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한국국제학교 중국 동북지역 항일유적지 탐방기
선양한국국제학교 중국 동북지역 항일유적지 탐방기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9.11.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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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한국국제학교 학생들이 지난 11월1일부터 3일까지 중국 동북3성에 있는 항일유적지를 탐방했다. 11월 첫날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55인승 대형 버스로 이동하며 2박3일 간 경학사,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무순 노천 탄광, 양세봉 장군 기념비, 7인열사 능원, 평정산 참안 기념비 등을 방문했다.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외에도 많은 분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을 일깨워주기 선양한국국제학교가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학교는 한민족 정체성 교육주간을 두는 등 학생들이 우리 민족 정체성을 함양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은 이번 항일유적지 탐방에 참여한 학생들의 탐방기.

다시 가고픈 항일유적지
- 류지호(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나는 우연찮은 기회로 친구들과 항일유적지 탐방단에 뽑히어 유적지 체험을 가게 됐다. '역사탐방은 무엇일까? 꼭 가야 하나? 안 가도 되겠지?'라는 생각들이 들었다. 하지만 안 가면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친구들과 다 같이 가기로 했다. 처음엔 여행가는 마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학교에 가서 버스를 타고 우리가 머물 숙소가 있는 곳인 통화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발대식을 하고 이동하는데 밖에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선양에서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그곳에서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 호텔에서의 역사탐방 1일 차 밤, 나와 친구들은 다음날이 설레어서 밤을 늦게까지 지새웠다.

본격적인 역사탐방이 시작되는 날, 우리는 항일투쟁에 관한 유적지들을 갔다.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터, 7인열사 능원, 국민부 본부터, 양세봉 장군 기념비, 노학당 기념비 등 이곳들은 그 전에 강의를 들을 때 배웠던 곳들이었지만 사진과 말로만 듣던 곳을 직접 와서 본다는 것이 장소마다 사건을 더 생생히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더욱 뭉클해졌다. 2일 차 역사탐방 중에서 신흥무관학교 터를 보고 규모가 생각했던 그것보다 너무 거대해서 깜짝 놀랐고, 항일투쟁을 위해 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군사학교는 많은 청년이 지원해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으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사고와 일본의 압박, 현지인들이 배척 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만약 신흥무관학교가 오랫동안 잘 유지됐다면 우리나라의 해방도 일찍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외에도 여러 유적지를 돌아보고 많은 사연이 담긴 곳을 갔다가 마지막 밤을 보낼 펜션에 도착했다. 마지막 밤이어서 다 같이 삼겹살도 구워 먹고 라면도 끓여서 먹고 귀여운 감자들도 포일에 싸서 구워서 먹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먹어서 그런지 그 날 저녁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저녁을 다 먹은 뒤 소화할 겸 친구들과 뛰어놀고 불꽃놀이 하는 것도 보고 게임도 하면서 시끌벅적하게 역사탐방의 마지막 밤이 끝나갔다.

아쉬운 역사탐방이 끝나는 셋째 날, 우리는 무순 노천탄광과 평정산 참안 기념관 두 군데를 마지막으로 갔다. 무순 노천탄광은 2일 차 때의 신흥무관학교 터의 100배, 1000배 더 컸다. 눈앞에 그 탄광을 마주했을 때 너무 웅장하고 거대하여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보통 탄광은 땅굴을 파서 지하로 내려가는 것인데 이렇게 노천에 석탄들이 펼쳐져 있다니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순 노천탄광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평정산참안기념관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항일투쟁 때 돌아가신 많은 사람의 유골들이 보관된 것을 보았다. 그 유골들을 보니 그때의 참혹했던 광경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를 마지막으로 역사탐방은 끝이 났다. 처음에 캐리어를 끌고 버스에 탔을 때 괜히 왔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항일투쟁을 했던 곳들을 돌아보고 유적지 한 곳 한 곳에서 관계자들이 자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셔서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역사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저녁에는 다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더욱더 좋았다. 책에서만 보던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 항일투쟁에 대해 보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또한, 내가 몰랐던 항일투쟁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시간이라 좋았다. 역사탐방을 다녀와서 '왜 가야 하지?'라는 생각은 아예 없어지고 '또다시 가고 싶은데, 너무 재미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게 됐다. 다음에 이런 기회가 또 생긴다면 마다하지 않고 꼭! 갈 것이다.

잊히지 않는 3,000여 구의 시체들
- 박시후(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3000명 민간인 백골이 보존 전시된 평정산참안기념관이 가장 인상 깊었다. 평정산참안기념관은 푸순시에 위치에 있다. '땅만 파면 석탄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하에 저장된 자원이 많은 곳이다. 이런 자원을 사용해 전쟁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청나라로부터 이 일대의 석탄 채굴권과 철도부설권을 가져갔다. 그러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동북3성의 시민들은 일제에 대항하고 나섰다. 1932년 9월 15일 자정 무렵 요녕 민중자위군은 푸순 탄광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을 소탕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군은 민간인을 상대로 끔찍한 보복을 저지른다. 일본은 바로 다음 날, 수비대, 헌병대, 경찰 등 수백 명의 무장 인력을 동원해 평정산 마을을 에워쌌다. 그리고 마을 주민을 산 아래로 모이도록 한 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총격을 가했다. 3시간 동안 3000여 명이 총탄 아래 쓰러졌다. 만행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일본군은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태웠다.

