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양조사원에 따르면 동해와 남해의 경계는 부산의 오륙도, 남해와 서해의 경계는 명량수로다. 이를 진도본섬 아래로 연장하면 조도군도야 말로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다.
과거 영국인들은 진도와 조도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보고하였다. 그들은 해도에 섬이름도 자기네 사람들 이름을 따서 표기해두었다. 하조도는 암허스트 섬, 상조도는 몬트럴 섬, 외병도는 샴록 섬, 내병도는 지스틀 섬이라고 말이다.
70년 뒤인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후에 일본을 의식한 군사적 요새지로 진도 조도일대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 정부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였더라면 진도와 조도는 지금의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변해 있지 않았을까.
도리산 전망대에 오르면 조도군도 외에도 더 넓은 세상이 다가온다. 뭍으로는 정동방향으로 땅끝마을이 길게 뻗어져 있다. 그 아래로 윤선도가 음풍농월하였던 보길도와 추자도가 보이고 맑은 날이면 제주도 한라산의 장중한 모습도 보인다. 해가 지는 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때 조도면에 속했다가 1983년 신안군으로 귀속된 만재도와 중국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가거도가 외롭게 존재감을 알린다.
진도 체도는 육지인양 육중한 모습으로 작은 섬들의 어미섬이 되어준다. 정북방향으로 신안군의 하의도와 하태도가 보이고 조금 더 좌측 편에는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과 조선의 하멜이라고 일컫는 홍어장수 문순득의 사연을 간직한 우이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문순득은 200년 전 영산포로 향하던 중 표류하여 오키나와(유구국)를 거쳐 필리핀 루손섬까지 갔다가 마카오, 난징, 북경, 의주를 거쳐 3년 2개월 만에 귀향하여 조선왕조실록에까지 실린 인물이다.
조도면지에도 ‘선조22년(1589) 유구국 상인 30여명이 표류해와 명나라 동지사편에 딸려 중국을 통해 돌려보냈다’ ‘숙종 42년(1716) 조도사람 9명이 유구국에 표착했다가 귀국했다’등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도가 옛날부터 더 넓은 세상과 통하는 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세계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반도는 태평양을 향해 솟아있다. 제주도가 대양을 향한 선봉장이라면 조도군도의 새떼 같은 섬들은 용맹하기 그지없는 돌격대의 위풍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조도에서 첫 근무를 시작할 때부터 나의 로망은 조도군도내의 대부분의 섬을 학생들과 함께 직접 답사하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오로지 육지와 진도 본 섬 나가는 것에만 열중할 뿐 이웃의 작은 섬들을 거의 가본 적이 없고 관심도 별로인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사실 가고자 해도 선편이 하루 한 차례나 이틀에 한 차례 밖에 없어 엄두도 못 냈다.
장우춘 면장과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낙도에 식수를 공급하는 면사무소 급수선을 체험학습에 연결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올 해들어 세 차례에 걸쳐 아이들과 십 여 개 이상의 섬들을 답사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설렘으로 다음 행선지를 기다리고 있다.
조도에 들어가려면 팽목항에서 배를 타야한다. 세월호 때문에 유명해진 항구다. 매주 팽목항과 조도 창유항을 드나들며, 낮이건 밤이건 도리산전망대에 올라 새떼 같은 섬들의 안부를 살폈다. 항상 강인하고 우아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 3년의 조도살이가 자부심과 자랑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