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촌만필] 만주에서 만난 여성 독립운동가
[선비촌만필] 만주에서 만난 여성 독립운동가
  •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 승인 2018.10.2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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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하는 일에 남여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우리(조선)는 목숨을 내놓을 것이니 너희(중국)들은 무기를 내 놓아라.”

최초의 여성 의병지도자 윤희순(尹熙順) 의사가 만주대륙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지휘하며 포효한 말들이다.

의병에 투신한 남편 김영주가 일제와 전투중 전사하자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고 만주로 망명한 남자현(南慈賢) 의사는 만주 주재 일본대사를 암살할 무기를 운반하다 체포됐다.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면서 가진 돈 248원을 후일 독립조국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이런 여성 독립영웅들을 만주에서 만났다.

해방 후 항일독립투사들로 서훈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325명이라 한다. 그러나 유관순을 비롯한 몇몇 여성들 이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많지 않다. 가족이나 주변의 독립운동에 뒷바라지 한 여성 활동가들 정도로 기억할 뿐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은 남성에 보조적 역할로 인식되면서 주목받지 못하기도 했지만 해방이후 분단 체제, 그리고 전쟁을 치루면서 해외독립운동 사료나 인물들의 정보가 단절됐기에 50여년 동안 만주, 연해주지역의 독립운동 자료나 유적이 방치, 훼손돼 왔던 것이다. 물론 정부나 관련기관들의 무관심도 한몫했다.

두 여성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의 양반집 규수로 태어나 전통 양반가의 유교적 교양을 체화한 여성들이었다. 살림하며 자녀 양육하던 아녀자가 시부모와 남편의 독립운동을 내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기제조와 군자금 모금, 의병참여를 호소하던 여성이 급기야 만주로 망명하여 직접 항일 독립투쟁에 앞장선 담대한 여성 독립군이었다.

구한말 의병활동에 전설이 된 유인석가문으로 출가한 윤희순은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을 따라 의병에 투신, 조선 최초 여성의병이 됐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윤희순의 전 가족은 먼저 만주로 간 유인석을 따라 1911년 만주 서간도 환인현으로 망명했다.

어린 아들의 목에 칼을 겨누며 시아버지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제의 가혹한 협박에도 아들을 버릴지언정 의병장인 시아버지를 지켜낸 윤희순의 초인적 결기는 주변을 감동시켰다.

안사람 의병가, 병정가, 병정의 노래, 등을 손수지어 의병과 독립운동가의 사기를 높이는가 하면 만주 한인들의 독립정신 앙양에도 앞장선 윤희순은 만주의 독립군을 양성할 교육기관으로 노학당老學堂을 설립하고 교장이 됐다. 목숨 걸고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투쟁에 중국인들의 협조를 호소하는 60대 여성독립투사 윤희순의 처절한 명연설에 중국인들도 감복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에 남편과 자식까지 3대를 독립운동에 바친 여성의병 윤희순! 그녀의 치열했던 독립정신을 기리는 만주 환인현 노학당 유지비 앞에서 드린 묵념에 목이 메였다.

윤희순 의사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매진하던 1919년, 46세의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도 외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남자현은 경북 영양의 선비집에서 태어나 안동의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으로 시집갔다. 의병에 투신한 남편 김영주는 1895년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유복자를 기르며 시부모 봉양하던 남자현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김동삼 선생이 항일투쟁을 지휘하고 있던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서로군정서에 가입, 남자들도 하기 힘든 무장 항쟁 대열에 참여한 남자현은 1920년대 만주의 독립 운동가들이나 단체들의 분열과 파벌갈등을 안타까워하며 통합을 혈서로 호소하여 그들을 숙연케 하는가 하면 교회를 세우고 여성계몽 운동을 펼치는 등, 독립군들을 가족같이 돌보는 ‘독립군의 어머니’로 칭송되기도 했다. 국내에 잠입해 사이토 총독을 암살코자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온 남자현은 1932년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만주침략 조사단으로 보낸 힐튼에게 혈서로 쓴 ‘한국독립원’이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1933년엔 하얼빈에서 거지 행색으로 변장하여 만주국 일본대사 암살용 무기들을 품에 안고 운반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돼 혹심한 고문 후유증과 단식으로 62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여성 안중근’으로도 불린 남자현은 수중에 남은 돈 248원을 후일 독립조국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유언을 남겼다.

남자현의사가 유언으로 남긴 248원이 1946년 3.1운동 기념식장에 전달 됐다는 눈물겨운 사연을 나는 이번에야 알게 됐다. 밀정들과 마적단, 그리고 일본의 이간공작에 놀아난 만주군벌들의 온갖 핍박을 견뎌내며 풍찬 노숙한 만주의 여성 독립운동가들!

그들이 신명 바쳐 이루고자 했던 독립 조국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으며, 선열들의 폭발적인 항일 에너지와 애국심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많은 질문들이 그곳에 있었지만 나는 아직 답할 능력도 준비도 돼있지 않았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는 만주를 떠나왔다.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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