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관을 찾아 ‘애국’을 묻다-2
[탐방]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관을 찾아 ‘애국’을 묻다-2
  • 필라델피아=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6.1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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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한국 최초 신문 ‘독립신문’ 창간··· 매주 배재학당 출강해 세계사 강의
집 앞뜰 정원
집 앞뜰 정원

1893년 그는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한인 최초의 미국 의사였다. 서재필은 이듬해인 1894년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을 만나 과외 가정교사가 됐다. 이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뮤리엘 암스트롱은 친절했고, 두 사람은 6월20일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카버넌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뮤리엘과의 결혼으로 행복으로 치닫던 그의 일생은 조선의 변화와 함께 다시 소용돌이에 말리게 된다. 1895년 3월1일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의 건의로 서재필은 복권됐다. 작위도 회복됐다. 5월10일에는 미국에 있는데도 외부협판(外部協辦)에 임명되고, 8월에는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됐다.

서재필은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미조선공사관에서는 그에게 공사관의 방 하나를 무료로 내주었고, 식비까지 제공했다. 1895년 가을, 워싱턴에 들른 박영효를 만난 후 서재필은 다시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그해 11월 10일 부인 뮤리엘과 함께 필라델피아를 떠나 조선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12월26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는 귀국 직후 외무협판과 학부대신 서리직을 사직함과 동시에 조선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그는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했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앞에서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들고 악수를 청했다.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

서재필은 1896년 4월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해 순 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했다. 이를 위해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받았다.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됐다.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이승만, 유길준, 신채호, 이상재, 박정양, 이완용, 주시경, 박중양 등을 영입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사 회계사무원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신문사의 재정과 교열을 담당했다.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사용했다. 지금 ‘신문의 날’인 4월7일은 독립신문 창간일에서 비롯됐다.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3,000부 이상 발행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 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매주 무료로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사를 강의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개념, 사회계약론 등을 가르쳤다. 1896년 11월 학생들은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다.

서재필은 1896년, 97년 독립신문에 입사한 이승만, 김규식 등 청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는 이승만, 김규식한테 학비를 일부 송금하기도 했다.

집 앞 길 어귀에 있는 뮤리엘 제이슨 파크 팻말. 부인의 이름을 딴 공원이다
집 앞 길 어귀에 있는 뮤리엘 제이슨 파크 팻말. 부인의 이름을 딴 공원이다

그는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했다. 그는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의 학생들에게 수업 외에도 별도로 논리적 설득의 필요성과 토론하는 방법을 틈틈이 가르치기도 했다.

서재필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됐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이 일을 위해 1896년 7월2일 이완용을 비롯해 남궁억 박영효 김가진 안경수 등과 함께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독립협회의 지도자는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등이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 고문에 선출되어 윤치호와 함께 협회의 제반사무를 총괄했다.

1897년 11월20일 ‘독립문’이 들어섰다. 독립협회가 기금을 모아 완공한 독립문은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했으며, 중국인 노무자들이 쌓았다.

하지만 러시아의 적극적인 간섭정책과 대한제국 수립으로 서재필의 입지가 어려워졌다. 대한제국은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했다. 서재필은 1898년 5월14일 독자와 동포들에게 올리는 인사말을 남기고 서울서 낳은 큰딸 스테파니와 부인을 대동한 채 서울을 떠났다.

1898년 12월10일 최익현이 서재필, 유길준의 사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최익현의 상소를 필두로 1900년까지 연일 서재필과 유길준, 김윤식 등을 사형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려졌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이루는 건물들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이루는 건물들

1898년 4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했다. 이때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부상병의 진료와 수술을 담당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로 돌아가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직은 1914년까지 출강했다.

서재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 해리힐먼 고등학교 일 년 후배인 해롤드 디머와 함께 문구 및 인쇄 사업을 하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했다. 해롤드 디머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 윌크스 베리 본점을, 서재필은 ‘디머 앤 제이손 상회’ 필라델피아 분점을 맡아 경영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한국 정부에 조약은 부당하고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함을 의미하니 지금이라도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 등을 파는 필립 제이슨 상회를 경영했다. 그의 회사는 필라델피아의 상업 중심지인 1537 Chestnut street에 소재했다. 이후 필립 제이슨 상회는 본점 외에 필라델피아 시내 두 곳에 분점을 둔 종업원 50명의 큰 사업체로 성장했다. 자신이 기존에 경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의 장사가 잘돼 어렵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1916년 노백린이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서재필은 무장 독립을 주장하던 노백린의 견해에 회의적이었다. 노백린은 캘리포니아에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 등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비행학교를 설립했다.

3.1운동으로 서재필의 생각은 다시 바뀌었다. 3.1만세운동이 한창이던 3월 중순 서재필은 미국 잡지 ‘이브닝 레저 (The Evening Ledger)’지를 찾아가 조선의 문제를 다룰 것을 설득했다. 이후 서재필은 이 잡지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군국주의를 규탄하는 자료와 논설, 칼럼을 기고했다. 서재필은 이 일을 위해 사재 7만6,000달러를 투입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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