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단] 두보초당(杜甫草堂)
[시문단] 두보초당(杜甫草堂)
  • 김은주(사천외대 성도캠퍼스 한국어과 교수)
  • 승인 2019.04.2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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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는 눈이 녹아 비(雨)가 되고 얼음이 녹아 물(水)이 되는 절기. 우수(雨水)다. 바야흐로 지표면의 식물들이 물을 당겨 올리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농사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우수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지난 2009년 허진호 감독이 만든 ‘호우시절(好雨時節)’이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가 적당할 것 같다. 영화에서는 사랑의 비가 적당한 시점에 내려 사랑을 더욱 성숙하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이 영화의 제목은 중국 성당(盛唐)시대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에서 따왔다. ‘봄밤에 내리는 기쁜 비)’다.

好雨知時節(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봄이 되니 내리네)
隨風潛入夜(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潤物細無聲(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

이 시는 두보가 50세 쯤에 쓰촨성 청두에 두보초당(杜甫草堂)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일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전원생활을 할 때 지었다. 이 시를 지은 날은 우수(雨水) 전후였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한다.

두보(杜甫)는 하급관리직으로 잠시 관직에 머물기도 했지만 거의 평생을 실의와 좌절 속에서 방랑생활을 하며 궁핍하게 지냈다. 하남성(河南省) 양양(襄陽)에서 출생한 두보가 성도(成都)에서 생활한 것은 759년에서 763년, 그의 나이 49세에서 51세까지 3년 가량이다. 

참혹한 안록산의 난을 겪고 난 후 중원에 대기근이 들자 관직을 버리고 방랑하는 신세가 된 두보는 이곳 사천지방까지 흘러들어와 성도 서쪽교외 완화계(浣花溪)의 초당사(草堂寺)에 묵었다. 이듬해 760년 마침 이 지방의 절도사로 있는 옛친구의 도움으로 초당사에서 조금 떨어진 완화계 서쪽에 초당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이 완화초당이 바로 지금의 두보초당이다.

초당(草堂)은 뜻 그대로 우거진 풀로 덮여 있는 곳이다. 대나무가 많아 걷다보면 시상이 저절로 떠오를 만하다. 냉혹하고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울분을 토로하던 그도 전란과 기근을 벗어나 여기에서 비교적 평화롭고 안온한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이 시기에 두보는 약 240여 수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아래 소개하는 시 ‘강촌(江村)’은 당시의 한가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江村(강촌)
淸江一曲抱村流(완화계 맑은 물은 마을을 휘감아 구비구비 흐르고)
長夏江村事事幽(긴긴 여름날 마을은 한가롭고 그윽하다)
自去自來梁上燕(제비는 처마밑을 제멋대로 드나들고)
 相親相近水中鷗(물위의 비둘기들은 무리지어 떠다닌다)
老妻畵紙爲碁局(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어린 아이는 바늘을 두들겨 낚시를 만들고 있다)
多病所須惟藥物(그저 약이나 좀 먹었으면 할뿐)
微軀比外更何求(미천한 몸이 달리 바라는 바 없다)

그후 사천성 일대를 약 3년 정도 떠돌던 두보는 병든 몸을 이끌고, 768년 정월 중순경 또다시 배를 타고 장강 삼협(三峽)을 내려가 강릉(江陵) 쪽으로 갔다. 그러나 강릉에 와보니 남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어렵고 생활이 궁핍해져서 늦가을 다시 배를 타고 악주(岳州)로 내려갔다. ‘등악양루(登岳陽樓)’는 그해 겨울 두보 57세(768년) 때 지은 시다. 이 시는 웅대하면서도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외로운 신세를 잘 표현한 시로 평가받고 있다. 

登岳陽樓(등악양루)
昔聞洞庭水(옛날에 동정호의 절경을 말로만 듣다가) 
今上岳陽樓(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吳楚東南坼(오나라와 초나라가 동남으로 갈라졌고), 
乾坤日夜浮(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떠있네) 
親朋無一字(친한 벗이 한자 글월도 없으니) 
老去有孤舟(늙고 병든 몸에 외로운 배한척 뿐이로다). 
戎馬關山北(전쟁은 관산 북쪽에서 아직도 일고 있으니) 
憑軒涕泗流(난간에 기대어 눈물만 흘리노라) 

이 시를 짓기 1년전 두보는 개인적으로 폐병과 학질, 당뇨병 등으로 시달렸으며 국가적으로는토번의 침략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래서 두보는 우국(憂國)과 병든 몸과 돌아갈 고향도 없는 처지에 나라마저 위태롭게 되자 저절로 서글퍼졌던 것이다. 

이후 두보 일가는 동정호를 떠돌아 다녔고 다시 담주(潭州)로 가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해 4월 담주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난을 피해 상강(湘江)을 거슬러 올라가 침주에있는 외숙부 최위를 찾아가는 도중에 뇌양(지금의호남성)에서 홍수를 만났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지 못해 죽을 지경에 처하였다. 뇌양의 섭현령이 이 소식을 듣고 편지와 음식을 보내주자 두보는 감격해서 감사의 시를 지어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병이 회복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에 걸쳐 상강을 떠돌아다닌 그는 770년 겨울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배안에서 59세의 일생을 마쳤다. 시성(詩聖)은 그렇게 잠들었다. 


좋은 시를 짓고자 하면, 만권의 책을 읽어야 하고(讀萬卷書), 만리 길을 떠돌아 다니면서(行萬里路) 온갖 풍상을 다겪어야 된다는 말이 있다. 두보의 일생을 보면 당대의 유명한 인사를 만나고 온갖 역경을 맛보아 인생 경험이 풍부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삶의 굴곡이 배어 사실적이고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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