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物語-27] 바이칼호는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인가
[유주열의 동북아物語-27] 바이칼호는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인가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9.0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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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호에서 피서를!

중앙아시아의 지도를 펴 놓고 보면 남북 636km 동서 20-80km 면적은 남한의 1/3 정도의 기다란 호수가 비스듬히 누워있다. 현지인들은 자연이 만든 풍요로운 호수라는 의미로 바이칼 누르(湖)라고 부른다. 이 호수가 생성된 지는 2천500만 년 전이었으나 지금도 변화가 없다. 대부분의 호수는 오래되면 퇴적물에 메워져 없어진다고 하는데 바이칼호는 단층 호수로 호수의 바닥이 계속 침하되어 깊이를 더해 간다고 한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된 최대의 담수호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이 1642m이다. 호수의 자정 기능이 좋아 투명하여 호수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마셔도 되는 깨끗한 물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인류가 체격은 허약하나 맹수들과 싸워 이겨 생존하게 된 것은 돌을 이용한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돌을 깨트려 예리한 날을 통해 사냥을 했을 때를 일반적으로 구석기라 하는데 후기 구석기에는 깬 돌에서 나온 지금의 칼날처럼 좀 더 예리한 돌조각 즉 좀돌(細石)날을 이용하여 진전된 사냥도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바이칼호는 물이 깊고 깨끗해 많은 동물들의 식수원으로 제공됐다. 3만 년 전 동물을 쫓아 바이칼호 주변에 모여 살던 후기 구석기 인류들이 남하하여 한반도에 주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부는 사냥감을 쫓아 일본 규슈으로 건너갔다. 당시 지구는 빙하기로 한일 간에 가로 놓여 있는 바다는 모두 얼어 얼음위로 뚜벅 뚜벅 걸어서 건너갔다고 한다.

바이칼호를 다시 만남

지난 8월 중순 서울의 폭염을 뒤로 하고 바이칼호에 갔다. 수년전 베이징 대사관에 근무 시 모스크바에서 베이징까지 열차 여행을 한 경험이 있어 바이칼호를 만나는 것은 두 번째다. 당시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를 타고 울란우데까지 갔다가 몽골종단철도(TMR)를 따라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 때 시베리아 횡단열차 구간인 이르쿠츠크에서 울란우데까지 차창을 통해 바다와 같은 바이칼호를 반나절 이상 만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이르쿠츠크에 3박하면서 당시 차창으로 보았던 바이칼호에 손을 담구고 유람선도 타면서 바이칼호의 고유 어종인 ‘오물’을 시식하기도 했다. 바이칼호의 중간쯤에 위치한 알혼섬에서도 2박을 하면서 태고와 변함없는 바이칼호와 함께 아직 개발이 안 된 섬의 최북단까지 둘러보았다.

바이칼호의 지배자

바이칼호의 지배자로 역사의 기록에 처음 나오는 민족은 초원의 대제국을 건설한 흉노족이었다. 한나라 무제의 명령으로 사절로 갔다가 흉노왕 선우에 의해 바이칼호(당시 지명은 북해)로 귀양 가서 19년에 걸쳐 양치기를 하다가 풀려나 귀국한 소무(蘇武)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흉노족의 일족인 거란(契丹)족이 이곳을 지배하였다. 러시아에서 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란족에서 유래한다. 불멸의 대 영웅 징기스칸이 이 곳에서 태어나 거란족 지배하에 있던 몽골족을 통일하야 대제국을 세웠다. 몽골 제국은 바이칼호를 넘어 동시베리아를 거쳐 러시아를 침입하였다. 징기스칸 군대는 러시아의 류리크 제공국을 멸망시키고 항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까지 진출한다. 지금도 바이칼호의 주변에는 몽골족의 일부인 브랴트족이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몽골의 세계 대제국이 무너지면서 동 유럽과 러시아의 몽골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중국에서는 몽골의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 는 중앙아시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바이칼호는 태초처럼 무주지로 남게 됐다. 이때 18세기 러시아의 코사크가 모피 사냥꾼과 같이 이곳에 나타났다. 코사크는 15세기 이후 제정러시아의 농노제에서 도망간 농민 몰락 귀족으로 형성된 군사공동체다.

당시 소빙하기를 맞이한 유럽은 추위에 떨고 있었다. 난방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한 겨울에 체온을 유지할 있는 것은 모피뿐이었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은 선호하는 모피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러시아의 사냥꾼은 모피를 찾아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알라스카까지 진출하였다. 러시아의 모피 사냥꾼이 바이칼호의 지배자가 됐다.

바이칼호와 한민족

바이칼호는 우리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바이칼호는 자작나무숲을 떼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상쾌하고 안정된다. 바람도 없는 데 팔랑거리는 자작나무 잎새를 보면 신라 금관에 장식되어 흔들리는 원형 황금조각이 연상된다. 왕관의 기둥도 순록의 뿔이고 말다래가 자작나무의 껍질로 되어 있다.

신라인들이 바이칼호 근처에서 살다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는지 모른다.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가 수천 년 전 자작나무 숲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현지인이 몸에 좋다고 권하는 차가버섯이 실은 자작나무에 기생하는 암 덩어리로 차가버섯이 늘어나면 자작나무 숲이 사라진다고 한다. 차가버섯이 싫어졌다.

바이칼호가 우리민족의 시원(始原)임을 밝힌 사람은 최남선이다. 그는 일제가 우리 고대 역사를 말살하는 데 대항코자 우리 민족의 바이칼호 기원설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최남선과 함께 잡지도 만든 이광수는 바이칼호를 가보고 싶어 했다. 당시 바이칼호를 가기 위해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면 된다. 극동의 시발지는 블라디보스톡이다.

이광수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열차를 타고 울란우데나 이르쿠츠크에 가서 바이칼호수를 둘러 봤는지 모른다. 그가 1930년대 일간지에 인기리에 연재한 ‘유정(有情)’이란 소설은 바이칼호에서 시작하여 바이칼호에서 끝난다. 소설 도입부에 최석이라는 사람이 바이칼호반의 현지인 브랴트족의 집에서 민박하면서 편지를 쓰고 있다. 삭풍이 몰아치는 바이칼호의 겨울 풍경은 가보지 않고는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이칼호는 소련 땅이 되어 가 볼 수 없는 기억의 땅이 됐지만 1990년대 소련과 수교됨으로서 바이칼호는 비교적 쉽게 가 볼 수 있는 지역이 됐다. 서울이 폭염에 시달리는 하절기에는 이 지역으로 가는 항공편은 한국 관광객으로 만석이다.

바이칼호에 가장 큰 섬인 알혼섬에 가보니 현지 브랴트족의 민속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의 나뭇군과 선녀의 전설처럼 브랴트족의 젊은 샤먼(무당)과 백조처녀의 전설이 전한다고 한다. 백조 3마리가 하늘에 내려와 옷을 벗자 젊은 여인이 되고 그들이 목욕을 하는 것을 몰래 훔쳐 본 샤먼이 옷을 훔친다.

백조 옷을 잃어버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여인은 샤먼과 결혼해서 11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샤먼이 중년이 된 부인에게 훔쳐 숨겨 둔 옷을 꺼내 보이자 부인은 반가워하면서 백조 옷을 입고 ‘게르’의 연기 구멍을 통해 하늘로 날라 가버렸다. 샤먼의 11번째의 아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 우리 민족이 됐다고 한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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