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중칼럼] 고려인과의 만남··· 기회의 땅 연해주 
[김현중칼럼] 고려인과의 만남··· 기회의 땅 연해주 
  • 김현중 대전시외국인투자유치자문관
  • 승인 2019.03.0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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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 블라디보스톡에 갔을 때 현지에서 병원사업을 하고 있는 안위남 원장(중국동포)의 주선으로 고려인 어르신 몇 분을 만났다. 고려인(카레이츠, 카레이스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는 한인으로 1860년대부터 궁핍과 나라를 잃은 극한 상황에서 조선 땅을 뒤로 하고 연해주로 이주한 유민(流民)이다. 이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스스로를 카우리(kauli)라고 했다. 고려(高麗)의 중국어 발음 “까오리”와 비슷하다. 러시아의 극동 연해주는 옥저, 부여 그리고 고구려, 발해 등 옛 한민족의 터전이었다. 고려인들은 1천여 년 간 단절됐던 우리민족의 맥을 이은 것이다. 이들은 이를 잊지 않고 또 러시아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고려인”이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최 스베틀라나(82)씨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한다. “1937년 9월 카자흐스탄 랄라가스 벌판에 내던져 손으로 땅굴을 파고 원시인처럼 살았어요. 애써 벼농사 지어 놓으면 다 뺏어가 이삭 주워 연명했지요. 2005년에 연해주로 돌아왔는데 생활이 빳빳하다“. 김 알렉산드르(87)씨도 당시(6세)의 기억이 생생하다며 이야기한다. “우리가족 8명은 연해주에서 6천키로 떨어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된 후 한 달간은 들판의 갈대를 꺾어 거처를 만들어 살았다. 그 때 동생이 병으로 사망했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조 하리똔(85)은 “일곱 살 때 우즈베키스탄의 타시겐트주로 강제이주 돼 1년 후 아버지가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 확인 통지는 2002년에나 받았다. “고려인은 국영농장에서도 안 받아주었고 군대에서도 뽑아주지 않았었다”며 긴 한 숨을 짓는다. 

고려인의 강제이주는 1933년 일본의 만주국 수립과 1937년 중일전쟁 등 팽창한 일본 군국주의로 인한 일-소관계의 악화에서 기인한다. 소련은 1937년 8월21일 원동(遠東)지방에서 일본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구실로 17만 명을 강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제에 맞서 싸워온 고려인을 오히려 일제의 앞잡이로 본 것이다. 첫 열차는 1937년 9월9일 블라디보스톡에서 50량을 달고 출발했다. 고려인들은 피땀으로 일군 삶터에서 내쫓겼다. 어린아이, 노인 그리고 중환자, 임산부 구분 없었다. 처음에는 사유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가져갈 수 있다고 명령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최소한의 식량과 옷가지만 가지고 갔다. 1937년 그해는 연해주의 농사가 풍년이어 더 가슴 아팠다고 한다. 노인들은 조상의 산소에 가서 마지막으로 절하고 흙을 한줌씩 가져갔다. 또 소유하고 있던 가구와 부동산 그리고 농작물에 대한 보상도 없었다. 고려인들은 볍씨를 베개에 숨겨가지고 가서 카자흐스탄에서 중앙아시아 최초로 벼 재배를 시작했다.

고려인 강제이주는 미리 준비된 것이었다. 이미 1920년~1930년대 초에 고려인 3천명을 오지로 쫒아내며 ‘실험’을 했고, 저항을 막기 위하여 관리직, 언론인, 의사 등 2,500명 이상의 지식층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소련은 고려인 강제이주 이전에 폴란드, 독일, 이란인 등도 강제이주 시켰으나 10만 명 단위의 총체적인 민족이주는 고려인이 처음이었다. 

강제이주는 연해주 이외 북사할린, 콤소몰스크, 부라트공화국 등에 거주하는 고려인까지 모두 색출하여 이송됐다. 이중에는 홍범도 등 애국투사들도 많았다. 강제이주는 2-3일전에 겨우 통지 받고 가축을 싣는 녹슨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태워져 이뤄졌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깜깜한 한 달간의 ‘검은 상자’안은 지옥살이였다. 고려인들은 유리창 없이 널빤지로 막은 문만 있는 열차 칸을 ‘검은 상자’라고 불렸다. 그 해 12월까지 총 3만6,442가구, 17만1,781명을 카자흐공화국(9만5,256명)과 우즈베크공화국에 실어 날랐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와 열차 전복 사고, 굶주림, 질병 등으로 2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해주는 간도의 용정과 함께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포시에트,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등은 만주에 비해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덜해 이상설, 이범진, 이동영, 최재형, 홍범도, 안중근 등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은 ‘기억되지 독립운동사”로 고려인들의 항일투쟁이다. 다행이 3.1운동 100주년을 기해 서서히 비춰지고 있다. 현재 연해주에는 약 3만 여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김 니콜라이(고려인협회 회장)같이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음식업 등 여행객 대상의 자영업을 하러 오는 한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앞서 만난 최 스베틀라나씨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 몇 년 전 한국인에게 2천달러를 사기 당했다. 어떻게 받게 해 줄 수 없느냐?”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수리스크는 발해(698~926)의 솔빈부 터이다. 안 원장은 밭 갈다가 나왔다는 옹기 그릇 조각 하나를 구해주었다. 이 부근 미하일로프카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고려인 정착촌 ‘우정마을’(30가구)이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고려인들을 위해 1999년 대한주택건설협회 지원으로 조성됐다. 마을에 한국어와 장고 등을 가르치는 한국어학당도 보였다. 또 멀지 않은 곳에 ‘고향마을’이 있다. 최 니끼따(67)는 말한다. “모국의 지자체와 단체의 지원으로 농산물을 가공하고 있다. 값이 싼 콩(kg당 500원)으로 두부, 청국장, 떡, 콩기름을 만들고 있다. 그 중 콩기름은 한국으로 보내고 있다. 고려인사회의 고령화로 일꾼이 없어 요즘은 중국인들이 들어와 농사를 짓고 있다.” 이 역시 안타까운 현실이다. 안 원장은 말한다. “몇 년부터 중국인과 우즈베크인들이 와서 빈 공장을 임대하여 생필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조선족동포들도 한 때 수천 명에 달했으나 사업부진과 까다로운 비자 정책으로 지금은 수백여 명으로 줄었다.”

필자가 한 달 사이 연거푸 두 번째 연해주를 방문하며 느낀 점이 있다. 불과 2시간대의 가까운 곳에 광활한 토지와 자원 그리고 고려인이 있다. 또 중국동포도 있다. 최근 들어 한인들의 진출도 늘고 있다. 옛 고구려, 발해의 후예들이 다시 네트워킹하며 한민족의 기개를 떨쳐나가고 있는 현장이었다. 얼마 전 고려인들의 출입국 제도를 개선할 것이라는 기쁜 뉴스를 접했다. 국내로 영주 귀국한 4만5천여 고려인들은 안산, 광주, 제천 등지에 살고 있다. 고려인들의 고난과 슬픔의 역사를 제대로 더 발굴하여 널리 알리자. 그리고 후세들의 정체성 유지를 위하여 우리말과 문화. 역사 등 교육과 차세대 네트워크 육성에 민과 관이 손을 잡고 힘써 나가자. 옛 고구려와 발해의 땅,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연해주는 기회의 땅이다. 180개 국가의 743만 동포와 같이 잘 들여다 볼 곳이다.
 
필자소개
대전시외국인투자유치자문관
(전)건양대학교 국제교육원장
(전)도쿄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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