중국 정부는 1970년 유해 발굴을 본격화했다. 평정산 아래 묻혀 있던 희생자 시신 3000여 구가 발견됐다. 이 기념관에는 이 희생자들의 3000구의 시체가 보존돼 있다. 이 기념관의 외관은 배를 닮았다. 배를 타고 저 세상으로 편히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외관까지 하나하나씩 특별히 설계한 것을 통해 중국 정부는 이 일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처음에 이 시체들이 보존된 것을 봤을 때 충격에 빠졌다. 이 많은 해골이 전부 다 일본군이 저지른 참사의 흔적이라니, 한 바퀴 둘러볼 때 시체 곳곳의 꽂혀 있는 표지판을 보았다. 거기에는 어린이를 껴안고 있는 유골, 총상으로 구멍 난 두개골,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사용됐던 기름을 담은 통도 있었다. 그중 여인이 한 아이를 껴안고 있는 유골을 보았을 때 당시 참혹한 상황에서도 모성애는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 모든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일본군이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 사살을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군 당시의 참혹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평당 8구의 시체들이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랬다.

참사가 일어난 날은 음력 8월 16일로 추석 다음날이었다. 평정산 마을 주민은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추석 명절을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기념관을 들른 후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확인 사살을 한다는 것은 사람을 한 번 죽이는 것이 아닌 두 번 죽이는 것과 같으니 그 또한 충격적이었다.

이 분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평화로운 삶이 없었을 것 같다. 다시 한번 이 분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3000여구의 민간인 백골을 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걸어온 길
- 한지원(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인재를 양성한 신흥무관학교, 경신참변으로 인해 희생한 교사들을 기리는 7인열사 능원, 양세봉 장군을 기리기 위한 양세봉장군기념비,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한 무순 평정산. 만약 이것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그 당시 자신들의 목숨과 인생을 희생해 그토록 원했던 독립, 그래서 치열하게 싸우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 지금의 그곳은 어떠할까?

학교가 끝나자마자 차를 타고 항일유적지를 탐방하기 위해 통화로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캐리어를 끌고 친한 친구들과 있어 그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중국 동북삼성에 있는 항일유적지를 갔다. 우리는 먼저 이회영 독립운동가의 가족이 다 같이 만든 경학사의 본부터로 갔다. 경학사는 1911년에 민족의 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 농업을 장려하고 자제들의 민족교육을 하려고 세운 민간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이회영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은 국내에서 일본 감시가 너무 심해 중국 만주로 와서 독립운동 기지로 적합한 곳을 물색하다가 이곳의 토지를 구입하여 건물을 짓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나는 우선 이회영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엄청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가족 모두가 부유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사회지도층으로서 모든 기득권과 영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팔아 중국으로 넘어와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학교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신흥무관학교 터로 갔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이고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기관이다. 내가 처음에 거기를 갔을 때 나는 이곳이 신흥무관학교 터인지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그저 들판과 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도 항일전쟁에 민감하여 비속하나도 세우지 못해 정말 혼자 갔다면 거기가 신흥무관학교 터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 같다. 나는 많은 독립군을 배출해낸 중요한 신흥무관학교가 아무 흔적도 없다는 것이 매우 슬펐고 비록 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내 마음속 깊이는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7인열사 능원으로 갔는데 7인열사 능원이란 경신참변으로 인해 희생당한 한인 학교 교사들의 넋을 기리는 묘지공원이다. 내가 그곳을 가기 전 인터넷에 찾아보았을 때는 벌초가 돼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앞에 놓인 바나나가 말라 비틀어져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돼 있었다. 나는 그 당시 학부모님들이 추운 겨울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교사들의 시신들을 수습해 묻어주었다는 사실에 감동을 하였고 일본군이 비무장 상태인 학생, 교사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는 사실에 정말 화가 나고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 같이 묵념을 했는데 정말 꼭 기억해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국민부 본부의 터와 양세봉장군기념비를 갔다. 우선 국민부는 1929년에 결성된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단체이다. 국민부에서 남북만주 일대에서 분산적으로 활약하던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가 통합돼 남만주 지역의 정치, 전투 등 모든 것을 다 처리하고 심지어 조선혁명군도 만들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렇게 많은 활약을 한 국민부 본부터는 현재 한 공장으로 변해 있어 신흥무관학교와 같이 아무 흔적도 없어 매우 슬프고 아쉬웠고 국민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양세봉 장군은 바로 조선혁명군 사령관이고 조선혁명군과 함께 통화 전투, 흥경 전투, 영릉가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둔 분이다. 그래서 양세봉 장군 기념비가 있는데 원래는 국민부 본부에 건립했지만, 그 땅이 한족에게 넘어가면서 흉상을 지금 있는 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나는 너무 슬프고 다시 그 땅을 되찾아 돌려놓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노학당 기념비를 갔는데 노학당 기념비란 윤희순이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해 설립한 ‘노학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나는 거기서 윤희순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불쌍하면서도 엄청난 분이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 혼자 남아서 불쌍하신 분이라고 생각했고, 의병가를 만들어 여성들의 의병 활동을 독려해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셋째 날, 사정이 있어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의열비는 가지 못하고 무순 노천탄광을 갔는데 스케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탄광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다. 무순 노천탄광은 일본이 간도 지역을 청나라에 양도하는 대신 받은 대규모의 탄광이다. 1712년에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선을 두고 투먼강이 조선의 강인지 아니면 청나라의 강인지 논의가 되고 있었는데 일본이 갑자기 조선과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투먼강을 청나라에게 주고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탄광 개발권을 얻는다는 내용으로 일본과 청나라가 간도협약을 맺었다. 나는 일본이 자신의 땅도 아닌데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청나라에게 넘겨 어이가 없었고 화가 났다. 또한, 조선 땅을 팔아 자신들이 이익을 보아 더욱더 어이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무순 평정산참안기념관에 갔는데 정말 끔찍했다. 기념관에는 일본이 사람들을 산 아래로 모이도록 한 후 평정산 위를 에워싸서 3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해 무고한 촌민 3천 명이 숨을 거둔 사건이다. 그곳에는 평정산 순국 동포 기념비와 그 사건의 유골이 영구히 보전된 진열관이 있었다. 유골 중에는 모자가 꽉 끌어안고 있는 것도 있었고 뇌가 파손된 것도 있었다. 특히 그때 남자들은 탄광에 있어 대부분 여자와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총격을 가했다는 것과 증거를 없애려 불태우려 했던 기름통이 있어 더욱 화가 나고 슬펐다.

