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윤봉길의사 상해의거 79주년을 맞아
[특별기고]윤봉길의사 상해의거 79주년을 맞아
  • 남효응
  • 승인 2011.04.2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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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은 윤봉길의사가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응징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하여 위대한 역사적 의거를 감행한 날이다. 이는 평화적인 외교로 독립을 추구하던 임시정부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정책으로 전환하고, 두 번째 무력투쟁의 거사를 단행한 것이다. 실패하긴 하였으나 이보다 3개월 전인 1월 8일, 이봉창의사가 동경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다. 안중근의사, 이봉창의사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갖는 의미는 거사의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한, 일가족의 운명을 내어 놓는 희생의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아가 일제의 삼엄한 상황에서 거사를 성공시켰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윤의사의 의거는 당시 침체의 길을 걷고 있던 상해 임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울러 백만 중국군이 하지 못한 쾌거로 인해 은연중 한국과 재중 한국인들에게 교만한 자세를 유지하던 중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인을 다시 보게 하였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협조하게 되는 전기를 만들어 주었다. 

1. 의거의 진실

1932년 4월 29일, 그 날은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로서 마침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상해를 점령한 기념으로 홍구공원에서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갖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일본은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참석자에게 도시락과 물을 넣는 수통을 휴대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상해를 점령하기 위한 수차례 전투에서 번번이 패배를 거듭하던 일본이 본토에서 시라가와 대장을 불러와 전장에 투입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승리의 기쁨에 도취하여 경계도 약간 느슨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길의사는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두 개의 폭탄을 감추고 입장하였다. 종종 사람들은 윤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폭탄이 도시락이었는지 수통이었는지를 왈가왈부하는 지엽말단의 우문을 반복하기도 한다. 의사가 쾌거에 사용한 폭탄은 수통 형 폭탄이었다. 그러니 수중에 남았던 폭탄은 당연히 도시락 폭탄이었다.

윤봉길의사는 마침내 일본 국가가 연주되는 시점에 행사장 단상에 있던 상해 점령군 사령관이자 행사의 주인공인 시라가와 대장에게 수통 폭탄을 던져서 폭사를 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단 한 번의 투척으로 17미터나 떨어진 단상의 중앙을 명중시켰다는 것은 윤봉길의사가 사전에 수없이 연습한 준비의 결과일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통감으로 파견되어 한국민족말살의 통치를 자행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쾌거를 잇는 역사적 의거이었다. 

2. 의거 전의 윤봉길 의사

윤봉길의사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6세 때 한문을 배웠고, 11세 때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을 정도로 넉넉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15세 때 배 용순 여사와 결혼을 하였고, 이미 약관 19세에 야학을 개설하고 농민운동에 앞장서는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23세인 1930년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결의를 품고 사나이 대장부가 집을 떠나서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의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일제의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야만 민족이 자주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일념으로 머나먼 중국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떠난 것이다.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책임감과 단란한 가정과 처자식을 두고 집안의 많은 식솔들을 돌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였다. 당시 윤의사의 고향집에는 부모님과 부인 배 용순 여사, 그리고 두 아들 종과 담이 남아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근근이 법통을 지킬 뿐,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있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침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항일운동을 채택하였다. 임시정부의 재무장(재무부장관)으로 재임하던 김구를 찾아간 윤봉길은 이봉창의사의 거사 실패를 만회하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도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천장절에 거사를 할 것을 제안하였고 그 제안에 윤봉길의사가 동의하여 이루어졌다. 

중국의 장개석 정권은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보내게 되었고 실제로 엄청난 물질적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역할을 동일시하게 만든 이 의거로 인해 다른 독립운동단체들도 김구의 역할을 인정하게 되었고 마침내 독립운동에 있어서 김구의 정치적 비중을 드높이고 사실상 김구에 의해 임시정부가 운영되는 계기가 되었다. 

