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패러다임 읽기] 따라비오름 길
[문명패러다임 읽기] 따라비오름 길
  • 한도현(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사회학)
  • 승인 2019.11.05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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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는 오름이 많다. <문화지도 제주 가시리>는 오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름은 수십만 년 전부터 어머니 한라산이 폭발하듯이 끓는 열기를 참다못해 자신의 몸에 직접 구멍들을 내며 불꽃놀이를 시작한 흔적들”이다(p.94).

따라비오름은 제주 표선면 가시리에 있다. 가시리 사람들이 자랑하는 유채꽃 프라자에서 따라비오름에 가는 길은 아름답다. 쫄븐갑마장길이라 부른다. 올해 세 번이나 유채꽃 프라자에 묵었지만 이 쫇븐갑마장길을 걸어보지 못했다. 한라산에 갔지만 서울의 바쁜 일상이 한라산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름이 어디냐고 유채꽃프라자 사무장에게 물어보니 단연 따라비오름이라고 했다. 따라비오름에 오르면 한라산의 오름들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멀리 바다도 볼 수 있다고 했다. 따라비오름의 주차장까지 차로 가서 거기서 오름에 올랐다가 내려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유채꽃프라자 사무장께서는 따지듯이 물었다. “그렇게 급하게 다니려면 한라산에 왜 오세요?” 이 유채꽃프라자에서 세 번 얼굴을 보니 구면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외지인에게 다소 당돌한 질문이다. 약간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서 따라비오름 주차장으로 차를 달렸다. 숲이 우거진 좁은 길을 조심스레 달려 주차장에 다다르니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조선 최고의 목장, 갑마장답게 따라비오름에서 보는 가시리 마을 목장은 웅대했다. 따라비오름에서 보는 나란히 늘어선 풍력발전기들의 모습은 가시리를 네덜란드 농촌으로 착각하게 한다. 흰 구름으로 허리띠를 두른 한라산 봉우리도 보인다. 저 멀리 표선 바다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거센 산바람에 억새풀들은 따라비오름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격렬한 인사를 건넨다.

바쁘게 왔지만 따라비오름에 오르길 잘했다. 따라비오름에서 가시리의 마을만들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가시리 마을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농촌종합개발사업,신문화공간조성 사업 등을 통해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이 마을은 250여 만평의 마을공동목장을 매우 슬기롭게 활용했다. 이러한 성공에는 가시리 마을 주민들의 지혜와 노력이 깔려있다.

마을재산을 사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자원, 현재와 미래 후손들의 공유자원이라는 총유로 만든 지혜가 없었다면 오늘의 가시리는 없다. 1970년대 제주도에 몰아닥친 토지투기의 광풍 속에서도 이 마을은 ‘총유’라는 새 개념으로 마을공동목장을 지켜냈다. 이 땅은 이 마을에 살다가 외부로 갔던 사람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또 이들의 미래 자손들의 땅으로 돼있다.

이 마을의 헌법인 ‘향약’의 전문은 “향약을 복원, 우리 조상이 걸어온 발자취와 얼을 되살려 후대에 물려준다”고 규정한다. 생태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미래 세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구체적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라산 중턱의 한 마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헌법에 미래 세대의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후손을 생각하는 지혜가 이 마을을 21세기 선진마을로 만들고 있다.

이 지혜 덕분에 마을의 중요재산들이 사유가 아니라 총유로 됐다. 총유의 땅들은 이 마을의 21세기 사업의 효자가 됐다. 마을공동목장에서 운영되고 있는 풍력발전임대사업을 통해 마을은 년간 10억의 수익을 얻고 있다. 조랑말체험공원, 유채꽃큰잔치, 제주국제트레일러링 대회 등이 가시리라는 작은 마을을 세계적 마을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농촌체험수련장으로 개장한 유채꽃프라자는 한라산 중턱, 큰사슴오름 밑에 자리잡고 있다. 유채꽃프라자를 보면 농촌마을에서 만든 게스트하우스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연친화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이다. 가시리 마을사람들이 마을공동목장을 마을의 것으로 지켜내지 않았다면 이 모든 자산들은 어떤 자산가의 사유물로 됐을 것이다.

유채꽃길, 아름다운 오름들, 쫄븐갑마장길, 따라비오름에서 표선바다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풍경 모두 시민들이 누릴 수 없는 사유물이 됐을 것이다. 사유와 총유의 차이를 상상해보면 가시리 마을 사람들의 지혜가 더욱 돋보인다. 따라비오름 길에 오르면 가시리 마을 사람들이 만든 ‘총유’의 실천에 감사를 표할 일이다.

필자소개
한도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Korean Histories 편집위원(Leiden Univ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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