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일상을 기록하는 화가 정용남
[기고] 일상을 기록하는 화가 정용남
  • 정유림<큐레이터>
  • 승인 2019.01.2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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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마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것이 생과 사. 마음이 즐거우면 웃음이요 마음이 싫다하면 화다. 어느 누구의 인생이든 그 사람의 지나온 일상 속에는 기쁨과 슬픔, 걱정, 사랑 등등 얼마나 많은 영화와 같은 이야기들이 잠자고 있겠는가. 생활하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생각되어 지나갈 수 있는 일들, 쳐다보는 이 하나 없을 것 같은 사물에 대해 화가 정용남은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상의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주로 한다.

겨울이 되어 길을 걷다보면 간혹 찬란한 여름을 지내고 그대로 미이라처럼 변해버린 마른풀을 발견할 때가 있다. 마른풀은 버려지고 생을 다한 죽음의 상징처럼 생각되지만 작가는 마른풀에게 숨결을 불어넣었다. 밤이 지나면 해가 뜨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마른 풀은 이듬해 봄, 생명으로 태어나는 새싹에게 거름이 되어 자리를 내어주기 위한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상징이다. 한 해를 열심히 살아내다 그대로 용감하게 최후를 맞이한 새로운 생명의 전령사인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이고 기록의 현장이니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작가는 그런 마른풀을 닮고 싶다고 했다. 화가 정용남의 작업들은 사물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관계이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기에 각각의 사물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와 작가의 생각을 일기처럼 덤덤히 담아내고 있다. 그는 시커멓게 변한 바나나를 좋아한다. 싱싱하게 푸릇푸릇한 바나나는 보기에는 좋지만 껍질을 벗겨내고 속을 먹어보면 설익은 경우가 많다. 겉은 싱싱해서 보기에는 좋지만 씁쓸한 맛과 함께 단맛이 덜하다. 까맣게 변해버린 바나나는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지만 그 속은 달콤하고 향도 깊다. 우리는 처음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의 현란한 말솜씨나 겉모습에 현혹되어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젊은 날 사기가 하늘을 찌를 때 어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겁 없이 일을 늘리다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겸손한 빛의 검은 바나나의 속이 달콤하다는 것을 잊고 말이다. 바나나는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되었다. 편의점 앞 모과나무에 달린 열매들을 보면서 모과가 익으면 따려고 기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수일이 지나도 모과나무의 열매들은 제대로 커지지도 둥글어 지지도 않고 전부다 찌그러진 채로 매달려 있어서 작가는 작업실로 돌아와 그리며 생각했다. 24시간을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편의점의 불빛에 모과나무는 잠도 제대로 못자고 꼬박 뜬 눈으로 세월을 보냈으니 그 열매들이 온전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모과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린 것이다.

조용한 카페에 들어서자 흘러나오는 음악이 문득 잊고 있었던 오래전 추억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을 까마득한 과거에 누군가에게 받았던 선물과 똑같은 모양의 사물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회상에 젖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의 흔적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잊혀 진다. 살다보면 잊혀 질수 밖에 없는 모든 기억의 소품들은 어떠한 사람이건 한 사람의 일생에서 그가 시간마다 살아있음을 남기는 기록이 되기도 하고 증거가 되기도 한다.

화가 정용남의 작업은 어느 누구도 의미두지 않을만한 사물들에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인생의 기록자이기도 하고 증인이 되는 관계 속에 공존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이의 추억과 함께 보는 이에게도 잠시 자신의 과거로 자연스럽게 회상하게 하여 짧은 꿈을 꾼 것 같은 시간을 가져다준다. 어느 샌가 밥그릇, 전구, 낡은 소파 이러한 사물들이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매일 먹는 밥에게도 된장찌개, 김치찌개 같은 음식들을 대하면서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그저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는 시간을 주는 작업을 하는 화가에게도 고마울 따름이다. 사물의 기록이 담아내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마음속 작은 울림을 이끌어내고 공감하게 하는 마법을 발휘하니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일이다. 같은 단어이지만 다른 사물, 같지만 다른 사랑, 똑같으면서도 다른 많은 것들은 사람 사람마다에게 다른 이야기를 담아내고 오늘도 일상의 기록 속 시간은 흘러만 간다.

햇님을 위한 노래/

햇님은 항상 나를 따라 다닌다네
슬퍼도 기뻐도 나를 따라 다닌다네
햇님은 모두를 사랑하기에
세상을 햇살로 안아주지만
그를 쳐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네
햇님은 얼마나 외로울까
슬퍼하지 말아요 햇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고 언제나 함께 숨 쉼을
감사하며 느끼고 있어요
구름과 바람과 새들과 꽃들이 말 했다네
육지에서 바라보면 바다가 아름답고
바다에서 바라보면 육지의 불빛이 아름답듯이

아, 세상 모든 것은 눈물 나도록 아름다워라!

필자소개
피카소게르니카전, 운보판화전, 일민미술관, 롯데갤러리 등에서 큐레이터로 활동.
2017년부터 미술협회 전시기획행정분과위원, 리더스포럼문화예술국장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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