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탐방] 중국 하북성 차취촌의 유리묘
[문화탐방] 중국 하북성 차취촌의 유리묘
  • 싱탕현 차취촌=홍성림 해외기자
  • 승인 2019.05.0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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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묘 전경. 차취촌 어르신들의 쉼터 같은 곳이다.
유리묘 전경. 차취촌 어르신들의 쉼터 같은 곳이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翩翩黃鳥 雌雄相依)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고(念我之獨 誰其與歸)

학창시절 강제로 암송해야 했던 수 백 수(首)의 시가들 가운데 지금까지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나는 작품 중 하나다. 기원이 막 시작될 즈음에 사랑을 다투다 홧김에 떠나간 계비 치희(雉姬)를 그리워하며 고구려 제2대 유리왕(琉璃王)이 지었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가 <황조가>다. 사랑이니 외로움이니 하는 감정들이 그저 어렴풋했던 꼬맹이 시절이니 감정이입은 아니었을 테고, ‘펄펄’로 시작되는 첫 구절의 이미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더 꼬맹이였던 시절 앞뒤 맥락 없이 동화로 만난 ‘펄펄 날아다니던 불굴의 꼬마유리가 남긴 시라니...’ 하면서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유리왕은 부여에서 유복자로 태어났고, 사냥을 좋아하던 장난꾸러기기 소년에서 어느 날 ‘애비 없는 자식’ 소리에 충격을 받아 어머니 예씨부인을 졸라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길로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가 증표로 남긴 ‘일곱 모가 난 바위 위의 소나무 밑에 숨겨놓은 칼 반쪽’을 찾아 고구려로 건너가 태자가 되며, 이미 재혼한 동명성왕이 소서노와의 사이에서 낳은 비류와 온조, 두 왕자를 몰아내고 고구려의 왕이 됐다는 전설이자 역사적 인물이다.

유리묘, 관음보살이 28명의 난민을 구제한다는 불교전설이 담긴 생동적인 형상의 유리부조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유리묘, 관음보살이 28명의 난민을 구제한다는 불교전설이 담긴 생동적인 형상의 유리부조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학창시절 이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유리왕이 어느 날 다시 내게로 찾아왔다. 얼마 전, 오랫동안 혼자 고대사 연구를 해온 답사동무께서 중국 내의 ‘유리(琉璃)’라는 명칭을 가진 장소들에 대해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것이 신호탄이 됐다. 공부가 깊지 않아 선명한 반박을 할 수도 없고, 그저 막연히 내가 알던 고구려 역사를 무슨 연유인지 신화로 둔갑시키거나 현재의 한반도에 국한시키려는 행위에 대한 분노만 키우던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내가 비록 느려터지겠지만 하나하나 퍼즐을 완성해 언젠가는 속 시원히 대갈을 한 번 터트리리라 다짐했다.

초보자의 어이없는 다짐에는 꼭 그에 걸 맞는 어리바리 행운이 따르게 마련인 것인가! 인문시조라 불리는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의 탄신일인 음력 3월18일에 맞춰 매년 거행되는 신러시(新樂市) 복희제전은 답사팀에서 작년부터 얘기가 나오던 답사지였다. 당연히 출반 전 여러 차례의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네비게이션 위치입력까지 순조롭게 끝냈는데, 중간에 고속도로 휴계실에 들렀다 출발하면서 도착지 설정을 잘못한 줄도 모르고 ‘아니 이렇게 외지고 한적한 시골에?’, ‘아무리 그래도 복희대인데?’, ‘와! 그래도 이건 너무 아니다’ 하면서 도착하고 보니 눈앞에 ‘유리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게 웬 떡!

