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탐방③] 몬세라트 투어...카탈루냐의 ‘아픈’ 역사
[바르셀로나 탐방③] 몬세라트 투어...카탈루냐의 ‘아픈’ 역사
  • 바르셀로나=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1.0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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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란어는 프랑스와 비슷...분리독립 주민투표에 91.96% 찬성
산위에서 내려다본 몬세라트 수도원
산위에서 내려다본 몬세라트 수도원

‘몬세라트-시체스 투어’를 떠난 것은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기독교 축일이어서인지 이 날은 일행이 더 많았다. 박명신 ‘벤츠투어’ 대표는 이날 몬세라트로만 대형 버스 3대를 출발시킨다고 소개했다.

출발은 아침 8시였다. 버스가 바르셀로나 시내를 빠져나갈 때, 가이드를 맡은 김정화씨가 시가지를 소개했다. 몬주익 분수쇼가 열리는 광장 옆으로 붉은색 원형건물이 나타나자, 과거 투우장이던 곳을 리모델링해서 지금은 쇼핑상가와 음악 스포츠 공연장으로 사용한다고 소개했다.

리모델링때 대형 원형 투우장 건물을 통째로 위로 들어올려서 높인 공법이 화제가 된 건물이었다. 바르셀로나는 ‘동물학대’를 이유로 투우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투우장은 2010년 7월 경기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버스가 시가지를 막 벗어날 무렵, 차창 오른편으로 축구장이 나타났다. 바르셀로나FC의 캄프누 구장과는 다른 축구장이라고 했다. 바르셀로나의 축구열기는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숙적’인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 때면 ‘전투’에 버금가는 격렬한 응원이 펼쳐진다.‘분리주의’ 지역색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때면 반드시 울려퍼지는 게 ‘칸트 델 바르사’라는 응원가다. “블라우그라나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용맹스런 함성이 울려퍼진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이름, 바르사 바르사 바르사….” ‘바르사’는 축구팀의 약칭이다.

한시간쯤 달리자 경치가 순간 달라졌다. ‘몬세라트’ 고산지대로 들어왔다고 했다. ‘몬세라트’는 스페인어로 ‘톱니’라는 뜻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산 모양이 톱니바퀴처럼 뾰족뾰족 굴곡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몬세라트 산 정상의 집터 흔적. 구엘공원의 다리를 연상시킨다.
몬세라트 산 정상의 집터 흔적. 구엘공원의 다리를 연상시킨다.

몬세라토에 닿는 길에 가이드는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했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는 무슬림 지배시기도 포함해 오랫동안 독립왕국으로 번성해왔다고 한다. 언어도 프랑스어에 가까운 카탈란어로, 스페인어와 다르다. 하지만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카탈루냐가 속한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1469년 결혼을 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연합왕국을 이룬 것이다. 카탈루냐는 자치를 허용받으면서도 카스티야가 중심이 되는 ‘에스파냐’ 통일왕국의 일부분으로 바뀌어갔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찾아 항해를 떠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받아 ‘인도’로 향했다. 그래서 찾아낸 신대륙으로부터 그후 수많은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왔다. 스페인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유럽대륙에서 일어난 신구교간의 30년 전쟁이 상황을 바꾸기 시작했다. 30년 전쟁은 로마교황청과 신흥 왕국들이 유럽 패권을 둘러싸고 벌인 힘겨루기였다. 로마교황청의 통제를 벗어나려던 유럽 신흥 왕국들은 신교도를 지원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시대흐름을 잃지 못한 채 로마카톨릭을 지지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끝나면서 스페인은 프랑스의 종속국이 되는 수모도 겪었다. ‘무적함대’도 연패해 대서양의 패권을 영국에 내줬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스페인은 잠시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했으나, 이미 해외의 식민지들은 다 빼앗기거나, 넘겨준 뒤였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군부 쿠데타를 겪으며 공화정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곧 좌파의 인민전선과 우파의 국민전선 간의 내전이 일어난다. 1936년 좌파 연합의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선데 반대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몬세라트를 찾은 투어단 일행
몬세라트를 찾은 투어단 일행

당시 우파 국민전선을 이끈 프랑코 장군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독일 나치가 게르니카를 폭격해 수많은 민간인들을 살상한 것도 이때였다. 바르셀로나 출신 화가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는 이 폭격을 고발한 작품이다.

영국이 무간섭주의를 표방하고 스페인 내전을 관망할 때,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 많은 지식인들이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다. 프랑코 독재에 맞서, 좌파 인민전선을 지원해 참전한 것이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당시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1975년 프랑코 총통 사망과 함께 스페인에는 왕정이 복구된다.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카를로스 1세는 현명하게도 군주 독재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양심수들을 석방하고 입헌군주제로 나아가, 내정에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태권도를 배우고 후원한 그는 2014년 아들 펠리페 6세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지금은 상왕으로 있다.

몬세라트산의 봉우리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첨탑들을 연상시킨다.
몬세라트산의 봉우리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첨탑들을 연상시킨다.

현재 스페인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지역분리주의다. 바스크와 카탈루냐주에서는 특히 거세다. 프랑스와의 국경지역에 있는 바스크는 여타 스페인 사람들과는 민족 기원이 다르다. 언어도 인도유럽어족이 아니다. 핀란드나 헝가리처럼 동양에서 유입된 민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들은 프랑크 독재 시기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라는 무장조직을 만들어, 분리 독립을 강하게 주장해왔다.

카탈루냐로 분리독립을 원하기는 마찬가지다. 카탈루냐는 2014년 독립여부를 결정하는 주민투표에서 81%의 찬성이 나왔다. 하지만 스페인 중앙정부는 불법선거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이어 2017년 다시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이때는 91.96%가 분리독립에 찬성이었다. 카탈루냐 주정부는 그해 10월27일 독립선언을 하고,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독립을 주도한 주지사 등을 ‘반역죄’로 체포해 구금해버렸다. 이 때문에 카탈루냐는 지금도 뒤숭숭하다.

카탈루냐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는 열성 주민들이 카탈루냐주 깃발과 함께 노란리본을 창문 밖으로 내걸고, 중앙정부에 항의하고 있는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전날 방문한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루냐 주청사 건물에도 노란리본과 함께 '애국자를 석방하라'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을 정도다.<계속>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루냐 주청사 건물. 입구에 카탈루냐 깃발, 노란리본과 함께 '애국자를 석방하라'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루냐 주청사 건물. 입구에 카탈루냐 깃발, 노란리본과 함께 '애국자를 석방하라'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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