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자라지 않는 나무 – 김상미
[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자라지 않는 나무 – 김상미
  • 뉴욕=신지혜 시인
  • 승인 2019.09.21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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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시인

자라지 않는 나무

우리는 너무 우울해 먹은 것을 토하고 토하고
우리는 너무 외로워 귀를 막고 노래를 부르고 부르고

그래봤자 우리는 모두 슬픈 뱀에게 물린 존재
상처가 깊을수록 독은 더 빨리 퍼져

우리는 키스를 하면서도 썩어가고
우리는 사랑을 나누면서도 썩어가고

그래봤자 우리가 소유하는 건 날마다 피로 쓰는 일기 한 페이지
나부끼고 나부끼고 나부끼다 주저앉는 바람 한 점

그래도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밖으로
가급적이면 더 치명적인 비극, 희망을 향해 바퀴를 굴리고

그러다 만병통치 알약처럼 서로를 삼키고
사막같이 바싹 마른 가슴에 불치의 기우제를 올리는

우리는 수많은 이름들을 발가벗겨 구름 속에 처박고
어찌할 줄 몰라 밤에게 된통 걸려버린 나무 그림자

밤새도록 춤, 춤만 추는 자라지 않는 나무


우리 사는 현주소가 과연 어떤 것인지 이 시가 들려준다. 이 시가 당신과 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이 불온한 시대가 우리의 삶을 피폐시켰던 것인가. 아니면 인간 자신이 스스로를 포기하고 세상에 흔들리는 대로 그저 맡겨버린 것일까. 우울, 외로움, 상처, 독, 거짓, 부패, '그래봤자 우리가 소유하는 건 날마다 피로 쓰는 일기 한 페이지/나부끼고 나부끼고 나부끼다 주저앉는 바람 한 점' 그렇게 처절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희망의 바퀴를 굴리고, 서로를 삼키고, 기우제를 올리는, 이 시대의 거리를 당신과 내가 걸어가고 있음을 시인이 예리하게 짚어준다. 
 
'그러다 만병통치 알약처럼 서로를 삼키고 사막같이 바싹 마른 가슴에 불치의 기우제를 올리는' 시시때때로 삷의 치열한 바퀴에 이리저리 치이며 외로운 자아를 껴안고 살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생의 존재론적 비애감! 그렇다 결국 우리는 부조리의 틀에 박혀 자라지 못하는 나무 일수 밖에 없음을 시인이 일깨운다.

우리들은, 자라지 않는 나무처럼 그저 흔들리는 대로 춤을 출 뿐이라고. 어서 이 시간의 비망록인 현주소에서 화들짝 깨어 일어나라고. 시인은 우리를 각성시키며, 그 통찰의 죽비로 잠든 이 세계를 두들긴다.

김상미 시인은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관계도 아니에요』가 있으며 수필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 등이 있으며, 사랑시 모음집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필자소개
《현대시학》으로 등단,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미주동포문학상, 미주시인문학상, 윤동주서시해외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세계 계관시인협회 U.P.L.I(United Poets Laureate International) 회원. 《뉴욕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보스톤코리아》 《뉴욕일보》 《뉴욕코리아》 《LA코리아》 및 다수 신문에 좋은 시를 고정칼럼으로 연재했다. 시집으로 『밑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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