행정구역상 이곳은 허베이성(河北省) 싱탕현(行唐县) 차취촌(村)이란다. 마을이름이 매우 독특하고 재미있다. 한자는 모두 갱(更)을 부수로 하고 있는데, 옛 문헌 중에서 글자에 대한 해석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곳이 강희자전(康熙字典)이다. 그런데 그 해석이 특이하게도 달랑 ‘마을이름, 악촌(恶村)’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로부터 ‘동서남북 사방이 강과 웅덩이들로 둘러싸여 풍경이 수려하지만 민풍이 사납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어 관부나 관리들조차 두려워 접근을 꺼리는 마을이었다고 하니 관리들에게는 어지간히도 골치 아픈 마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관부에서 인력동원을 위해 장정을 차출할 때면 마을사람들이 떼거지로 들고 일어나 저항하는 것이 두려워 오밤중에 몰래 숨어들어 보쌈하듯 장정들을 잡아갔다고 한다. 후에 누군가가 이런 상황을 ‘이경취차(二更取差)’, 즉 ‘오밤중에 장정들을 잡아간다’는 말로 풍자해 마을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유리묘 앞 사거리 전봇대에 적혀있는 ‘나무아미타불’, 마을 여기저기에 낙서처럼 쓰였다.
유리묘 앞 사거리 전봇대에 적혀있는 ‘나무아미타불’, 마을 여기저기에 낙서처럼 쓰였다.

유리묘는 온통 황토색으로 뒤덮인 흔한 허베이의 건조한 시골마을 중앙에 약간은 생경할 수 있는 화려한 색채의 작은 고건축물이었다. 그 앞에 마치 낯익은 사진에서처럼 마을과 닮은 표정의 시골 할아버지 서넛이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한담을 나누다가 낯선 이방인들이 신기한지 힐끔거리며 가늠을 하신다. 동네이름 덕분에 살짝 긴장하기는 했으나 늘 그렇듯이 씩씩하게 다가가 평생을 그 마을에 살았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굴며 말을 건넸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지방 사투리가 특히 심해 말씀하시는 걸 2할 정도만 알아들어도 매우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알은체를 하며 똑 같은 질문을 재차삼차, 또 묻고, 다시 묻고 해야 겨우 대략적인 줄거리가 잡히는데, 이번에는 강적을 만났다. 무조건 모르쇠다. 언제 지어진 건지 건축연도를 묻는 질문에 잘 모르겠고 벽면에 써 있다며 자세히 살펴보라신다.

자료를 찾아보니 싱탕현의 유리묘는 중국 경내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고대 유리묘다. 정면 벽면 가운데 <친견여래(亲见如来)>라 쓰여진 액자형 부조 한 켠에 <명천계삼년오월십일(明天啟三年五月十一)>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명나라 천계 3년이면 1623년에 지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벽에 쓰인 정보 외에 남아있는 비석이나 관련 기록이 전무해 누가 지었는지 왜 지었는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유리묘 정면에 보이는 ‘친견여래’, 왼쪽에 세로쓰기로 ‘명 천계3년 5월 11’이라고 적혀있다.
유리묘 정면에 보이는 ‘친견여래’, 왼쪽에 세로쓰기로 ‘명 천계3년 5월 11’이라고 적혀있다.

건축물은 홑마루합각지붕에 벽면에 유리(琉璃)장식이 되어있다. 높이 7미터, 폭과 너비가 각각 1칸씩, 총 면적이 34.17평방미터라고 한다. 동쪽 벽면에는 관음보살이 28명의 난민을 구제한다는 불교전설이 담긴 생동적인 형상의 유리부조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리묘 내부는 사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운룡희주도(云龙戏珠图)>가 조각된 24 조각의 목조천정이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대외개방을 하지 않아 내부참관은 할 수 없었다. 못 보게 하니 궁금증이 더 일었지만 사방을 쇠창살로 꽁꽁 둘러놓고 커다란 자물쇠까지 채워 놓았으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다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본 유리묘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다. 일반적으로 기둥이 외벽 밖으로 드러나는 사당의 모습과는 달리 벽체가 기둥을 숨기며 두툼하게 담처럼 둘러 있는 것이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이 타던 가마의 윗부분을 떼어다 부풀려 옮겨놓은 것만 같다. 이런 부자연스러움은 그나마 한때 건축학도였다고 나만 느껴지는 것인가?

