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은 봇짐장수 보상(褓商)과 등짐장수 부상(負商)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보상은 비단, 금은으로 만든 세공품, 필묵, 피혁과 같은 고가품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을, 부상은 생선, 소금, 나무제품, 토기 등 비교적 가격이 저렴하지만 부피는 큰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을 말한다. 도로가 발달되지 않아 상업이 어렵던 시대에 꼭 필요한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고, 5일장이 생겨난 뒤부터는 장날에 맞추어 순회하며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가 되었다. 매매알선과 금융, 숙박업을 하던 객주(客主)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이 뚜렷한 시대에서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천시 받는 직업이었다. 이들은 저희들끼리 동료를 모으고 친목계를 맺어 스스로 끈끈한 조직을 이루었다. 보부상단은 번화한 읍내에 가게를 차리고 보부상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장터가 서면 흥정꾼을 고용하기도 했다.
부상과 보상은 각각의 상단(商團)으로 나뉘어 있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구분하여,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상단은 군현(郡縣)을 묶은 관할마다 임소(任所)를 두고 그 우두머리인 본방(本房)을 선출하여 사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본방 중에서 접장(接長)을, 접장 중에서 도접장(都接長)을 선출해, 8도를 아우르는 전국적인 조직을 이루었다. 이들은 이름과 취급상품, 거주지 등이 적힌 신분증을 발급했고, 세금도 납부했다. 이들은 탐관오리나 폭력배들의 횡포에 공동으로 대응했으며 이런 탄탄한 조직력으로 한말 역사의 주요장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상부상조 정신으로 똘똘 뭉친 보부상은 어려움을 당하면 같은 소속임을 잊지 않고 서로 도왔고, 객지에서 병이 들거나 객사하는 보부상을 보면 설사 친분이 없더라도 땅에 묻어주었다. 특히 조직을 위협하고 상도덕을 어지럽히는 행위를 엄금하여 규칙을 위반하면 곤장을 맞고 벌금을 내야했다. 사건에 따라 적게는 10대에서 많게는 50대를 맞았다. 본방어른을 속이면 40대,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와 다투면 50대의 엄한 처분을 받았다. 혼인이나 장례에 내는 부조의 품목과 수량도 정해져 있을 만큼, 계산이 정확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헤어질 때는 저고리를 바꿔 입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보부상들은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1894년경 전국의 보부상 수는 25만명 정도로 추산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길이 잘 닦이고 유통이 발달하면서 보부상은 점점 사라져갔다. 1970년대에 작가 김주영이 『객주』(客主)를 써서, 보부상들의 애환과 그 보부상의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이야기로 풀었다.
“새우젓사려 조개젓사려초봄에 담은 살새우는 새아젓이요, 이월 오사리는 오젓이요, 오뉴월에 담은 젓은 육젓이요, 갈에 담은 젓은 추젓이요, 겨울에 담은 젓은 동백젓이오.”(보부상의 새우젓타령 중에서)
“담바고를 사시오 담바고. 평양에는 일초요, 강원도라 영월초요, 평안 성천의 서초요, 입맛나는대로 들여가시오.”(보부상의 담바고 타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