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제작 후기] ‘고추 붉게 익는 마을 경북 영양 일월산 도곡리’-3
[방송제작 후기] ‘고추 붉게 익는 마을 경북 영양 일월산 도곡리’-3
  • 김영환 KBS PD
  • 승인 2018.10.08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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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방송은 어떻게 기획되고, 제작될까? 본지는 KBS 다큐멘터리3일을 기획 취재한 김영환 PD의 제작 후기를 지난회에 이어 소개한다.<편집자>

◇ 꽃할매와 후회 

신문은 지면의 제약을 받고 방송은 길이의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신문기사는 중요한 내용을 앞부분에 배치한다. 그래야 지면 제약을 받으면 뒷부분을 잘라대도 문제가 없다. 방송 다큐멘터리는 다르다. 신문처럼 길이가 넘친다고 아무데나 푹 잘라낼 수는 없다. 

‘다큐멘터리3일’는 특정 공간에서 72시간 동안 관찰하고, 엑기스만을 뽑아 60분으로 압축한다. 앞 뒤 타이틀과 앞 뒤 광고를 빼고 나면 실제 길이는 51분이다. 촬영분량이 대개 50시간이니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잘라내야 하는지 짐작될 것이다. 이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구 꽃할머니, 최애경 부녀회장님댁, 모내기 노래를 부른 석포어른 등 여러 어르신들의 노래 장면, 재봉 아재, 송이채취 등 통편집이 되었다.
       
통편집으로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꽃할매라고 불리는 김화춘 할머니 영상이다. 할머니는 마흔 넷의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여러 남매를 키웠다. 김 할머니를 알게 된 건 그분의 아들이 마을 밴드에 올린 어머니에 대한 사진 몇 점과 짧은 기사 몇 줄 덕분이었다. 마을 어귀, 버스 정류장, 집안마당에 꽃을 심어 꽃할매로 불렸다.

제작진이 꽃할매를 취재하러 간 날은 마침 할머니의 생신날이었다. 객지에 나간 자녀, 며느리, 손자 등 가족들이 대거 참가해 거실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차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어느 자식 하나 빗나가지 않도록 늘 뒷바라지 했다고 한다. 자식들이 이사를 가면 혹시 나쁜 데로 가지는 않았을까봐 심지어 거제도까지 찾아가서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 

방송 길이 때문에 꽃할매 부분을 통편집 한 그날 밤 나는 꽃할머니가 입게 될 마음의 상처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꽃할머니! 실망 마시고 내년에도 도곡리에 빈 땅 어디에든 올해처럼 꽃씨를 뿌려주실 것을 지면을 빌려 부탁드린다. 

 ◇ 귀농인 이재춘씨와 희망

우리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도곡리에는 청년들과 아이들 천지였다. 우리 동기생만 해도 무려 40명 가까이 됐다. 그런 마을이 지금은 아이들 모두 합쳐 8명에 불과하다. 벽화에 그려진 아이가 현재 도곡 아이들 전부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외지인들이 도곡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5년 전 옛구도실 저수지 바로 앞에 있는 밭을 매입해 3년 째 농사를 지어온 이재춘 씨도 미래의 고향마을 주인공이 될 듯하다. 이재춘 씨가 3년 째 고추 농사에 재미를 붙이게 된 건 전적으로 권영조 씨와 이산뜻한 후배의 따스한 배려 덕분인 듯했다. 

특히 이산뜻한은 귀농인이 땀 흘리고 씻을 데 없을 때 자기 집에 오도록 하며 씻을 곳을 마련해 주었고, 귀농인이 텐트 치고 자는 것이 힘들다는 걸 눈치 채고 집까지 내주며 아침밥까지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이에 귀농인은 제작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체 도곡리의 인심이 좋고, 사람들이 좋아서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진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조만간 도곡리에 사람들이 늘게 된다면 그건 도곡리 청년들의 이웃사랑 덕분이었다고 하겠다.  

◇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

이은자씨는 내 친구인 종구 동생이다. 예쁜 얼굴만큼이나 심성도 곱다. 주말에 부모님 일손 거들러 오는 자식들이 있으면 꼭 찍어야겠다고 촬영대본에 넣어뒀는데 마치 섭외라도 한 듯 주말에 맞춰 은자씨 가족이 친정을 방문했다. 은자씨는 1박 2일 일정에 밭에 나가서 부모님 고추 따는 일을 돕고, 집에 들어와선 부엌에서 맛난 음식을 준비했다. 

딸은 부모님과 작별할 시간에 서둘러 수돗가로 갔다. 고춧물이 벤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고춧물이 벤 빨간 고무신을 수백 번 문질러서 하얗게 닦고선 아버지께 신겨 드렸다. 촬영 화면을 프리뷰하면서 깊은 인상이 남은 한 컷이 바로 이 장면이다.   방송에서 부분 삭제된 은자씨의 인터뷰를 공개하면 이렇다. 

“전에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보내놓고 나서 많이 우셨대요. 이제 마음이 약해지나 봐요, 연세 드시면서. 부모님은 저희들이 온다면 일하시다가도 먼 찻길을 내다보며 우리 차가 오는지 본대요. 조금 일하다가 또 오는가 싶어 또 내다보시고 그러시며, 그러다가 또 기다리고...”

명절 때 차가 막혀 새벽에야 겨우 시골집에 도착하면 부모님은 방에 불을 켜놓고 뜬눈으로 계셨다고 한다. 부엌에 반찬을 차려놓고 자식이 안전하게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주무시지 않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아련하다. 

◇ 벚꽃, 이팝 꽃을 기다리며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인생에서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돼서 돌아오는 것,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서 오는 것, 나 혼자 외로움을 찾던 곳을 마음 맞는 좋은 벗들과 함께 어울려 오는 것이다. 은퇴 후 사람들은 저마다 귀향의 꿈을 꾼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은 고향 땅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귀소본능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냥 끌리는 게 고향이다.

아무 대가 없이 고향을 위해 배품을 실천하는 도곡리 출신들의 고향 사랑도 특별하다. 마을 숲 축제일이 돌아오면 출향인들은 열 일 제쳐두고 고향으로 달려간다. 행사 진행을 위해 모두가 십시일반 온정을 모아준다.

마을 숲 부지를 넓혀 숲이 더 울창해지도록 하면 좋겠다고 하자 전 출향인 대표는 수천만 원의 돈을 들여 형제들 명의로 토지를 매입하고 이를 마을에 기증했다. 신작로에서 마을 숲까지 올라오는 길에 나무가 없어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한 출향인은 올해 초 8천만 원 상당의 돈을 쾌척, 아예 도곡리 저수지까지 1.5킬로미터의 도로변에 이팝나무 225그루, 벚나무 75그루, 소나무 12그루를 식재하기도 했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고, 머지않아 벚꽃과 이팝 꽃까지 하얗게 필 고향 도곡리가 마냥 자랑스럽다.(끝)

필자소개
1987년 KBS 프로듀서 직종으로 입사, 기동취재현장, 세계는지금, 추적60분, 일요스페셜, 시청자칼럼 우리사는세상 등을 제작하였으며 재직 중 피디연합회 편집국장, KBS노조 정책실장도 역임. 현재는 <다큐멘터리3일> 프로듀서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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