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산책]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쓰다
[달팽이 산책]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쓰다
  • 현은순 북경한국국제학교병설유치원 원감
  • 승인 2018.11.19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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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늦은 아침이다. 그녀는 간단하게 허기를 달래려고 단호박을 삶고, 푹 절인배추에 당근. 부추, 양파, 생강가루, 다진 마늘에 설탕, 올리고당 조금을 넣어 조물조물 버무린 김치를 곁들어 아침을 먹는다. 후식으로 귤을 먹으려고 꺼낸다. 귤껍질이 반들반들하다. 색깔을 선명하게 보이게 하려고 약품을 칠해 끈적거린다. 그 보기 좋은 흔적을 지우려 수세미로 박박 문지른다. 누구는 자신을 위해 덧칠하고 누구는 자신을 위해 칠한 벗겨내려고 애쓴다. 인간들이 하는 짓이란 이렇게 우스울 때도 있다. 귤은 한 입에 들어갈 만큼 작다. 적당히 새콤달콤하다. 딱 그녀가 좋아하는 맛이다. 중국의 과일은 작은 것일수록 농축액처럼 맛이 진하고 깊다. 

다시 씁쓸한 커피가 당긴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연보라색 컵에 붇고 커피 알갱이를 손바닥에 대충 털어 놓는다. 일부러 커피알갱이를 젓지 않는다. 첫모금은 잘 섞이지 않아서인지 심심하고 가볍다. 그녀는 이 커피 맛이 세상에 섞이지 못해 겉돌고 있는 자신 같다고 생각한다. 커피는 마실수록 혀를 중심으로 확연하게 두 가지 층으로 나뉜다는 느낌이 든다. 혀 위의 층은 맑고 감칠맛 나고 혀 아래 아래층은 진하고 씁쓸한 맛이 난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털어 놓은 후 와인을 마실 때처럼 혀 근육을 천천히 움직여 잘 섞어본다. 가벼운 맛은 혀 위로 올라가려하고 무거운 맛은 아래로 내려앉아 두 편으로 갈리며 서로 잘 섞이지 않는다. 요즘 그녀가 즐겨보고 있는 중국 드라마 ‘랑야방’의 권력세력가들과 같이 좀처럼 화합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모금은 온종일 우려낸 탕약보다 더 진하다. 쉽게 삼켜지지 않는다. 입 속에서 계속 굴려본다. 처음에는 뱉어버리고 싶을 만큼 정말 쓰다. 커피의 쓴 맛에 혀가 푹 절여질 때까지 입 속에 가두어 놓는다. 쓴 맛이 별로 느껴지지 않을 때쯤 그녀는 마지막 커피를 꿀꺽 삼킨다. 혀끝에서는 약간의 단맛이, 혀뿌리 언저리에서는 진한 쓴 맛이 느껴진다. 쓴 맛의 고통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커피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인생미각이 들어있다. 가끔씩 아직 사는 게 뭐지라는 의문이 들 때는 커피 한 잔을 진중하게 음미해볼 일이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머릿속에서는 어제 제출한 지원서를 생각한다. 마감 시간이 넘어서 제출한 지원서 한 장이 외국생활을 접고 귀국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는 그녀의 갈등을 아마도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그런데 지원서와 추천서, 자기소개서를 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자기 소개서를 제출하지 못한 점이 개운치 못하다.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야만 뭔가를 결정하는 그녀의 습관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그녀의 결정방식은 오늘 마신 마지막 커피맛과 닮았다.

다양체 삶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자리에 머물러 사는 정주(定住)하는 삶과 세상을 떠도는 유목(遊牧)의 삶의 방식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머물거나 혹은 떠나거나’하는 방식이다. 태어난 곳이든 자신이 정한 곳에서든 붙박이장 같이 살고 싶었으나 그렇지 않은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은 운 좋은 사람들이다. 

그녀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유랑의 생활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는 곳도 직장도 주기적으로 바꾸며 살아왔다.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하고 유랑할 때마다 도전과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50이 넘어서면서 중국에 오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녀가 추구하는 인생은 다발성 신경세포처럼 이탈하는 곡선경로로 이어진 지도 같은 삶이다. 그런데 그녀는 북경에 사는 3년 내내 지금까지 삶과는 달리 오히려 중국의 작은 섬에 갇힌 듯 갑갑한 삶을 살았다. 단지 언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북경에 있는 한국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동작 그만’ 마법에 걸려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데 급급하다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밀기를 미리 포기한 사람들 같고, 진일보를 꿈꾸게 하는 조직의 연결회로망이 폐쇄되어 버린 곳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북경이라는 도시를 떠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진일보를 거부하는 한국인들이 사는 곳에는 희망이 없다’라는 판단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북경에 사는 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하고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가진 매력은 커피 맛에 비유할 수 있다. 커피의 맛은 생산지에 따라 다르고, 같은 커피도 어떻게 로스팅 했느냐에 따라 따르다. 물론 커피 마시는 날씨와 시간도 맛에 영향을 준다. 커피를 마실 때는 늘 맛에 대한 기대로 설레는 것은 이런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모든 면에서 다채로운 맛이 살아있는 곳임이 분명하다. 그 맛을 다 안다고 하기에는 이곳에 머문 기간이 너무 짧다. 그녀가 마신 커피의 쓴 맛은 아직도 입 안에 남아 있다. 

필자소개
북경한국국제학교병설유치원 원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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