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연변대학은 조선족 동포사회 떠받치는 주춧돌
[탐방] 연변대학은 조선족 동포사회 떠받치는 주춧돌
  • 연변=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7.15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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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대학··· 20개 단과대학에 2만4천여명 수학 중

연변대를 들르게 된 것은 숙소 때문이었다. 월드코리안장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2019 만주독립운동사적 탐방단’은 5박6일간의 탐방일정 주 셋째 날을 연길에 투숙했는데, 숙소가 연변대학 정문 앞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산책하면서 우연히도 연변대학을 거닐 수 있었던 것이다.

연변대학 정문은 기와지붕으로 덮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대표 교육기관의 자존감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올해 연변대학 70주년을 맞았다는 안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연변대학은 1949년에 설립됐다. 조선족 자치주를 이끌 인재를 양성할 기관이자, 조선족 동포사회를 이끌 영재를 키워내는 최고학부였다.

‘70주년’ 현수막을 뒤로하고 위로 올라가자 길 양켠으로 ‘독행(篤行)’ ‘박학(博學)’이라고 쓴 둥근 자연석 바위가 나오고, 본관 앞에 조성된 작은 정원의 석판에는 한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백두의 정기를 한몸에 안고 해살밝은 언덕에 우뚝 솟았다. 겨레의 아들 딸 그대품에서, 희망의 푸른 꿈 피워가노라. 아 배움의 성당, 겨레의 자랑, 길이길이 빛나라, 우리 연변대학교.”

띄어쓰기가 잘 안 된 점이 아쉬웠지만, 우리 겨레의 미래를 키운다는 내용은 가슴을 뜨겁게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옆에 새겨진 같은 내용의 중국어 글귀였다. 같은 크기의 석판에 쌍을 이뤄 새겨진 내용은 우리말과 ‘약간’ 달랐다. ‘겨레’가 ‘각 민족’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족 자치주라고 하지만, 만주족 몽고족 한족 등 여러 민족이 살고 있다 보니, 중국어로는 ‘각 민족의 뛰어난 영재들이 모여 내일의 오색찬란한 꿈 그리는 곳’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글이란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해야 하고, 학문의 전당도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두 석판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고 할까?

연변대학은 산을 끼고 위로 올라가면서 학교 강의동들이 서 있다. 본관 왼쪽을 끼고 오르자 오른쪽으로 인조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나타나고, 왼쪽으로는 테니스장도 나타났다.

이른 아침인데도 테니스장과 축구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축구장 사면을 따라 늘어선 벽보판에 중국개혁개방의 성취를 소개하는 홍보물들과 2019년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결정내용들이 전시돼 있었다.

그 뒤로 올라가자 작은 동산이 나타났다. 호젓한 산책길을 이루는 동산이었다.

동산의 산책길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비석이 서 있었다.

“내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초 연길에 살구꽃, 배꽃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려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열차에 앉았다.”

‘정팔용 문학비’였다. <고향 떠나 50년>이란 저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연변대학을 꾸리는데 참여한 인사들의 고뇌와 바람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느낌이다. 민족영재들을 키우기 위해 연변대학을 일구는데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생각들이었을 것이다.

동산의 산책로를 따라 돌다 보니 항일무명영웅기념비도 나타났다. 둥그런 모자 모양으로 만든 기념비였다. 기념비에는 일제침략에서 항일시기, 그리고 일본의 패망까지를 담은 그림이 석판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일제는 물러가라’는 우리말 글씨도 그림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들 가운데 이름 석자를 제대로 남긴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시는 대부분 가명을 썼고, 자신의 이름 석자를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름이 밝혀지면, 온 집안식구들이 탄압을 받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항일무명영웅기념비는 당시를 치열하게 살아온 선인들 모두를 기리는 비인 셈이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연변대학 뒷동산 산책로에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항일무명영웅기념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노천극장에서는 5-6명의 장년들이 모여 태극권을 연마하는 모습이 보였다.

동산을 내려오면 ‘소나무 바람(송뢰) 소리를 듣는다’는 뜻의 청송정(聽松亭)이 있고, 그 옆으로 예술대학과 새로 지은 미술대학 건물이 서 있었다. 예술대학에는 장구와 북 같은 게 벽 주변으로 장식돼 있고, 건물 한켠에는 농악무 예술인재를 양성한다는 배너도 내걸려 있었다.

연변대는 2019년 3월말 통계로 학부생 1만8천8백여명, 석박사과정 등 2만4천3백명의 학생들이 있고, 산하 단과대학도 20개에 이른다. 교직원도 2천2백명에 이른다.

교육은 흔히 백년대계라고 한다. 연변대학을 내려오면서, 이 대학이 없었으면 연변 조선족 사회가 과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지탱되었을까를 생각해봤다. 1949년 대학을 만들면서, 그리고 대학을 오늘까지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현지의 조선족 동포사회가 흘린 땀과 노력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그것이 연변조선족자치주 우리 동포사회의 자긍심을 이루고,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곱씹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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