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코리안]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과 프랑코, 그리고 한국의 지리산
[비바 코리안]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과 프랑코, 그리고 한국의 지리산
  • 정길화(방송인, 본지 객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8.29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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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럴 수가... 놀라운 소식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30여 년간 철권(鐵拳) 통치를 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일세를 풍미하고 사망한 후 그의 무덤은 스페인 내전(1936-1939) 희생자들의 묘역인 국립묘지 ‘전몰자의 계곡(Valle de los Caídos)’에 존엄하게 안장되어 있다. 152미터로 세계 최대 규모인 십자가 아래 조성된 262미터 지하의 예배당 중앙에 그의 무덤이 있는 것이다. 사후에도 그 영광과 권위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의 무덤이 이곳에서 축출되어 이장된다는 소식이다. 정말 이런 날이 오는가. 정녕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신참 시절에 MBC 다큐멘터리 <지리산의 사계>를 제작할 때의 일이다(1985). 선배와 함께 천왕봉 정상에서 소설 <지리산>의 작가인 나림(那林) 이병주 선생(1921-1992)을 인터뷰했다. 그는 6.25 전후로 지리산 곳곳에서 빨치산과 토벌군의 격전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장차 지리산도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처럼 아군과 적군,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역사의 희생자들이 함께 묻히는 ‘화합의 계곡’이 되기를 바란다”고 소망을 피력했다. ‘망자의 유골에 무슨 이념이 있고 피아가 있느냐’는 노작가의 토로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다.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

그때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내전의 상흔을 극복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방식에 감동했다. 동족상잔의 현장인 지리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작가 이병주 선생에게 영감을 준 그 장소를 꼭 가고 싶었다. 이윽고 1995년 스페인 출장길에 이 계곡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호화로운 궁전인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은 가도 여기를 방문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했다. ‘전몰자의 계곡’을 안지 10년 만의 현장 방문이라 기대가 컸었다.

묘역은 마드리드 인근 과다라마(Guadarrama) 산맥의 쿠엘가무로스(Cuelgamuros) 계곡에 위치해 있다. 먼저 높이 152미터와 무게 20만톤의 거대한 십자가가 보이는데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관측될 정도라고 한다. 근 20년(1940-1958)에 걸친 공사 기간 중 바위산을 뚫어 만든 예배당은 길이가 262미터이고 최대 높이가 40미터다. 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 4억 입방미터의 암반을 파내야 했는데 대부분 인민전선군측 포로들이 투입됐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br>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십자가 아래 조성된 지하공간의 묘역에 가면 놀라운 광경에 접하게 된다. 광대한 바실리카인 지하 예배당의 성단 앞에 자리한 독재자 프랑코(Franco)와 리베라(Rivera)의 무덤이 시선을 빼앗는 것이다. 리베라는 스페인 파시즘의 본산인 팔랑헤(Falange)당의 창시자다. 묘역에는 내전 당시 양측에서 숨진 3만3천여명의 유해가 묻혀 있지만 결국 이들의 주검이 독재자의 미화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병주 선생은 이런 상황까지를 알고도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당황스러웠다.

나림(那林)이 1980년에 스페인 여행을 하고 쓴 기행문을 찾아보았다. 그도 ‘전몰자의 계곡’은 인민전선군이건 프랑코측의 반란군이건 전몰자의 영령을 진혼하기 위한, 화합의 상징으로서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인민전선군 포로들이 건설에 동원된 사실을 지적하고, “한편은 명령하고 한편은 강제노동을 한 관계로서 십자가가 화합의 뜻을 다하리라곤 믿어지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다만 “화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만은 좋다”면서 “한국도 진실한 뜻에서의 민족 화합을 이룩하는 날을 만들어야 하고, 나라의 중심부에 화해의 탑을 만드는 날이 있어야 하겠다”고 기술했다(‘이병주 문학기행, 스페인 내전의 비극’ 중에서). 지리산 정상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은 그 연장선으로 보인다.

1995년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 방문 사진
1995년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을 방문했다.

프랑코는 내전에서 이긴 뒤 이 묘역을 조성하고는 ‘국가 화해의 상징’ 또는 ‘국가적 속죄의 상징’이라고 일방적으로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 사후에 그의 유해는 지하 바실리카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고들 하지만 프랑코는 기억과 추모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결국 ‘전몰자의 계곡’은 프랑코의 개인의 무덤이면서 프랑코를 그리워하는 극우 세력의 성지가 되었다. 프랑코 시대에 추억과 향수가 있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정당성과 이념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소환되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했다. 이후 스페인 전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전몰자의 계곡’은 재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코에 반대해온 ‘희생자가족회’ 등의 단체들은 프랑코 체제의 흑역사를 청산하고 희생자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활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전몰자의 계곡’에 프랑코가 저렇게 묻혀 있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유족들은 내전의 당사자인 프랑코가 내전의 희생자들과 같은 장소에 안치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런 일들이 순풍에 돛단 듯이 전개되는 시대와 사회는 드물다.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는 것이다. 좌우 진영의 대립 속에 정권 교체가 일어나면 그 전까지의 논의는 중단되거나 없었던 일로 돌아간다. 사회당 정권 시절 구성된 전문가위원회는 “프랑코의 유해를 발굴해 다른 지역으로 이장하고 ‘전몰자의 계곡’은 중립적인 역사적 기념물로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수 세력인 국민당이 승리하자 논의는 중단됐다.

'지리산의 사계' 취재 당시(1985년) 이병주 선생과 함께.
'지리산의 사계' 취재 당시(1985년) 이병주 선생과 함께.

그렇게 반전에 반전이 오갔는데 프랑코가 마침내 이곳에서 축출된다는 것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 정부는 프랑코의 묘역을 이장하고 그 자리에 화해를 위한 기념시설을 건립하는 방안을 집권 사회노동당 정부의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묘역을 평화와 화해의 기념시설로 조성한다는 것이다. 스페인판 과거청산에 역사바로세우기다. 이번에는 의석 분포 상황이 집권당에게 유리하게 구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묘역이 ‘유럽에서 파시스트를 기리는 유일한 국립 시설물’로는 남아 있음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전몰자의 계곡’은 이제 비로소 내전 희생자들을 위한 ‘화합의 계곡’, ‘추모의 계곡’이 될 것인가.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79년... 스페인 정부는 프랑코 묘역 이전 외에도 과거사 청산작업 전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스페인내전과 프랑코의 철권통치 시기에 행해진 정부의 만행을 재조사하고 당시 사법부가 독재정권에 협력해 내린 결정들을 재심리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연합뉴스). 역사는 더디 가도 제 길을 간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리산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우리들 마음속 지리산에 ‘화합의 계곡’은 있는가? 나림 이병주 선생이 말한 ‘진실한 뜻에서 화합의 탑을 만들 때’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인가.

필자소개
방송인, 언론학 박사, MBC 중남미지사장 겸 특파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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