3. 의거를 앞둔 의사의 소회 

거사를 하기 전 윤의사는 이틀 연속 홍구공원을 직접 답사하고 거사 하루 전인 28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세 시간이나 머물면서 거사의 방법과 투척거리 등 세밀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장병들은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무심한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 고향생각과 부모님과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만리타향 중국에서 내일이면 거사를 하고 생명을 잃게 될 윤봉길의사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로 마음이 어지러웠을까? 27일 홍구공원을 답사한 윤의사는 비장하고 착잡한 그 소회를 한편의 시로서 남겨 놓았다. 홍구공원에서 발에 밟혔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방초를 바라보고 거사의 성공을 위한 기원을 담은 의사의 심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처처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으로 맹세하세 

4. 후손들의 과제 

최근 윤봉길의사가 거사 후에 잡혀가는 사진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이미 친척들과 여러 인사들이 윤봉길의사의 사진이 틀림없다고 증언한 것을 두고 후세의 사람들이 외투와 폭행을 당한 흔적 따위의 지엽말단의 사항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학문적 공적을 중시여기는 학자들에게 맡길 일일 뿐이다. 윤봉길의사의 의거의 참 뜻을 후세에 알리고 그 애국의 충정과 자기희생의 용기를 추모하는 것만이 우리 같은 필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중에도 윤봉길의사는 단 한번도 거사를 후회하지 않았으며 당당하였다.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일본 본토인 가나자와시에 있는 9사단의 부대 안에서 사형을 당할 때에도 “사형을 각오했고 할 말은 없다”라는 단호하고 명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윤봉길의사의 기백과 민족혼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불멸의 충혼과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애국의 충정을 보여 주었다. 일본군은 윤의사에게 폭살당한 시라가와 대장이 사단장을 지냈던 9사단을 사형 집행 장소로 선택하였다. 윤봉길의사를 9사단에서 무릎을 꿇리고 사형을 집행함으로서 시라가와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랜다고 자위하였을 것이다.

 

윤의사는 임시정부의 배후도 일체 밝히지 않아서 일본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채 항간에 헛소문만 떠돌자, 이에 5월 10일 김구가 ‘홍구공원작탄진상(虹口公園炸彈眞相)’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밝혔다. 윤봉길의 목숨을 건 적극적인 의거와 함구로 입지가 분명해진 김구는 거사 당일에 석오 이동녕을 찾아가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보고하였다. 

효창공원에 모시도록 선정된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의거를 감행한 본인, 의거를 지휘한 책임자 그리고 의거를 보고받은 감독자 이 세 분은 지금 효창공원에서 함께 잠들어 있다. 

필자는 다른 국립묘지나 양재동 시민의 숲(매헌공원)에 있는 윤봉길의사 기념관 옆에 모시든지 차라리 고향에 모시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윤봉길의사의 고향은 충남 예산으로서 그 곳엔 혼을 기리는 사당인 충의사와 기념관이 있다. 그 뒤 쪽에는 배우자 배 용순 여사의 묘가 외롭게 혼자 있다. 더구나 배 용순 여사의 묘 터는 지주가 세 사람이나 되어서 불안정한 형편이다. 

한편 상해 홍구공원, 양재동 기념관, 예산의 충의사에서 의거 기념식을 각각 치르다 보니 유족들도 나뉘어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고 정부 인사나 추모단체들도 어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옳은지 당황스럽다. 순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할 때는 이봉창의사나 안중근 의사에게도 민망하다. 묘소를 함께 두고 합동으로 추모를 하지 못하고 윤봉길의사에게만 추모를 하는 것이 죄송스럽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효창공원에 가보면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김구의 묘는 효창공원의 가장 상부에 웅장하고 화려한 기념관 옆에 자리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윤봉길 의사, 이봉창의사, 백정기의사와 안중근의사(허묘)의 묘는 김구의 묘로부터 약 200미터 아래쪽에 공원묘원의 일반 묘처럼 일렬횡대로 자리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국무령과 주석을 지냈으며 김구를 도와주었던 김구의 전임이자 거사 당일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보고받은 직속 상사인 이동녕의 묘소는 다른 독립유공자인 차리석, 조성환의 묘소와 나란히 효창공원의 입구인 효창운동장 바로 앞 효창공원의 가장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 주 금요일이 마침 4월 29일로서 의거 79주년이기도 하니 따듯한 봄바람도 쐴 겸해서 한번쯤 효창공원을 찾아가 보고 필자의 소회가 괜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란다.

분당 우거에서  남효응(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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