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중칼럼] 중국혁명의 성지 난창(南昌) 방문기
[김현중칼럼] 중국혁명의 성지 난창(南昌) 방문기
  • 김현중 대전시외국인투자유치자문관
  • 승인 2019.08.0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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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농한기를 이용해 중국 중부의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 다녀왔다. 상하이에서 서남쪽으로 700km, 우한(武漢)에서 남동쪽으로 360km의 거리다. 이번 여정은 저장성(浙江省) 원저우(溫州)에서 고속철도를 이용했다. 저장성의 농촌 들녘에는 모내기 한지 3주 정도 크기의 벼가 자라고 있었고, 장시성으로 이동하니 벼를 거두는 콤바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중 관계가 지방으로도 많이 확산됐지만 난창은 아직 직항이 없는 한산한 곳이다. 대학에 있을 때 두 번 왔었던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난창은 충칭(重慶), 우한(武漢), 난징(南京)과 함께 중국의 4대 화로로 불리는 더운 곳으로 습기까지 많다. 음식도 맵고 짜다. 난창은 우한, 창사(長沙)와 함께 중부 트라이앵글의 하나로 인구 600만이다. 장시성은 4600만이다.
 
난창은 혁명의 도시다. 인민해방군(紅軍)의 태동지이다. 오늘날 인민해방군의 건군기념일(8.1)은 ‘8.1남창봉기(중국은 南昌起義라고 한다)’이다. 시내 곳곳에는 8.1기념관, 8.1기념탑, 8.1광장, 8.1대로, 8.1공원 등 8.1남창 봉기와 연관된 표지가 많다. 기념관 앞에는 장저민의 군기승치(軍旗升起)의 장소라는 글과 함께 인민해방 군인들이 깃발을 펼치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장시성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토지혁명이 시작된 곳이고, 노동자 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그래서인지 ‘난창은 홍색(紅色)의 요람’이라는 표어가 많이 보였다.

1927.8.1 새벽 저우언라이(周恩來), 허롱(賀龍), 예팅(葉挺), 주더(朱德), 류보청(劉佰承) 등은 난창에 주재하던 국민당 군대를 공격해 4시간 만에 시내 전역을 점령했다. 난창 봉기는 3가지 의의를 갖고 있다. 첫째는 당시 집권파이던 장제스(蔣介石)에 대한 최초의 무장반항이다. 다음은 중국 공산당이 독자적으로 지휘한 무장 투쟁의 시작이다. 셋째는 이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공농홍군(工農紅軍)의 조직이 8.1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절이 됐다. 중국인민해방군의 기(旗)는 붉은 바탕에 공산당을 상징하는 오각의 별 그리고 옆에 8.1 난창봉기를 뜻하는 ‘八一’이 있다. 1948년 마오저둥은 “인민해방군기에는 八一을 넣어야 한다. 난창봉기는 건군을 뜻한다”라고 말했다.

8.1기념관은 방학을 맞아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아마 공산당원들도 상당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기념관 앞에는 주더(朱德) 등 5명의 주역 동상이 서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당시 참여자들의 이름도 나열돼 있었다. 혹시 한국인도 있을까 해 훝어 보던 중 김씨 성 줄에서 4명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서훈문제로 찬반양론이 뜨거웠던 김원봉의 이름이 “金元鳳 朝鮮 1898-1958”라고 표기돼 있었다. 그외 김만방, 김부광, 김금심의 이름도 있었다.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광저우)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명돼 교관 생활을 했다고 한다. 

홍군은 1928년 5월4일 징강산에서 공농혁명 제4군을 만들었다. 홍군기(紅軍旗)에는 망치와 낫을 그렸다.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군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국민당의 공격으로 징강산을 포기하고 1934년 10월부터 대장정에 나서 1935년 11월까지 368일 동안 1만2천km를 행군하며 항일투쟁과 공산혁명의 중심 부대가 됐다. 무려 11개성의 54개 도시를 지나며 24개의 강을 건너고 18개의 산맥을 넘었다. 

난창에서 남서쪽으로 329km 떨어진 후난성(湖南省)과의 변경에 홍군의 대장정이 출발했던 징강산(井岡山,1779m)이 있다. 1927~1928 마오저둥의 주도로 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된 곳으로 중국 현대사에서 이름이 높다. 중국에서 최초로 농촌혁명이 시작된 곳이다. 마오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로 소비에트를 구성해 토지혁명을 실시했다. 이론보다는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5만 평방 km에 250만명을 통치하며 야망을 키워 나갔다.

난창에서 북으로 122키로 떨어진 곳에 루산(盧山 1747m)이 있다. 1959년 7월 루산회의로 유명한 곳이다.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정책의 실패에 대해 마오저둥을 비판하자 반우경운동이 대숙청운동으로 전개돼 펑더화이 등 4명이 숙청됐다. 펑더화이(彭德會)와 마오저둥은 징강산에서 같이 투쟁했던 친구사이다. 루산에는 루산회의가 열렸던 건물과 장제스와 마오저둥의 별장 그리고 영국, 프랑스인들이 땅을 조차해 만들었던 주택들이 많이 남아있다. 루산은 여름 피서지로 유명해 휴가철을 맞아 여행객들로 붐볐다. 해발 1200 고지에 마을에는 1만4천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송군은 “당시 마오저둥(毛澤東)은 노동자와 농민을 규합해 정치를 했고, 주더(朱德), 주언라이(周恩來)등은 군을 이끌었다. 그 당시 중국 정치의 중심지는 중남부 지방이었다. 특히 장시성이었다. 한때 징강산이 중국의 수도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며 아쉬운 듯 말한다. 1949년 중국 건국 후 권력의 핵심을 이룬 인물들은 모두 강서소비에트 출신이었다고 한다.

난창에 온 지 20여년이 다돼 간다는 이근화 난창한인회장은 중국친구들과 같이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며 공간을 안내했다. “난창은 다른 곳에 비해 한국과의 교류가 아직 조용한 편이나 유학, 미용 등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앞으로 교육, 문화, 여행, 의료 등 분야의 교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곳의 특산물인 산마, 칡 등 특산물과 사과껍질에서 추출한 플로리진 등도 좋은 아이템의 하나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국 여행 기회를 이용해 혁명의 성지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태동지인 난창과 루산, 징강산 등을 둘러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전 세계의 한상(韓商), OKTA 등에서도 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필자소개
대전시외국인투자유치자문관
(전)건양대학교 국제교육원장
(전)도쿄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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