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으로 만주항일독립전쟁의 신화를 이뤄낸 백야 김좌진 장군의 89주기 추모식이 1월24일 목단강 해림(海林)시에서 열렸다.
조선족 동포신문인 흑룡강신문은 이날 행사를 전하며 심양한국총영사관 임병진 총영사와 공관원들, 제 18대 한국 국회의원을 지낸 김을동 전 의원, 동북 3성 한국인 연합회 손명식 회장과 회원들, 그리고 수학여행을 온 한국학생들이 대거 참석해 백야 김좌진 장군의 정신을 기렸다고 소개했다.
김을동 전 의원은 추모사를 통해 “선열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더 열악하고 험악한 환경에서도 미래를 꿈꿨고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며, “자신의 안위를 내던지며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한줄기 서광을 봤다”고 전했다.
이어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가 김좌진 장군의 생애를 봉독하고, 1920년 12월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7차례에 걸쳐 치러진 격렬했던 전투를 상기하며, 일본군 3,3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대승리의 전투 청산리 전투를 자세히 소개했다.
김좌진 장군은 1927년 가족과 자신의 부대원 등 800여명을 이끌고 해림시로 이주해 정착했다. 사촌동생 김종진 선생과 함께 만주 교포들의 경제적 안정과 이를 토대로 한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한 후, 정미소를 경영하고 둔전양병에 힘쓰는 한편, 40여개의 학교를 설립해 동포들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설립된 신창소학교가 현재 해림시의 해림조선족실험소학교의 전신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독립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던 1930년 1월20일, 안타깝게도 자신이 만든 희망의 보금자리인 정미소에서 독립운동의 노선을 달리하던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둔다. 현재 당시의 정미소와 자택 등이 복원되어 있고 김좌진 장군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추모행사를 마친 뒤, 한중우의공원 기념관에 안치된 위안부 피해자 이수단 할머니의 묘소를 참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