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나의 둥지, 대한민국이여 
[Essay Garden] 나의 둥지, 대한민국이여 
  • 최미자 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9.05.06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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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잠시 운전하며 지나가는 고속도로가 퍽 즐겁다. 드문드문 핀 야생화랑 온통 초록이다. 수년 만에 내린 비로 흠뻑 젖은 산언덕은 그림 속의 스위스처럼 착각된다. 도심동네인데도 뜰이 넓은 것에 반하여 우린 이 집에 이사 왔다. 우리 가족이 이민 오고 두 해가 지나자 친정어머니는 고혈압으로 남편은 암수술로, 이듬해엔 집안 연통에 불이 나서 피를 말리던 연이은 삼 년이었다. 이민초기라, 때론 삶의 목표가 달라 부부 사이 말다툼도 잦았기에 우울증마저 나에게 찾아왔었다. 이렇게 살려고 그이가 갑자기 이민가자고 했는가 하는 원망도 일어났다.

게다가 파트타임으로 내가 보조 교사 일을 하던 어느 대낮에는 창문을 깨고 도둑놈이 들어 와 쑥 밭을 만들어 놓고 갔다. 돈 몇 푼 벌려고 뛰어다니던 당시의 내 인생이 참 허무했다. 미국에서 교사의 꿈을 꾸며 일한 4년 끝에 나는 직장 일을 접었다. 영어서류와 잡다한 일들을 누군가 도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반신불수가 된 친정어머니를 돌보고, 남편 도시락 두 개 잘 싸주는 공양주 보살이나 되자. 무엇보다 당시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 농사일이 중요하다며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너른 집 뒷마당으로 바람난 여자처럼 나는 뛰쳐나갔다. 내 연약한 팔을 걷어 부친지도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늘 하늘은 푸르고 어느 분의 말처럼 달콤한 맛이 나는 공기와 일 년 내내 꽃이 피어나는 샌디에이고는 정말 극락이었다. 그런데 추위가 완전히 떠나지 않던 두어 달 전 기이한 일이 있었다. 내 방의 창문을 계속 요란하게 노크하는 소리에 가보니 새 두 마리가 주범이었다. 잠시 돌아보니 올해는 집 페인트를 할까 했기에 처마 밑의 새집을 제거했었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다시 처마 안쪽에 두꺼운 종이로 새집을 만들어 주었다. 신기하게도 녀석들이 더 이상 내 방 창문을 시끄럽게 두드리지 않았다.

샌디에이고로 이민 와 살며 기분 좋은 일중의 또 하나는 봄이면 주변에 쏟아지는 휘파람소리였다. 그럴 때면 내 어린 시절 휘파람으로 노래를 곧잘 부르시던 친정아버지처럼 나는 신이 났다. 그토록 상쾌한 아침을 알려주는 선명한 휘파람 소리는 늦잠으로 뭉그적거리던 내가 이불을 박차고 나오게 하곤 했다. 나는 소리의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는지 뜰로 나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숨바꼭질 끝에 참새보다는 조금 날씬하고 머리와 가슴 털은 불그스레한 녀석을 만났다. 당시 이웃들에게 새의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엉터리 이름만 대답했다. 나는 책방에서 새 그림책을 사서 요리저리 공부하다 새의 이름을 알아냈다. 원래 미국 남서쪽에 사는데 지금은 동쪽과 서부 해안 전역까지 퍼졌으며 명랑한 피리소리로 흥겨움을 주는 ‘하우스핀치’ 라는 새였다.

사실 남편과 나는 이 십 여 년 전부터 좀 귀찮은 일이지만, 고양이에게 잡혀 가지 않도록 양쪽 처마 안쪽에 장소를 골라 받침을 만들며 늘 환영했다. 내가 살아오며 우리 집 뜰은 벌레 약도 치지 않았으니 꽃들과 유기농 채소의 자연 씨앗들은 모두 새들의 먹이 이다. 만약 암놈이 잠시 외출을 나가면 둥지 속의 알이 몇 개인지 우린 세어보았다. 다섯 개이면 종이 받침대를 더 큰 것으로 넣어 주어야했다. 새 둥지가 작아 한 마리가 떨어진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떨어진 어린 새를 주어 밤이면 집안에 넣고 낮엔 엄마가 먹이를 물어다 주도록 소쿠리를 내놓으며 길러서 날려 보낸 적도 종종 있었다. 지난해는 오락가락하는 이상기온으로 새끼들이 추워서 얼어 죽었다. 아마 그동안 우리 집 둥지에서만 200여 마리쯤 날아갔을까. 

한 쌍의 새가 정원의 잔가지를 주어 와 사이좋게 얼기설기 집을 짓는 걸 보면서 불현 듯 불안정한 나의 모국이 뇌리를 스친다. 텔레비전을 통해보면 내가 가난하게 고생하며 살았던 모국이 이젠 아니었다. 아니 너무나 사치스럽게 먹으며 살고 있다. 누구 덕에 이 나라가 이리도 잘 살게 되었는가. 애국자 선조 어른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만들어진 헌법아래 개인들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발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처럼 정치체제가 무서우면 어떻게 재능을 발휘할 수가 있단 말인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참혹하게 폐허가 된 땅을 70년 넘도록 훌륭한 지도자와 각 분야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눈부시게 발전되었다. 

지금도 나의 이웃들은 일본은 안전한 나라여서 여행 간다하지만, 우리나라는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정치도 불안정하니 각국에서 한국산 제품의 인기도 휘청거린다. 핵폭탄을 만들고 인권을 박탈하며 전쟁의 혈안인 북한이 서울을 향해 미사일을 언제 던질지도 모른다. 민족과 평화라는 위장으로 거짓말을 일삼는 공산주의 당원들의 말을 어찌 믿을 수가 있는가. 

내가 이민 왔을 적만 해도 미국의 학생들은 세계지도 안에 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묻곤 했다. 제발 우리 후손들을 걱정하며 정치와 국민의 수준도, 도덕성도 각성하여 좀 양심적이었으면 한다. 비록 외국에 살지만, 예쁜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내가 한국인이며 자랑스러운 조국이 있다는 자긍심으로 항상 살 수 있기를 이 서러운 봄날에 간절히 빌어본다. 

필자소개
경북 사범대 화학과 졸업
월간 ‘피플 오브 샌디에이고‘ 주필역임, 칼럼니스트로 활동
방일영문화재단 지원금 대상자(2013년) 선정되어
세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꽃잎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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