 들은 ‘일송정 소나무’ 이야기
[기고] 용정에서 들은 ‘일송정 소나무’ 이야기
  • 장인우<순천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8.08.0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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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독립운동유적탐방 참여해 용정 방문...이광평 전 용평문화원장이 현지 역사 소개
장인우(순천문인협회 회원)
장인우(순천문인협회 회원)

‘만주항일운동유적지탐방’팀을 태운 버스가 오랑캐령을 한 바퀴 돌았다. 해발 2,240m의 천불지산(天佛指山)을 넘어가는 고개였다. 안내를 맡은 이광평 전 용정시문화관장은 ‘부처님의 손가락이라는 뜻을 가진 천불지산에는 봄이 오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8월 중순이면 송이가 많이 난다’고 소개했다.

이어 명동촌에 들러 윤동주 생가를 둘러보았다. 시인 윤동주가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며 부끄러움의 역사를 가슴 절절이 풀어낸 시들이 생가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숨이 막히고 땀은 비오듯 흘렀지만 모두들 시비들에 눈을 모으며 시인의 생애와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새삼 되새겼다.

용정으로 되돌아가는 버스가 일송정이 보이는 곳에서 멈췄다. 이광평 선생은 “저기 산 중턱에 보이는 것이 일송정”이라면서, 일송정에 얽힌 얘기를 시작했다.

“비암산의 제일 북쪽 켠 돌바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생김새가 마치 정자처럼 생긴 소나무였다. ‘홀로 선 소나무가 꼭 정자처럼 생겼다’해서 용정 한인들은 ‘일송정’이라 불렀다. 나무는 아무것도 없는 돌바위에 뿌리를 내려 정자처럼 큰 나무로 자랐다. 이를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고, 그 나무 앞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자식이 생기게 해달라는 ‘기자제’도 지내곤 했다고 한다. 일송정이 있는 곳은 풍광이 아름다웠다. 동쪽으로는 용정 세전벌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발해의 두 번째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평강벌이 보여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관광지로도 자주 찾았다.”

이광평 선생은 이렇게 소개하며, 옛 일송정 사진도 찾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1908년 일본 간도 파출소 직원들이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인데, 사진에 일송정이 보이고, 그 크기가 매우 커서 실제로 정자처럼 서 있다는 설명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돌바위에 솟아난 소나무라니, 신비스러움에 경외감마저 들었을 것이다. 배고픈 한민족이 남부여대로 찾아가서 터를 잡고,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마을을 이루어 간 곳이었다. 척박한 곳에 꿋꿋이 뿌리 내린 것이 풀뿌리 같은 우리 민족과 성품이 닮았으니, 신앙이 되지 않았을 것인가 싶다. 이광평 선생은 이후 일송정의 수난사도 상세하게 소개했다.

“일본 간도총영사관이 세워진 이후 간도영사관 한 사람이 자꾸 시들시들 아팠다고 한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아서 점쟁이를 불러 물었다. 그런데 그 점쟁이 왈, ‘서쪽에서 오는 나쁜 기운 때문에 아픈데, 그 기운이 오는 곳이 일송정이다, 일송정 나무를 베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본 경찰들이 일송정에 총을 쏘았다. 하지만 일송정은 죽지 않았다. 화가 난 일본 경찰들은 사람을 보내 나무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구멍 안에 호두 씨를 넣고 구멍을 막았다. 그 후 일송정은 말라 죽었다고 한다.”

이광평 선생은 “어른들의 기억으로는 1937년에서 38년 사이에 일송정이 베어져, 1938년 이후로는 일송정을 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

귀 기울여 듣던 사람들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찌 소나무 때문에 병이 들었겠는가. 조선 사람들을 탄압하고 억압하며 수탈했던 일제에게 용두레 우물이나 일송정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독립군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해란강 따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때, 일제에게 일송정은 점쟁이의 말을 빌어서라도 베어버려야 할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소나무 한 그루에 총을 쏘고, 구멍을 내고, 호두 씨를 넣어서라도 없애야할, 역설적이게도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한민족의 기상이었을 것이다.

그후 비암산의 일송정을 되살려 놓으려는 시도가 이후 여러차례 이뤄졌다. 일송정 터에 ‘선구자 탑’을 세운 것도 그같은 노력의 하나였다. 한국의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이 1992년 용정 당국의 허락 아래 일송정 터에‘선구자탑’을 세웠다. 하지만 북한 외교부가 항의해 중국 외교부의 지시로 92년 5월 초에 군인들이 출동해 탑을 폭파시키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용정의 한인들이 노력해서 나중에 다시‘일송정’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광평 선생은 일송정 소나무를 복원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소나무를 복원하는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해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맨먼저는 1990년이었다. 일본에서 온 동포들 몇몇이 개별적으로 일송정 옛 자리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 나무들은 얼마 되지 않아 말라죽었다고 한다. 돌바위에 무작정 나무를 심었으니 살아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용정시 인민정부 부시장이 직접 나서, 비암산 그 부근에서 20년생 된 나무를 파다가 일송정 자리에 심었다. 이광평 선생은 그 과정도 모두 촬영해 자료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나무도 그후 10년간 잘 자라다가 2001년에 베어져버렸다. 일송정 복원 10주년 기념식을 이틀 앞두고 누군가 몰래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중국 경찰이 이 사건을 면밀히 조사했으나 딱히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가운데, 2002년에 나무를 다시 심었다. 그 해에 심은 나무는 북한에서 50년생 적송을 가져다가 옮겨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였던지, 아니면 옮겨 심는 과정에서 나무가 너무 고생을 해서인지 이 나무도 살아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2003년에 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가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광평 선생은 일송정 나무가 이처럼 몇 번 죽었다 살아났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일송정 나무에는 용정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이 들어 있고, 일송정을 통해 용정을 홍보하자는 마음도 들어있다”고 말했다. 용정 비암산에 여러 놀이 시설을 만들고, 꽃도 심고, 유리다리를 만들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라는 것이다. 구름다리 형식인 유리다리는 현재 건설중으로 오는 10월에 준공 예정이라고 한다.

일송정이 나오는‘선구자’ 노래도 사실은 ‘용정의 노래’라는 게 그의 소개다. 나이 든 용정 사람들은 다 익히 아는 노래라고 한다. 당초 노랫말에는 용정의 팔경이 들어 있었는데, 일제 치하 조선에서 온 악단들이 용정의 북극장에서 공연하면서 이 노래를 불러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후 1960년대에 한국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되고, 1990년대 한중수교 후에 이 노래가 다시 용정으로 건너와, 널리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유랑민들의 삶의 모습처럼,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처럼 수난을 거듭해 온 나무와 노래라는 것이 듣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해지게 한다. 그리고 갖은 수탈과 모진 탄압 속에서도 한 줄기로 흐르며, 역사의 물줄기를 이어가는 한민족의 집념과 끈기를 보여주는 역사의 산 증거임을 실감케 하는 시간이었다.

용정에서 이광평 선생이 내리고 연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일송정을 멀리서라도 본 느낌을 담아 ‘선구자’ 노래를 합창했다. 차창 밖으로는 용정의 세전벌을 해란강이 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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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원 2018-08-15 22:11:03
선구자 친일 노래 입니다.
조두남 윤해영 친일 부역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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