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46년 만에 돌아온 편지
[이영승의 붓을 따라] 46년 만에 돌아온 편지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9.01.08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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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일이다. 서울에 사는 중학교 동기 20여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동기회 모임을 발기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다보니 내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모두들 감회가 벅차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중 한 친구는 풍문으로만 소식을 듣다가 졸업 후 46년 만에 처음 만났다. 학창 시절 공부도 특출 나게 잘하여 서울대를 졸업 후 동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한글학회장도 맡고 있었다.

며칠 후 그 친구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첨부물을 열어보니 3학년 때 내가 보냈던 장문의 편지를 스캔으로 떠서 보냈다. 그 편지를 썼던 나는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긴 세월 고이 간직했다가 보낸 것이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편지 받은 기억을 했다한들 그 편지를 어찌 지금까지 보관했으며, 기억을 되살려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편지를 열어서 읽는 순간 내 가슴은 전율을 일으키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암울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집은 농사가 연속으로 흉년이 들어 가정형편이 몹시 어려웠다.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졸업하면 무조건 서울로 달아날 생각만 하며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편지를 쓰게 된 동기도 조금씩 기억이 떠올랐다. 그 친구의 진심어린 충고 한마디가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당시 우리 반 반장이었다. 나의 형편을 전혀 모르는 그는 성적이 꽤나 우수하던 내가 공부를 팽개치는 듯하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내게 조용히 다가와 “영승아, 공부 좀 해라. 요즘 왜 매일 같이 놀기만 하니?”하고 타이르듯이 충고를 했다. 그 말에 나는 설움이 북받쳐 처지를 비관하고 한탄하는 장문(4장)의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편지 내용 중에는 이광수 전집을 한차례 다 읽어 가는데 너무도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언젠가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각오도 적혀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지금 내가 등단하여 글을 쓰고 있음도 그때의 각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현되고 있음이 아닌가 싶다. 다행히 그해 나는 우여곡절 끝에 근로장학생(학교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수업료를 면제받는데 나는 온실의 화초관리를 담당했음)으로 추천을 받아 실업학교에 진학했다. 

일전 어떤 모임에 갔다가 그 친구의 편지 얘기를 하였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신문에 날만한 사건이라고 했다. 대학교수는 역시 다르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액자에 넣어 가보로 보관하라는 사람도 있었다. 

흘러간 지난 세월을 가만히 회상해본다. 어려웠던 과거는 잊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일까? 내가 편지를 쓴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그 본성 때문일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삶에 아쉬움이 남는다. 46년 만에 돌아온 편지가 이토록 진귀한 보석같이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친구의 우정 때문일까? 더 큰 이유는 아마도 까맣게 잊어버렸던 지난 내 삶의 한 조각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리라.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회원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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