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촌만필] 계축옥사와 공작정치
[선비촌만필] 계축옥사와 공작정치
  •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 승인 2019.10.2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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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광해4) 초겨울, 문경새재 객주에서 쉬어가던 은(銀) 상인들이 강도들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고 은괴(銀塊) 6,700냥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은상인의 노비가 범인들의 뒤를 밟아 그들의 거처를 확인하여 체포한 박응서, 서양갑 등은 중국 위(魏), 진(晉) 시대에 현자를 뜻하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하여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자처하던 고관대작의 서자(庶子)들이였다.

신분차별이 극심했던 조선사회에서 서자 출신들은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이런 신세를 한탄하던 이들은 여주 남한강변에 ‘무륜당(無倫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술과 시(詩)로 소일하며 의기투합 했다. ‘윤리를 무시한다’는 뜻으로 현판 한 것처럼 강변칠우들은 필요하면 도둑질이나 강도를 일삼는 무뢰배들이 되어갔다.

조선의 신분 질서에 저항하며 세상을 비웃고 처지를 비관하던 이들이 때마침 한양으로 향하던 은 상인들이 문경새재를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생계자금 마련을 위해 이들을 덮쳤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광해군을 지지하고 집권세력 이였던 대북과 영창대군을 옹위하던 소북사이에 권력투쟁의 도구가 되어 계축옥사로 비화되고 말았다. 1589년 기축옥사와 함께 조선시대 집권당의 공작정치(工作政治)가 당쟁(黨爭)의 수단이 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당시 시국을 살펴보면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고 5년 뒤인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노골적으로 영창대군을 편애하니 세자인 광해군은 눈 밖에 날 수 밖에 없었다.

부왕 선조가 급서(急逝)하자 북인세력의 도움으로 어렵게 왕위는 계승했으나 형인 임해군이 아닌 광해의 왕위 계승 문제를 시비해오던 명(明)의 간섭은 계속됐고 정비(正妃) 소생인 영창대군의 존재로 말미암아 광해의 왕위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광해가 보위에 오른 이듬해인 1609년에 임해군은 유배를 보내 사사(賜死)했으나

후궁소생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광해군과 집권 대북세력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권 대북파의 실세들인 정인홍과 이이첨은 문경새재에서 일어난 은상인 강도 살인사건의 범인들이 글을 배운 사대부의 서자들로 벼슬길이 막혀 신세를 한탄하던 강변칠우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그들의 배후를 의심했다.

잘 이용하면 영창대군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이첨은 범인들을 문초하던 포도대장 한희길을 은밀하게 불렀다.

범인들의 동태를 보고받은 정인홍과 이이첨은 한희길에게 넌지시 ‘그들의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회유하는 거래를 시도했다.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엮어 제거하는 공작(工作) 지침을 주었던 것이다.

범인들에게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 옹립을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코자 은을 강탈하게 됐다고 범행동기와 배후를 토설하게 하는 공작이었다. 범인들을 살려 줄 것이니 그렇게 자백하라는 공작은 효과를 발휘했다.

광해군이 친국親鞫한 현장에서 주범 박응서는 각본대로 김제남의 사주와 광해를 폐하고 영창대군 옹립하려는 거사 자금 마련을 위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복하고야 말았다. 공작의 성공이었다.

이로 인하여 1613년 김제남과 그 아들 셋은 모두 사사되는 멸문(滅門)의 화를 당했고 강화도로 위리안치 됐던 영창대군은 1614년 이이첨의 지시로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증살(쪄 죽임)되고 말았다. 인목대비는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됐다가 1618년에 폐모(廢母)되고 존호도 폐기됐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누이인 정명공주와 인조반정이 일어나기까지 5년 동안 사무치는 원한의 세월을 서궁에서 보낸 것이다.

이래서 일부함원(一婦含怨)이면 오월비상(五月飛霜,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5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뜻)이라 했던가!

이렇게 계축옥사, 일명 ‘칠서(七庶)의 옥(獄)’을 거치면서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세력은 궤멸됐다.

사건의 범인 강변칠우들인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감평손 등은 국문 중에 죽거나 불구가 됐고 박치의는 도망가서 생명을 건졌다고 하나 박응서는 거짓 자백의 대가로 살아남았다가 인조반정 후 참살됐다.

북인 정권이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1613년 계축옥사라는 정치공작이 광해군과 북인정권의 종말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됐다.

광해군은 임진 전쟁 와중에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며 의병을 독려하고 민심 수습에 앞장서 백성의 신망을 얻었었다. 그러나 어느 왕세자도 해보지 못한 세자의 민생 현장에서의 생생한 경험을 정사(政事)에 반영하지도 못했다.

또 격변하는 중원의 패권 질서를 꿰뚫어 보고 조선의 생존 전략을 구사하던 광해가 계축옥사라는 공작당쟁으로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강상(綱常)의 죄를 범하고 임진전쟁에서 조선을 구해준 명明나라에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배신한 오명을 쓰고 반정(反正)의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대북파의 공작정치를 통한 무리한 국정 운영이 취약한 왕권을 보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는 몰라도 흉포한 강도 살인사건을 정적 제거를 위한 공작에 이용한 ‘칠서지옥’의 계축옥사는 조선왕조에 또 하나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사이자 잔혹한 당쟁사로 기록됐다. 역사상 비정상 수단을 남용한 비정상 권력의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 반추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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