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스프링필드 링컨홈과 묘지··· “국론분열의 끝은 내전?”
[탐방] 스프링필드 링컨홈과 묘지··· “국론분열의 끝은 내전?”
  • 스프링필드(일리노이)=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8.0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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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한 화해를 통한 사회통합’과 ‘인도주의’ ‘자유주의’가 링컨 리더십의 요체
오크리지 묘지의 링컨추모탑과 링컨 두상
오크리지 묘지의 링컨추모탑과 링컨 두상

국론분열의 끝은 어디일까? 시카고에서 스프링필드를 찾아가며 머릿속에서 이런 화두를 떠올렸다.

일리노이주의 주도(州都)이기도 한 스프링필드는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 살았던 ‘링컨의 도시’로 유명하다. 미국 제16대 대통령인 링컨은 28세이던 1837년부터 사망하기 4년 전인 1861년까지 스프링필드에서 살았다.

7월15일 시카고를 출발해 스프링필드를 찾아 55번 고속도로를 탔다. 스프링필드는 시카고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km 떨어져 있다. 차는 기복 없이 평평한 도로를 지루하게 달렸다. 고속도로 양옆으로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져 지평선으로 이어졌다.

미 중서부는 프레리(prairie)로 불리는 대평원지역이다. 동서 1천km, 남북 2천km가 바둑판 같은 평원이다. 미국은 물론, 세계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이며, ‘농업 국가’ 미국이 세계에 군림하는 힘의 원천이다.

링컨홈 앞에서 레인저의 안내를 듣고 있다 .
링컨홈 앞에서 레인저의 안내를 듣고 있다 .

스프링필드에 접어들어 링컨홈으로 불리는 링컨 고택(故宅)부터 찾았다. 그의 집은 도시 중심부에 가까운 8번가의 잭슨가에 있다. 링컨 가족은 1844년부터 1861년까지 2층짜리 목조 가옥에 살았다.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주차료 2달러를 지불하니, ‘레인저(Ranger)’로 부르는 ‘문화해설사’를 따라 단체로 링컨홈을 둘러보라고 안내를 했다. 레인저는 서부극에 나오는 챙 큰 모자에 옅은 국방색 군복 같은 차림이었다. 링컨홈 입장료는 무료였다.

링컨홈 주변은 거리 전체가 옛날의 모습대로 복원돼 있었다. 링컨홈도 복원한 주택이었다. 거리는 미국 서부극에서 보는 듯한 풍경이었다. 레인저의 안내를 받아 링컨홈을 둘러보면서 우리 문화해설사도 전통 특색을 살린 유니폼을 입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동 하회마을 같은 곳에서는 전통한복도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링컨홈에서 눈길을 끈 것은 눈이 어지럽도록 화려한 문양의 벽지와 카펫이었다. 링컨이나 그의 부인인 메리 토드가 그런 문양을 좋아했을까? 아니면 당시의 유행이었을까?

스프링필드의 링컨홈
스프링필드의 링컨홈

링컨홈은 링컨이 변호사가 되고, 정계에 몸담았던 시절 살던 집이었다. 링컨은 노무현 대통령처럼 독학으로 변호사를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는 변호사 자격을 따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단 잘 버는 변호사가 되기는 쉽지 않았으나, 링컨은 성실함으로 성공한 축에 들었다고 한다.

링컨홈을 떠나서는 링컨의 무덤이 있는 오크리지 묘지로 향했다. 링컨홈에서는 차로 10여분의 거리였다. 오크리지 묘지로 들어서자 현충탑 같은 거대한 탑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링컨 무덤의 추모탑이었다.

독학 성실 타입인 링컨은 정치적으로 조숙했던 듯하다. 불과 23살이던 1832년 일리노이 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마하고 2년 후 선거에서 당선됐다. 당선 전해에는 변호사 자격도 취득했다. 이어 1846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에도 당선됐다. 1858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돼 1860년 제16대 미 대통령에 당선됐다.

링컨이 정치활동을 하던 당시 미국은 노예제 문제로 시끄러웠다.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북부 공화당과 노예제를 유지하자는 남부 민주당이 국론을 팽팽하게 갈라놓고 있었다.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 비해 농장 중심의 남부는 노예제의 유지를 원했다.

링컨홈의 거실. 벽지와 양탄자의 문양이 화려하다.
링컨홈의 거실. 벽지와 양탄자의 문양이 화려하다.

북부와 남부의 팽팽한 균형에 변화의 불씨를 당긴 것이 일리노이주 인근의 미주리와 캔사스주였다. 막 만들어져서 연방에 편입할 이 주들에 노예제를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남북의 균형이 달라질 상황이었다.

결국 이 갈등은 지역적인 폭력에서 남북 내전으로 비화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이듬해인 1861년 4월 남부연합군이 분리독립과 함께 전쟁을 선포하면서 1865년 4월까지 4년간 당시 인구 3%인 103만명이 사망하는 남북전쟁이 이어졌다.

링컨은 전쟁 이듬해인 1862년 노예해방선언을 했다. 이어 1863년에는 펜실베니아 게티스버그에서 양측에서 5만1천명이 사상하는 남북전쟁 통틀어 가장 참혹한 전투가 치러졌다. ‘국민(people)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자’는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은 이 전투 4개월 후 전투현장을 국립묘지로 만들 때 링컨이 발표한 연설이다.

하지만 링컨은 4년간의 남북전쟁이 남부군을 이끌던 리 장군의 항복(4월9일)으로 북부군의 승리로 끝난 후인 4월14일 워싱턴DC에서 연극 관람 중 총을 맞고 암살당한다.

링컨홈의 뒤뜰
링컨홈의 뒤뜰

링컨의 유해가 옮겨져 안치된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의 오크리지 묘지에는 평일인데도 링컨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높이 솟은 링컨 추모탑 앞에선 링컨의 두상 동상이 서 있었으며, 링컨의 코 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만져서인지 반질반질했다.

오크리지 묘지를 빠져나오면서 링컨의 리더십을 생각했다. 링컨은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존경을 받으면서도, 리더십에서도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링컨의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일까?

링컨은 노예제 폐지 여부를 둘러싸고 전쟁까지 치르면서도 ‘인도주의’와 ‘자유주의’ ‘사회통합’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는 게티스버그 전투의 처참한 현장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미국의 국가 모토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북부군이든 남부군이든 헛되이 죽은 사람은 없다’고 추모사를 해 남북전쟁 전후 관대한 화해를 통한 국가 재통합의 기초를 놓기도 했다.

인도주의와 자유주의 원칙을 지키고 관대한 화해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끌어 낸 것, 아마 이것이 링컨 리더십의 요체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다음 행선지인 세인트루이스로 차를 향했다.

링컨의 유해가 뭍힌 오크리지의 링컨무덤. 추모탑 뒤에 있다.
링컨의 유해가 뭍힌 오크리지의 링컨무덤. 추모탑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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