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제남 대명호에서 만난 청년 ‘건륭(乾隆)’과 하후하의 ‘슬픈 연가’
[탐방] 제남 대명호에서 만난 청년 ‘건륭(乾隆)’과 하후하의 ‘슬픈 연가’
  • 제남=홍성림 해외기자
  • 승인 2019.01.0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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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남한국인회 송년의 밤 다음날 방문… 리노베이션의 아이러니
대명호의 겨울풍경

님은 반석이오, 나는 부평초라 / 부평초는 실처럼 질기나, 반석은 움직임이 없구나(君当如磐石, 妾当如蒲草 蒲草韧如丝, 磐石无转移).

건륭황제가 남순행차 중에 제남(濟南)에 머물 때였다. 하루는 미복차림으로 대명호(大明湖)를 거닐고 있는데 어디선가 두 귀를 사로잡는 연주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호숫가의 하화청(荷花廳)이란 누각에서 젊은 여인이 홀로 대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 여인의 이름은 하우하(夏雨荷)였다. 건륭은 첫눈에 반해 수일을 함께 지내며 시와 음악,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오후, 하우하는 호숫가의 연꽃을 따다 비방의 하화차(荷花茶)를 만들어 건륭에게 건넸다. 건륭이 감기라도 걸릴까 염려한 것이었다. 사랑에 빠지고 연꽃차에 취한 건륭은 즉흥시를 지어 하우하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이에 하우하는 자신의 사랑은 질기도록 이어질 테지만, 황제는 내 곁에 묶어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부평초와 반석에 빗대어 시로 돌려주었다. 결국 하우하의 예상대로 짧은 밀월이 끝난 후, 건륭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약속대로 하우하는 건륭을 그리며 홀로 딸을 낳고 키우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대만의 인기 드라마 <황제의 딸(還珠格格)>에 등장하는 하우하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대만의 원로작가 총야오의 소설에서 재구성된 허구의 이야기지만, 영하 15도를 밑도는 추위에 대명호를 찾은 건 허구의 현장이라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시 한 수로 남은 하우하의 찬란하고 쓸쓸했을 사랑이 오랜 여운을 던졌기 때문이다.

무악묘 전경

대명호는 마침 묵고 있던 숙소에서 멀찌감치 보였다. 제남한국인회 송년의 밤을 취재하러 가서 묵었던 것이다. 걸어서도 갈만하다 싶어 차를 부르지 않고 무작정 서북방향을 향해 걸었다. 10분쯤 걷다 보니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한 큰 길 한 모퉁이에 사찰 같은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안쪽 골목을 따라서는 전통가옥을 개조한 카페거리가 길게 이어졌다. 현판도 없이 상점을 겸하고 있는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최근에 건축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이런 곳에 왜 관우사당이 있지 의아해하며 한참을 둘러보고 있는데, 귀퉁이에 무악묘(武岳廟)라 쓰여진 안내판이 보였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무악묘는 그 역사가 송대까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최근까지 명청시대의 건축물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내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무악묘는 8년전 현서항(縣西巷) 민속문화건축보호를 위한 프로젝트로 리노베이션 작업을 하면서 고고학자들의 반대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전 철거됐다가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원 건축물에서 철거한 구조물들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으나, 본래의 고풍스러운 모습은 오간데 없고, 중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방 고건축물만 남아있었다. 리노베이션의 아이러니랄까?

현서항 골목

씁쓸한 마음으로 무악묘를 나와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서울의 삼청동 뒷골목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자그마하고 고풍스런 건물에 아기자기한 카페나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간간이 문물보호단위 표식과 함께 전통민가라는 금색 현판이 붙어 있는 골목집들이 눈에 띄었다. 족히 100년은 넘었을 낡은 목재문들이 조곤조곤 제남의 골목사를 이야기하며 말을 건네는 듯 친근했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연이은 한파 때문인지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어 스산한 분위기였지만, 좋은 계절이면 젊은 친구들이 많이 찾아와 북적북적 꽤나 흥겹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연출될 것만 같았다. 꽃피는 봄날에 다시 한 번 와봐야지 하고 기약 없는 다짐을 해봤다.

백화주 내 전시구역

골목 깊숙이 들어서자 새로 정비된 전시구역들이 여러 군데 조성되어 테마별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인공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물의 고장답게 곳곳에 수로를 연결하고 배를 띄워놓아 일말의 운치를 유지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그러고 보니 카페 골목만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에서 살아남은 건가?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만다행이다.

백화주 내 전시구역 풍경

한참을 걷다보니, 젊은 청년 서너명이 대포 카메라와 삼각대를 짊어지고 바쁘게 지나쳤다. 현지사람 같지는 않고 대명호로 가는 게 아닐까 싶어 부지런히 쫓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좁은 뒷골목을 벗어나자 눈앞에 부용계(芙蓉溪)라는 작은 호수가 나타나고, 길 건너로 거대한 대명호의 남문과 끝도 없이 넓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 안내판의 지도를 보니 방금 지나온 곳이 바로 백화주(百花洲)다. 백화주는 고대에 작화교(鵲華橋)를 사이에 두고 대명호와 연결되던 마을이다. 72명천 중의 하나인 진주천(珍珠泉) 군락의 샘물이 모두 이곳 백화주 구역 내의 부용계로 모였다가, 다시 대명호로 흘러 들어간다고 한다. 그 사이를 잇는 작화교는 지금은 우여곡절 끝에 평탄화 작업을 하고 도로가 개통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원래 아치형의 웅장한 교각이었던 작화교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주변풍경이 매우 아름답고 운치가 있어 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작품에 단골소재로 등장했다고 한다.

