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165] 탑골공원
[아! 대한민국-165] 탑골공원
  • 김정남 본지 고문
  • 승인 2019.03.30 0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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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1919년 3월1일, 정오를 알리는 오포소리가 울리자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를 신호로 아침부터 모여 있던 4-5천명의 학생들이 모자를 공중에 던지고,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일제히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으니, 이로써 3.1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선언을 끝내고 공원을 나설 때에는 수만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시위대열이 대한문(大漢門)앞에 이를 때에는 온 서울 시내가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물끓듯했다. 지금은 갈 곳 없는 노인들만이 모여 하루를 보내는 휴식처 비슷하게 되었지만 3.1운동의 시발점이자 발원지였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탑골공원이었다.

“기미년 3월1일 정오/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로 시작되는 3.1절 노래가 말하는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가 터진 곳이 바로 탑골공원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그 원천이었으며,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의 길을 여는 단초가 된 독립운동이자 민주혁명운동이었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에 의하면 3.1만세운동과 관련해서 전국에 7,5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탑골공원의 역사는 길다. 1465년 세조 때,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고찰 흥복사(興福寺)를 증축하여 원각사라는 새 절을 지었다. 이때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원각사 10층 석탑은 한양도성 안에서는 가장 높은 마천루였고 그 흰 모습이 두드러지게 보여 백탑(白塔)이라 불렸고 여기서 탑골이라는 별칭이 생겨났다. 연산군 때인 1504년에는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이 옮겨져 왔고 뒤이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을 만들더니,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사찰을 헐고 거기에 백탑만 남겨두기에 이르렀다.

이후 한때 영·정조 연간 실학자 박지원,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이 이 탑 주변에 이웃해 살면서 백탑파(白塔派)라는 그룹을 형성, 18세기 문예부흥을 이끌었다. 이들은 백합청연집(白塔靑緣集)이라는 동인지 성격의 책을 내기까지 했다.

그 뒤 이러한 분위기가 갑자기 퇴조하면서, 탑만 덩그라니 남아있더니 1897년 고종이 공원을 조성, 팔각정을 세우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인 1902년에는 고종황제가 창설한 군악대가 팔각정 옆의 무대에서 공연을 펼쳤는데, 이는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첫 양악음악회였다. 이처럼 탑공공원의 조성은 고종황제의 근대화 프로젝트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1910년의 한일합방 후, 총독부가 공원 안에 탑다원을 만들어 생맥주를 팔기 시작, 고종의 흔적을 지웠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이 국민성금을 거두어 3.1운동기념탑, 3.1문 등을 세웠으나, 기념탑은 1979년 전두환 군부에 의해, 3.1문 현판은 2001년에 철거되면서, 공원은 역사적 의미가 퇴색한 노인들의 휴식처로 전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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