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비자금 
[이영승의 붓을 따라] 비자금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8.11.15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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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가정에서 곳간 열쇠는 어떻게 관리되고 있을까?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남편이 쥐고 아내에게 생활비를 매달 주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가 맡아 남편에게 필요한 용돈을 수시로 주는 경우이다. 어느 방법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내 경우는 아내에게 주로 맡기고 거의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나의 돈 씀씀이에 대해 아내의 간섭이 심했다면 곳간 열쇠는 지금 내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돈 관리보다 더 머리 아픈 일은 없다. 어떤 책에서 보았다. 장수 비결은 무엇보다 나이 들어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인데 가장 큰 스트레스가  돈 관리라 했다. 예를 들면 몸에 일억만 지녀도 불안하여 운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돈이란다. 그 골치 아픈 돈에 신경을 덜 쓰는 나는 분명 장수하지 않을까 싶다. 

정년퇴직을 앞둔 무렵이었다. 한 선배로부터 “퇴직 전에 반드시 비자금을 만들어 놓으라.”는 충고를 들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 같아 흘려들었다. 그런데 몇 번 듣다 보니 지나쳐 들을 얘기가 아닌 듯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비자금을 만들 수도 없지 않은가? 이일을 어찌하면 좋으랴!

비자금 한 푼 없이 퇴직을 했다. 돈을 쓸 때마다 아내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 번거롭고 구속받는 것 같았다. 백수의 자격지심일까? 왠지 미안하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비자금에 대한 선배의 역설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분위기를 봐서 아내에게 비자금을 갖고 싶다는 말을 슬쩍 꺼냈다. 아내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런데 의외로 “당신이 번 돈을 당신 맘대로 한번 써 보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느냐?”며 쾌히 동의를 했다. 얼마면 되겠느냐고  묻기에 깎자고 할지도 몰라 5천만 원이면 되겠다고 했다. 금액에 대해서는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나중에 관리가 불편하면 얘기하라고만 했다. 거짓말 같지만 결혼 후 나는 은행 문턱도 가지를 않아 예금 찾는 일도 서툴다. 아마도 그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은행에 함께 갔다. 4천만 원은 정기예금을 하고, 천만 원은 보통예금을 했다. 아내가 알고 있으니 완전한 비자금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에 얼마를 썼으며 잔액이 얼마인지도 모르니 비자금임에는 분명하지 않을까 싶었다. 비자금 아닌 비자금 통장 2개를 받아 쥐니 조금은 겸연쩍기도 했다. 

요즘은 신용카드 시대다. 소액까지도 카드를 쓰다 보니 현금 쓸 일이 별로 없었다. 1년이 지났을 무렵 내 예금통장에서는 미처 백만 원도 빠져나가지를 않았다. 다음 해에도 별 차이가 없었다. 결국 3년째 되는 해에 통장 2개를 모두 자진 반납해버렸다. 쓰지도 않는 돈을 괜히 통장에 묶어 놓고 사장시키는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면 곳간 열쇠 놓은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얼마간 세월이 흘렀다. 용돈을 일일이 달라고 하는 것이 다시금 자존심 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사 자격증이 다섯 개 있다. 그중 하나를 관련업체에 적을 두고 비상주 근무를 한다. 급여는 00만원이다. 그러니 엄격히 백수는 아닌 셈이다. 아내에게 다시 제의했다. 통장을 모두 돌려줬으니 월급은 매달 현금으로 찾아서 몽땅 달라고 했다. 비자금인 만큼 어디에 쓰는지는 일체 관심 갖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응낙 받았다. 작은 돈이라 생각했는데 웬만큼 써도 매달 잔액이 불어났다. 가끔 의미 있는 목돈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통제 받지 않는 신용카드가 있어서다.  

요즘 나는 부자인 양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가진 것이 적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집안 행사나 명절 때면 작은 돈이나마 인색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지인들과 모이면 지갑 열 기회를 살피기도 한다. 모두 비자금 덕분이다.

필자소개
​수필문학으로 등단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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