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캔사스시티 트루먼 박물관··· “불확전 결정으로 대국민 인기 줄어들어”
[탐방] 캔사스시티 트루먼 박물관··· “불확전 결정으로 대국민 인기 줄어들어”
  • 캔사스시티=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8.0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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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로 전 캔사스시티한인회장과 동행··· “원자탄을 투하했다면 우리는 감내할까?”
캔사스시티 인디펜던스시에 있는 트루먼 고택
캔사스시티 인디펜던스시에 있는 트루먼 고택

6.25 때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지 않고, 그의 말에 따라 전쟁을 중국 동북지역으로까지 확대시켰다면? ‘항미원조전쟁’에 개입한 중국인민지원군을 막는다고 한반도 상공이나 중국 동북지역에 다시 원자탄을 터뜨렸다면? 아니면, 혹시 한국전쟁에서 전사할 3만여 미국 청년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아예 한국 전선을 포기하고, 일본 방어선으로 철수했다면?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지만, 캔사스시티의 트루먼 고택과 트루먼 뮤지엄 & 라이브러리를 둘러보면서 이런 상념에 젖어 들었다.

캔사스시티 인근 인디펜던스에는 트루먼 고택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트러문 뮤지엄 & 라이브러리가 넓은 부지 위에 들어서서 참관객을 맞고 있었다. 한반도에 6.25가 일어났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해리 S. 트루먼(1884-1972)이었다.

미주리 출신인 그는 캔사스시티를 무대로 성장하고 정치적 입지를 굳혔으며, 또 거기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캔사스시티나 미주리주에서 가장 자랑하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정영로 전 캔사스시티회장이 트루먼집무실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정영로 전 캔사스시티회장이 트루먼집무실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캔사스시티의 트루먼 박물관을 찾은 것은 7월18일이었다. 안경호 캔사스시티한인회장과 헤어져 인디펜던스 시에 있는 트루먼 박물관을 찾을 때는 정영로 전 캔사스시티한인회장이 동행했다. 캔사스시티에 오면 꼭 들러 봐야하는 곳이라면서 안내를 자청한 것이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1층 로비 정면에 트루먼 재임 당시의 백악관 집무실이 재현된 방이 나온다. 책상 위에는 맥아더 장군과 통화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화, 더글러스 맥아더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매튜 리지웨이 중장을 임명하는 결제서류에 서명했을지 모를 필기구 등이 놓여 있었다.

이어 우측에 있는 본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트루먼의 재임 시기를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원자폭탄 투하 결정을 둘러싼 논란도 가감 없이 전시해 놓았다는 점이었다.

트루먼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83일만인 1945년 4월12일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직후 그가 내려야 했던 중요결정은 루즈벨트 대통령 때 개발이 완료된 원자탄을 일본에 투하하느냐 마느냐였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지속되면 미국의 젊은 장병들의 희생이 계속된다는 이유로 원자탄 투하에 서명했다. 그게 인도적 문제로 이후 계속 논란이 된 것이다.

트루먼 동상에서
트루먼 동상에서

한국전과 관련한 내용도 전시돼 있었다. 한국전이라고 표제를 단 벽면에는 우리 장독대 옆으로 한 미군 장병이 달리는 사진 등 몇 장이 전시돼 있고, 이어진 면으로는 짧지만 강렬한 사진 한 장이 통째로 벽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눈 덮인 산의 능선을 타고 미군 장병이 일렬로 줄지어 가는 장면의 대형 사진이었다. 장진호 전투 후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함흥으로 철수할 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인 듯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은 이 전투 이후 미군 철수 때 피난민으로 함흥에서 월남선에 오르게 된다.

한국전쟁 관련 전시는 ‘Stalemate(교착상태)’라는 표제어 아래의 설명문과 함께 끝났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51년이 되면서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미국에게는 낯선 전쟁이었다. 무기를 총동원해 결정적인 전투에 임해왔던 미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좌절감이 커졌다. 일부에서는 중국도 폭격하자고 했고, 원자탄도 쓰자고 했다. 하지만 ‘제한전쟁’의 결정은 한국에서 결정적인 승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미국 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이로 인해 트루먼의 인기는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랬다.”

한국전쟁을 설명하는 전시벽 한면을 메우고 있는 사진
한국전쟁을 설명하는 전시벽 한면을 메우고 있는 사진

한국전쟁에 관한 트루먼 박물관의 이 같은 설명은 3.8선을 유지한 트루먼의 결정을 비판한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도 과연 나중에 이 같은 비판에 동의했을까?

트루먼의 ‘제한전쟁’ 결정으로 결국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된 모습으로 남게 됐다.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남북 간의 상처만 더 심해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세계도 빠르게 양진영으로 갈라져서 무기를 쓰지 않는 ‘차가운 전쟁’ 시기로 빠져들었다.

일본을 상대로 원자탄을 썼던 트루먼은 왜 한국전쟁에서는 사용을 주저했을까? 만약 한반도나 중국 동북지역에 원자탄이 터졌다면 전쟁결과는 어떻고, 또 이후의 휴유증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그의 원자탄 사용 결정을 감내할 수 있을까?

‘교착상태’ 표제어 하의 소개로 한국전쟁 전시는 끝난다.
‘교착상태’ 표제어 하의 소개로 한국전쟁 전시는 끝난다.

전시관이 끝나는 문에는 트루먼의 연설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당대의 평화가 아니라 항구적인 평화다.” 그리고 그 글귀가 적힌 창문 밖으로는 ‘평화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원자탄 투하로 숨진 사람들을 기린 것일까? 아니면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에서 스러진 사람들을 기리는 것일까? 묘하게도 그 불꽃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한켠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를 기리며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연상시켰다.

전시관을 나올 무렵 정영로 전 회장과 함께 실물 크기의 트루먼 동상에서 기념사진을 돌아가며 찍었다. 정영로 회장은 박물관 문을 나서면서 기자한테 물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질문이었다.

“일본한테 배상하라면서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게 정말 옳은가? 그렇다면 6.25 때 미국 젊은이들 3만명 이상이 전사했는데, 한국은 과연 이들한테 배상할 수 있을까?”

원자탄 투하 후의 논란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원자탄 투하 후의 논란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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