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은 누구인가'...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특강
'김영옥은 누구인가'...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특강
  • 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1.1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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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대령 탄생 100주년 기념...1월26일 LA가든스위트호텔에서 열려

김영옥 대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1월10일부터 26일까지 미국 LA에서 다양한 이벤트로 열린다. 미주한인의날 116주년 축하도 겸해 미주한인재단LA(회장 이병만)이 주최한 행사다.

이 행사의 클라이막스는 1월26일 오후 5시부터 LA 코리아타운의 가든스위트호텔에서 열리는 장태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소장의 특강과 만찬이다. UC리버사이드대학 교수인 장태한 교수는 이날 ‘김영옥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그의 삶과 활약을 조명한다.

참고로 미주한인재단LA측에서 자료로 배포한 이날 장태한 교수의 특강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영옥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한 강연 초록이다.

김영옥 대령은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의 전설적인 영웅이자 인도주의자의 두 모습으로 그릴 수 있다. 김영옥 대령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는 그의 유산으로 우리 지역사회를 교육시키고 다음 세대에 영감을 주기 위한 첫 번째 이벤트다.

한국의 미주 이민의 역사는 4개의 뚜렷한 기간으로 나뉜다. 한국 이민의 각 물결의 특성은 정치, 사회경제적 배경과 한국 이민의 동기에 있어서 독특하다.

1903년 이전에 도착한 한국인 초기 이민자(1885-1902)는 한국계 미국인 사회의 선구자다. 정치 망명자들과 학생 지도자들은 미국에서의 한국독립 운동을 위해 삶을 바치고, 희생하고, 헌신했다. 기록에 따르면 1899년부터 1902년까지 165명의 인삼 상인과 3명의 여성, 2명의 자녀, 20명의 노인(45세 이상)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당시로서는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2번째 단계(1903-1924년)는 1903년 1월 13일 한국인 노동자 121명이 하와이로 입국하면서부터다. 미국 이민에 대한 첫 공식 문서가 시작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총 7,000명 이상의 이민자들이 한국에서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로의 첫 이민자는 대부분 젊은 20대였으며, 도시적이고 독신적인 남성 노동자들이었으며, 많은 비율(약 40퍼센트)이 기독교 개종자였다. 한국인 이민자 교회는 정신적인 구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독립을 논의하고 전략화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이민자의 10%는 여성이었다. 이 여성들은 사진을 우편으로 주고받은 뒤 한국 총각들의 아내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왔기 때문에 ‘사진 신부’라고 불렸다. 신랑과 신부의 평균 연령 차이는 10살에서 15살 사이였다. 약 800명에서 1,000명의 한국 신부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한국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던 핵심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국 전역의 한국인들은 집단 시위를 통해 ‘민족자결’과 일본 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하와이에 있는 소수의 한국인 이민자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이 섬을 떠나 본토로 갔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 있는 파차파 캠프는 미국 최초의 코리아타운이다.

본토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디누바, 리들리, 윌로스와 같은 캘리포니아 도시에서 농장 일꾼으로 일했다. 독립운동의 발전과 지역사회 교회 설립은 하와이 및 미국 본토에서 모두 초기 한국인 이민자 공동체의 특징이 되었다.

세 번째 물결(1950-1964)은 한국전쟁(1950-53)으로 시작된다. 한국전쟁은 한국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에서 미국인 3만3000여 명을 포함해 약 4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38선을 따라 이뤄진 한반도의 분단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남북 분단은 수천 가구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950년부터 1964년 사이에 ‘전쟁 신부’로 알려진 거의 6,000명의 한국 여성들이 미군 병사의 아내로 들어갔다. 당시 전쟁신부들은 미국이민의 40%를 차지했다. 1951년 ‘난민법’으로 고아와 난민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것이 허용됐다. 동시에 약 6,000명의 유학생들이 이 기간 동안 미국에 들어와 대학에 입학했다.

제4기는 1965년의 이민 및 국적법이 통과되면서 시작된다. 그후 한국계 미국인 사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계 미국 인구는 1970년의 69,130명에서 2000년에는 1,076,872명으로, 2010년에는 1,424,738명으로 늘어났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중산층, 도시계, 전문직 출신이기 때문에 흔히 ‘새로운 도시 이민자’로 알려져 있다.

이들 한국인 이민자들은 두가지 특징에서 다른 아시아 집단과 구별된다. 교회 중심 공동체와 기업가 정신이다. 교회는 한국계 미국인 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기관이다. 연구에 따르면 한국 이민자의 약 70%가 정기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한국계 미국인들이 미국에서 자영업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한국계 미국인 사회에서는 흔히 ‘4.29’로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은 4.29를 100년 이상의 한국계 미국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터닝 포인트', '워터업 콜', '웨이크업 콜'으로 여긴다. 한국계 미국인 정체성은 1992년 4월 29일에 태어났거나 다시 태어났다.

LA 폭동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토론과 대화를 촉발시키면서, 한국계 미국인들의 대화를 심각하게 바꾸었다. 정치적 권한 부여는 한국계 미국인 사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인 이민자들은 다문화와 다민족적 환경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통스럽게 배웠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포괄적이고 다민족적인 미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잿더미에서 재탄생한 한인사회는 더 큰 사회에 개입하는 필수적이고 기여하는 주체로서 정치적 의식과 인식을 지속적으로 구축해가고 있다.

김영옥 대령은 전쟁 영웅이자 인도주의자다. 김영옥 대령의 이야기는 한국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그리고 미국 역사의 일부분이다. 평화와 인류애를 고무한 사례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2019년 1월을 ‘김영옥 대령의 달’로 지정했다. 캘리포니아 주는 2018년 8월 5번고속도로 일부를 김영옥기념도로로 이름을 붙였다.

김영옥 대령 예비역센터는 2018년 7월 한국의 캠프 험프레이에 설립되었다. 김영옥 아카데미는 2009년 로스엔젤레스 통합 학군에 설립되었다.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대학은 2010년에 김영옥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는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최초의 유일한 주요 연구 센터다.

김영옥은 미국 군대 역사상 가장 영예로운 훈장을 받은 군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으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외에도 그는 미국으로부터 십자훈장, 은성무공훈장 2개, 동성무공훈장 2개, 퍼플하트훈장 3개를 받았다.

김영옥은 3.1운동의 해인 1919년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초기 한국인 이민자였던 부모로부터 일본이 조국의 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버지인 김순권도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 적극 헌신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젊은 육군 장교인 김 대령은 일본인으로 이뤄진 미군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가 속한 부대는 1943-1945년 유럽에서 싸웠다. 놀라운 영웅주의와 용기로 김영옥이 이끄는 전투부대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고, 미국 역사상 가장 영예로운 부대 중 하나로 평가됐다.

김영옥은 1946년에 명예롭게 제대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영옥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전쟁고아들을 돕는 인도주의적 대의를 실천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1972년 군에서 은퇴한 후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의 인도주의적 활동 범위는 광범위했다. 그는 남캘리포니아에 한국보건교육정보연구센터, 한국청소년사회센터, 한미연합, 한인기념관, 한인가족서비스센터, 일본계미국인기념관,태평양아시아가족센터 등 7개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거나 공동 설립하였다.

김영옥은 자신이 100% 미국인이자 100% 한국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깊은 공명을 남기고 있다. 그가 강조한 ‘희망과 용기’의 정신은 우리 미주한인 사회와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강력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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