중국 민간에서는 유리묘가 호국장군(护国将军) ‘한문몽(韩文梦)’에 의해 지어졌다는 설이 대세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던 한문몽이 천하를 떠돌며 홍길동처럼 불쌍한 백성들을 돕다가 35세 되던 해에 허난(河南)지역에서 관병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쫓겨 도망치다 사방이 탁 트인 강가에 도착해 위급한 상황을 맞았는데, 눈앞에 홀연히 관음묘가 나타났고 “대자대비하신 관세음이여, 나를 구하소서!”하고 기도하자 갑자기 먼지구름이 일며 거미줄이 은폐막을 만들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한문몽이 후에 고향인 차취촌으로 돌아와 명대 천계 3년에 똑 같은 모양의 유리묘를 짓고 공양을 하였다고 한다. 선량한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져 인근 동네에 영험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급기야 청나라 강희 36년에 강희제가 남행길에 이곳에 들러 참배를 하고, 그 후에 돌아가서 강희자전에 등재하니,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 인접한 3개 성(省) 28개 현(县)에서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양씨종사 전면, 송나라 때 장수 양연소의 사당.
양씨종사 전면, 송나라 때 장수 양연소의 사당.

좁은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한 유리묘와 담을 끼고 이웃한 검은 기와에 회색 돌벽돌로 지은 전형적인 중국의 고건축물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다. 문루에 ‘양씨종사(杨氏宗祠)’라는 낡아서 글씨마저 흐릿한 현판이 걸려있다. 마을 할아버지에게 거의 판독 수준으로 어렵게 탐문한 바에 따르면 ‘양육랑(杨六郎)의 사당’이라고 한다. 북송(北宋) 시기의 명장 양업(杨业)의 장자였던 양연소(杨延昭)를 가리키는 것이다.

양연소는 양육랑이라는 별호 때문에 중국인들이 즐겨보는 소설과 드라마인 <양가장(杨家将)>에서 여섯 번째 아들로 등장해 활약하는데,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맏이이다. 당시 호시탐탐 송나라를 노리며 전쟁을 일으키던 거란은 북두칠성 중 여섯 번째 별이 유연(幽燕)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별로 상극이라 여겼는데, 용맹한 양연소를 천계의 여섯번째 별자리(六郎星宿)가 인간계로 내려온 인물이라 믿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양육랑이라는 별호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양씨종가 대문.
양씨종가 대문.

 

‘양씨종사’는 명대에 처음 지어졌다가, 청광서(光绪) 21년에 다시 중건했다고 한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남사(南祠)와 북사(北祠)를 세웠는데, 유리묘 옆에 지어진 것은 남사로, 문루(门楼)와 정청(正厅) 하나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조다. 유리묘와 마찬가지로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구경할 수 없어 아쉬웠다.

양씨종사를 마주보고 넓지 않은 공터에 아담한 육각정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나란히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혹시 유리묘나 양씨종사와 관련된 내용이 쓰여 있을까 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항일유적비였다. 1945년 항일전투 중에 희생된 열사들을 기념하는 열사비가 동네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항일열사비를 만나게 되다니 운명인가 싶기도 하다.

1945년 항일전생에서 순국한 마을사람들의 열사기념비.
1945년 항일전생에서 순국한 마을사람들의 열사기념비.

원래 목적지인 신러시 복희대까지 가야할 길이 멀어 서둘러 떠나느라 기본적인 탐문 외에 마을 촌장이나 최고령자를 찾아 전설 따라 삼천리를 풀어낼 시간이 없어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에 사방으로 펼쳐진 푸른 벌판과 밀밭 사이 군데군데 모여 있는 평지무덤들을 바라보았다. 청명 지난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울긋불긋한 종이꽃과 화환들이 아직은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 가끔 봉분 위에 꽂힌 어린 묘목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실천하는 가장 자연친화적인 매장법이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밀밭 중간의 무덤군, 청명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이꽃과 화환들이 그대로 있다.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밀밭 중간의 무덤군, 청명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이꽃과 화환들이 그대로 있다.

흔들리는 시골길을 달리며 방금 떠나온 차취촌을 다시 떠올려본다. 한때 인근에 사당이 18개나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만큼 번성하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져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유리묘의 전설도 함께 묻혀 지금은 간혹 길 잃은 이방인들 외에는 찾아주는 발길조차 흔하지 않은 그저 조용하고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물극필반(物极必反)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오랫동안 움츠렸던 차취촌이 언제쯤 무엇을 계기로 다시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르게 될까? 내가 기대하던 늠름한 유리왕의 흔적을 찾을 길 없음에 안타깝지만, 유리묘의 마을이 고구려 장수의 기상을 닮은 차취의 용맹한 정신을 되살려 새롭게 도약하는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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