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손인석 회장 “세인트루이스는 서부로 가는 게이트웨이”
[탐방] 손인석 회장 “세인트루이스는 서부로 가는 게이트웨이”
  • 세인트루이스=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8.0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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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LA로 이민해 1992년부터 세인트루이스 정착··· 게이트웨이 아치와 버드와이저사도 안내
손인석 회장이 센트루이스 랜드마크인 게이트웨이 아치 전망대에서 포즈를 취했다.
손인석 회장이 센트루이스 랜드마크인 게이트웨이 아치 전망대에서 포즈를 취했다.

“눈 아래 보이는 물줄기가 미시시피강입니다. 마크 트웨인 소설의 무대였지요. ‘톰소여의 모험’이나 ‘엉클 톰스 캐빈’ 같은....”

세인트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에 올라, 창밖을 내려다보며 손인석 전 세인트루이스한인회장이 설명을 했다. ‘게이트웨이 아치’는 세인트루이스의 랜드마크다. 높이 192m로, 파리 에펠탑(324m)이나 서울의 롯데타워(555m)에는 못 미치지만, 인근에서는 어디서나 보이는 기념물이다. 미 서부로 가는 게이트웨이 도시라는 뜻으로, 1965년 만들어졌다.

미시시피강에는 바지선들이 마치 기차처럼 몇 척씩 연결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고, 여객선으로 보이는 크루즈선도 눈에 띄었다. 손 회장은 “어떤 때는 바지선이 기차처럼 아주 길게 많이 엮여서 올라간다”고 소개했다.

미시시피강은 상류인 미주리강을 포함해 길이가 6,210km다. 나일강 아마존강 양쯔강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다. 미국 50개주(州)에서 31개주를 흐르며, 미네소타주 북부의 이타스카호에서 발원해 남쪽 루이지애나에서 멕시코만으로 흘러든다.

‘톰소여의 모험’ 등으로 미국 문학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마크 트웨인(1853-1910)은 미주리주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세인트루이스에서 가까운 미시시피 강변의 한니발에서 자랐다. 본명은 새무얼 랭혼 클레먼스. 필명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증기선 시절 배가 안전하게 운항하는데 필요한 ‘물 깊이 3.66m’를 뜻하는 항해용어라고 한다.

멀리 게이트웨이아치가 보인다.
멀리 게이트웨이아치가 보인다.

“서부개척시기 세인트루이스는 미국 서부 최대도시였어요. 이곳을 거쳐서 오레곤과 캘리포니아로 갔어요. 황금을 찾아 서부로 가는 행렬의 게이트웨이(관문)였습니다.”

손인석 회장은 “하지만 마차나 증기선, 기차의 시기가 지나고 항공기가 등장하면서 세인트루이스는 서부 최대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했다”고 덧붙였다. 게이트웨이 아치를 내려오니 하늘은 소나기 같은 비를 뿌려냈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비가 많다고 손 회장은 소개했다.

이어 함께 찾아간 곳은 버드와이저 공장이었다. 공장 견학코스와 시음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세인트루이스 관광명소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곳이었다. 버드와이저는 미시시피 강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주리 대평원의 호프밀과 미시시피 강물이 빚어낸 박카스신(神)의 조화가 버드와이저였다.

이 회사는 2008년 벨기에의 인베브사에 흡수합병됐다. 호가든 맥주로도 유명한 인베브는 버드와이저 외에도 코로나, 스텔라 아르투아 등을 생산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맥주회사다. 우리나라 OB맥주도 이 회사의 자회사다. 버드와이저 공장 시음장에는 대낮인데도 품주(品酒)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 현지에서 생산된다는 ‘버드 라이트’ 생맥주를 주문했다.

이어서는 명문으로 꼽히는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을 방문했다. 1853년 설립된 이 대학은 그간 노벨상 수상자만 24명을 배출했다. 대부분이 물리학 화학 의학 생리학 등 자연과학 분야다. 특히 의과대학의 소아과 분야에서 세계 탑에 랭크돼 있다.

게이트웨이 아치 앞의 미시시피 강변에서.
게이트웨이 아치 앞의 미시시피 강변에서.

손인석 회장이 세인트루이스로 온 것은 LA폭동 직후인 1992년이라고 했다. 그는 LA폭동 때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는 세인트루이스로 와서 새로운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미국 이민 전에는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일했어요. 그러다 보니 LA에 자주 갔고, 1980년 LA에 정착했습니다.”

LA에서 그는 벼룩시장인 플리마켓부터 시작했다. 한국 가방을 가져와 유통했던 당시 LA가 박병철 사장으로부터 가방을 받아 거리에서 소매로 팔았다. 세계한인무역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한 박병철 사장은 지금도 LA에서 ‘에베레스트’라는 가방 브랜드로 생산 유통을 하고 있으며, LA한인사회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대표적인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플리마켓을 시작했는데 한 외국 친구가 조언했어요. 그렇게 팔아서 언제 돈을 벌겠냐면서 자기를 보라고 해요. 그는 사람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의류들을 풀어 헤쳐놓고는 싼값으로 세일을 했어요. 박리다매였습니다. 마치 남대문시장에서 매대에 물건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박수를 치면서 파는 방식과 같았어요.”

물건이 한꺼번에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의 머리에도 섬광이 일었다. 그 후부터 그는 가방을 그런 방식으로 팔았다. 입고가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가격으로 싸게 팔았다. 싼 맛에 서너개씩 구입하는 손님들도 많았다. 결국 직장에 다니던 부인의 손을 빌리고, 한국과의 무역도 시작했다. 부인이 제안한 주얼리 무역이었다. 그게 대박이었다. 저녁이면 돈을 헤아리기 바빴다. 돈이 날아다니던 시기였다.

워싱턴대학  캠퍼스에서.
워싱턴대학 캠퍼스에서.

하지만 소문이 나면서 경쟁자가 하나둘 늘었다. 그중에는 LA의 은석찬 전 LA경제인협회장도 있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가운데 급기야 1991년 LA폭동까지 터졌다. 아프리칸아메리칸(흑인)을 상대하는 손 회장은 이때 치명적인 피해를 봤다. 창고는 털렸고, 보험은 당시 가입할 생각도 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는 마침내 새로운 활로를 찾아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세인트루이스에는 한인회장을 지낸 이복재 회장이 일찍 와 있었습니다. 부인끼리 친구여서 한국에서부터 그를 알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미국 오면서 연락이 두절됐다가 세인트루이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와서는 정착을 결심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어요.”

세인트루이스는 LA와 달랐다. LA는 마치 한국 같았다면, 세인트루이스는 말 그대로 미국이었다. 우리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우여곡절과 기복은 뒤따랐지만, 그는 사업에 열중했고, 자녀들도 잘 적응해 좋은 학교들을 나왔다. 특히 디자인을 하는 딸 손윤선씨는 나이키사의 디자이너를 거쳐 닌텐도사의 디자이너로 스카웃 돼 일하고 있다고 한다.

손 회장과의 대화는 이날 저녁 박용문 세인트루이스한인회장, 이복재 전 회장 등과의 만찬으로 끝났다. 만찬은 세인트루이스 외곽 미시시피강가에 자리잡은 리버시티카지노호텔의 베트남음식점에서 이뤄졌다.

왼쪽 세번째가 이복재 전 한인회장, 네번째가 박용문 현 회장이다.
왼쪽 세번째가 이복재 전 한인회장, 네번째가 박용문 현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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