대명호 남문 전경, 작화교가 있던 자리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대명호 입구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꽤 눈에 띄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대명호 남문을 들어서는데, 대명호의 쨍한 칼바람이 먼저 마중 나와 있다가 차갑게 반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섰는데 나도 모르게 온 몸이 움츠러든다. 오늘 대명호를 완주해서 동북문 근처에 있는 하하청까지 가봐야 하는데,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니 까마득히 멀다. 그도 그럴 것이 대명호 공원은 전체면적이 약 1,000Km² 정도이고, 호수면적이 그 중 절반쯤 차지한단다. 글로 볼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눈으로 확인하니 갑자기 눈앞이 아득하다. 처음부터 택시를 타고 북문으로 가는 건데, 밀려오는 후회를 누르며 호숫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회랑(回廊)을 걸으며 양쪽 풍경을 바라보니 이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걱정이 사라진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한여름 피서지로 안성맞춤일 듯한 정원에는 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고, 그 사이 사이에 국학강당, 산동성도서관, 태극권지도반 등 전통문화 교육기관이 고풍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군데군데 공터에는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1년 365일 무료 개방이라고 했다. 날이 좋으면 운동하기 좋아하는 중국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듯하다.

대명호공원 내 국학강당

좁은 오솔길을 벗어나 호숫가로 나오니 좁은 잔교로 이어진 누각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궁금한 마음에 누각에 올라보니 사방으로 마른 연꽃줄기로 이루어진 연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맑은 아침이슬 머금은 푸르른 연잎, 여름 장대비에 수줍게 떨고 있는 연꽃 봉오리들이 보이는 듯하다. 호수의 가장자리를 가득 메운 채 달빛 아래 고즈넉한 연꽃들의 축제가 그려진다. 그 축제의 길을 무심코 걷다보면 누구라도 절절이 사랑스러울 것 같다. 연꽃차가 아니더라도 따뜻한 손만 내밀어 잡아줘도 사랑에 빠질 것 같다. 오호 통재라! 그런데 현실은 너무 시렵다. 하우하가 되어 청년 건륭을 기다리기에 대명호의 겨울은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다.

제남은 예로부터 경내에 칠십이명천(七十二名泉)이 있어 천성(泉城)이라 불리고, 도시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 ‘용산문화(龍山文化)’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장구한 역사를 함께 하며 쉼 없이 솟아오른 명천의 물줄기들이 한 데 모여 대명호를 이루었으니, 스쳐간 사람, 스쳐간 사랑은 밤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았을 것이다. 하물며 남의 사랑을 빌어 250살 먹은 청년황제를 만나보겠다 까불대는 모습이라니. 심오한 내공으로 미동도 않는 대명호에게 내쳐지는 것이 마땅한 듯도 하다.

애초에 하화청까지 완주할 계획이었으나, 영하 15도의 날씨에 호숫가를 한 시간 넘도록 걸어 서남문에 도착하고 보니 더 이상 엄두가 나지 않있다. 따뜻한 차 한 잔에 언 몸을 녹이며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는데, 마침 종업원이 친절하게 서남문에서 수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라는 표돌천(趵突泉)으로 이어진다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여행은 아쉬움이 남아야 다시 오게 되는 법이니 옳다구나 하화청은 과감히 포기하고 표돌천으로 발길을 돌렸다.<계속>

Short cut 1: 실제로 <황제의 딸> 작품 속 하우하의 모티브가 된 소씨(蘇氏)는 건륭황제가 아직 보친왕(寶親王)이던 시절 만나 혼인한 강남의 한족여인으로, 건륭이 황제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총애를 받으며, 2남 1녀를 낳고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48세의 나이에 일찍 병사했으나 죽기 전에 궁중 여인들 중 황후 다음 서열인 순혜황귀비(纯惠皇贵妃)로 책봉되는 영광까지 누렸다고 하니 비련의 여주인공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Short cut 2: 건륭은 야사가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황제로 카사노바에 버금가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정사를 보면, 평생 첫 번째 황후였던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 부찰(富察)씨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녀가 죽은 후 50년이 넘도록 그리워하며 수 많은 애도시를 남겼다고 한다. 재밌는 건 건륭과 하우하의 이야기는 소설가 총야오가 그 애도시들 가운데 하나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남순 중 제남에 머물던 건륭은, 산동 덕주(德州)에서 효현순황후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그리는 시를 지었는데,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작화교를 모티브로 했다. 그리고 실제 효현순황후가 사망한 후 건륭은 다시는 제남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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