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천개의 강에 나무를 새기는 장태묵 화가
[기고] 천개의 강에 나무를 새기는 장태묵 화가
  • 정유림<큐레이터>
  • 승인 2018.10.26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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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장 프랑수아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만종’ 작품 탄생 150주년 기념일, 동양인 최초로 밀레 박물관에 초대되어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특별전시를 했던 한국인 화가가 있다. 빛의 흐름이나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으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이끌어낸 장태묵 작가이다. 

프랑스 바르비종에 위치한 밀레박물관은 장 프랑수아밀레가 생전에 아틀리에로 사용하던 곳으로 당시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전시를 하던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의 관장인 이암파라(Hiam Farhat)는 ‘동양에 작은 나라에서 온, 이 놀라운 화가를 특별히 초대하여 작품을 소개하는데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면서 ‘장태묵의 회화는 마치 마술 같은 화면을 구사하며 작가의 영적 탐험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운 경험을 하게한다.’며 ‘간결함의 예술이며 단순함의 절정을 이루었다’라는 극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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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시골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화가는 부인에게 당당히 외쳤다고 한다. “내, 그림 그려서 니 호강 시키주께!” 그리고 용감하게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의 일 이었다. 

초반에는 입체나 반구상(추상)적인 작업을 주로 했었지만 현상을 버린 작업을 계속하다보니 한계에 달했다. 돌파구가 보이질 않았다.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작업에 대한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것일까?’ 많은 고민을 했다. 기본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생각에 사실적인 주변 풍경부터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닭을 그리기 위해 닭을 키우고, 꽃을 그리기 위해서 화단에 꽃을 심었다. 매일매일 산으로 강으로 다니며 그림만 그렸다. 식구들에게 ‘그림에 미친 사람.’ 이라는 소리도 수없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상이 답습이 아니었구나, 충분한 가치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어 그때부터 정신없이 빠져들기 시작한 작업이 지금까지 이어지게된 것이다. 
얼마 후, 화려한 작품일색이던 미국의 한 아트페어에서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무명의 작가 한 명이 그려낸 한국의 풍경화가 전시되었다. 고요한 침묵을 머금은 서정적인 그림들은 오픈 첫 날, 그것도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을 시각에 완판을 기록하면서 화가 장태묵의 그림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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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 속에서의 꽃잎은 새로 피어나는 법이 없다. 꽃은 항상 지고, 꽃잎은 눈처럼 떨어져 내린다. 눈에 보이는 지상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가장 풍요롭게 익어가는 계절을 여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은 활력으로 넘치는 생명의 계절,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은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 소멸을 상징한다. 그러나, 외면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겨울의 바다 속은 생명으로 그득하고 풍요롭다. 

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진다는 것은 꽃의 생명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꽃이 지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며 떨어져 내린 꽃잎들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상징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 속 꽃잎은 항상 떨어져 내린다. 
새로운 생명과 변화의 인연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지도 죽지도 않았다.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다. 

나무위에 피어난 꽃들이 강물 위 어디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그렇다..물은 허상이었다. 나무에 보이는 꽃들은 강물에 그 화려함을 비추지 않는다. 그러나, 물에 비친 모습은 허상이면서 동시에 내면을 나타내는 현실세계이기도 하다. 

태양은 이미 하늘 가운데 걸려있는데 강물은 고요하다. 
새들은 새들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그들의 언어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적막한 숲의 끝, 강물은 속삭이듯 흘러내린다. 바람에 떨어진 꽃잎들은 도도하고 화려하게 그러나, 유유히 강물 위를 덮는다. 강물은 무심한 듯 고요하게 빛을 따라 반짝이며 흐르고 있다. 

인간은 온전히 고독해져야만, 인생의 겨울을 겪어 내야만이 그 깊은 맛을 알게 되는 것일까? 그래야만 詩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장태묵이 그려내는 풍경들은 모두 詩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고독함마저도 고상함을 잃지 않고 평온하게 머물며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드니 이미 고독은 고독이 아니다. 내면의 성찰을 위한 수행의 일부이다.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강물을 지나는 배위에 있는 사공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누구일까,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아,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또한 철학이다. 단지 풍경화 몇 점 봤을 뿐인데 가슴깊이 자리잡아 쉽게 잊히질 않는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오로지 화가 장태묵 만이 할 수 있는 가슴에 스며드는 붓의 연주이며, 그는 연주가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천개의 강에 나무를 새기고, 또 다시 천개의 하늘에 나무를 새겨 내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침묵의 수행자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필자소개>

피카소게르니카전, 운보판화전, 일민미술관, 롯데갤러리 등에서 큐레이터로 활동.
2017년부터 미술협회 전시기획행정분과위원, 리더스포럼문화예술국장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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