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칼럼]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난 까닭은?
[연두칼럼]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난 까닭은?
  • 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발행인
  • 승인 2018.12.31 2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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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 2.8, 3.1독립선언 잇따라...파리강화회의 위해 '임시정부'도
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대표
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대표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평등의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 자존의 바른 권리를 영원히 갖게 하노라....)

100년 전 3.1운동 때의 기미독립선언문이다. 당시 만세운동을 촉발시키기 위해 쓰여진 ‘격문(?)’이지만, 지금 우리들한테는 한자어가 많아 난해하고, 문장도 낯설다. 육당 최남선이 쓴 이 독립선언문이 당시도 좀 난해했던지, 만해 한용운이 쉽게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이 선언문에 앞서 일본과 만주에서도 독립선언문이 나왔다.

“全朝鮮靑年獨立團은 我二千萬朝鮮民族을 代表하여 正義와 自由의 勝利를 得한 世界 萬國의 前에 獨立을 期成하기를 宣言하노라. 四千三百年의 長久한 歷史를 有하는 吾族은 實로 世界最古 文明民族의 一이라...."

(전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이룬 세계 각국 앞에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한다. 4천3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는 실로 세계의 오랜 문명민족의 하나다....)

춘원 이광수가 쓴 2.8독립선언문이다. 1919년 2월8일 일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모여든 재일 유학생 400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백관수가 이 선언서를 낭독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가두행진에 나선 유학생들은 출동한 일경에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 30여명은 체포됐다. 2.8독립선언에 영향을 준 것이 앞서 2월1일 만주 지린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이다.

“我 大韓同族男妹와 曁我遍球友邦同胞아. 我 大韓은 完全한 自主獨立과 神聖한 平等福利로 我 子孫黎民에 世世相傳키 爲하야, 玆에 異族專制의 虐壓을 解脫하고.大韓民主의 自立을 宣布하노라. 我 大韓은 無始以來로 我 大韓의 韓이오..."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우리들의 평등복리를 우리 자손 민중에게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압박을 벗어나서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대한이요....)

만주와 연해주,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이던 항일독립운동가들 39명이 연서해 1919년 2월1일 만주 지린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양력으로 해가 바뀌었으나 선언서의 작성과 서명이 그 이전에 이루어져,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린다.

이 선언을 대표 집필한 조소앙은 이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유학생인 백관수, 이광수 등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도록 만들었다. 이 선언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과 함께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2.1무오독립선언과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이 연이어 나오고, 전국이 만세운동으로 이어진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파리에서 강화조약이 맺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차세계대전의 전쟁 배상 및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18일부터 파리 베르사유궁전에서 열려 6월28일 폐회했다. 27개국이 참여한 이 회의에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된 우리 선각자들도 독립을 호소할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때 파리에 파견된 대표가 김규식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도 했던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돼 여운홍 김탕 등과 함께 3월13일 파리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세우고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노력했다.

김규식을 프랑스에 파견한 우리 선각자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이 이슈가 되도록 독립선언과 시위,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것이 2월1일 만주 지린에서의 무오독립선언, 2.8일 동경에서의 유학생독립선언, 3월1일 서울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퍼진 기미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이었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다. 1919년 4월11일이었다. 이미 임시정부 대표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뒤였다. 그렇게 보면 당시 우리 독립운동 지사들이 파리강화회의에 얼마나 기대를 걸고, 빠른 행보를 보였는지 짐작할만하다.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전개한 전국적 비폭력 만세운동과 망명 임시정부 수립, 파리위원부 등을 통한 외교활동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독립단체들은 강경한 무장투쟁으로 돌아선다. 2세들을 교육하는 학교들도 대거 세웠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무오, 2.8, 3.1 독립선언 1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해외각지 한인사회도 당시 독립을 위해 애쓴 선각자들을 기리면서 그들이 남긴 ‘독립선언문’이라도 한번 강독하는 기회를 가지라고 제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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