나는 이 항일유적지를 다녀온 후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이 들었다. 우선 이 사건 모두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독일과 다르게 사과하지 않는 일본이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몇 곳은 유적지가 잘 보존이 돼 있었지만 몇 곳은 흔적조차 없어 슬펐고 강의로 들을 때보다 직접 보고 그 현장에서 들으니까 더욱 이해가 잘 되고 와 닿았다. 그분들 덕분에 생긴 지금의 ‘대한민국’에 매우 감사하다. 내가 지금 걷는 길이 그 당시 그들이 걸어온 길이라 생각하니 매우 영광스럽고 존경스럽다. 절대로 잊지 말자.

역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연결고리
- 김상규(선양한국국제학교 10학년)

11월1일, 11월의 첫날 마지막 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바로 55인승 버스에 올랐다. 긴장되는 마음과 여행의 설렘이 섞여 느껴졌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 선생님들께서 이번 항일유적지 탐방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안전사항 등을 설명해 주셨다. 버스에서 발대식이 끝이 나고 버스는 계속 통화로 향했다. 가는 길에 버스 창문을 통해 보는 밤하늘은 너무 좋았다.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많은 별이 눈앞에 있으니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호텔에 도착하고 룸메이트 친구들과 게임도 하면서 기분 좋게 하루를 끝냈다.

11월 2일, 여행 2일 차 본격적으로 유적지 탐방을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유적지는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터였다. 유적지에 가면서 설명을 들어보니 그곳에서 땅을 얻기도 힘들어 열악한 상황에서도 항일을 위해서 노력하신 선조들이 대단했다. 그리고 현재 가치로 2조원의 전 재산을 항일을 위하여 모두 사용했다는 이회영 가족들이 인상 깊었다. 만약 내가 그 정도의 돈이 있다면 이와 같은 일을 했을지 상상을 해보았다. 설명을 들으면서 헤이그 특사 파견이 이회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바로 다음으로 간 유적지는 신흥무관학교 터이다.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보았고 많은 사람이 지원했다고 한다. 또한, 교실 간의 거리도 몇 킬로미터씩이나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경학사,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터를 다니면서 공통으로 들었던 생각은 역시 터라고 해서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넓은 들판들과 산들을 보며 우리의 중요한 유적지들인 것을 기억했다.

그다음으로는 7인열사 능원에 찾았다. 버스에서 내리고 몇 분을 걸어가니 나온 7개의 묘들.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그곳의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도 선생님들의 시체를 거두어서 묘를 만들어 준 학부모들이 당연하지만 멋있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점심을 먹고 국민부 본부 터로 향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됐지만, 아직도 그 자리가 남아있었다. 양세봉 장군 기념비는 특별히 더 인상 깊었다. 왜냐하면, 전에 학교에서 강연을 들었을 때 설명하셨던 양세봉 장군이 일본을 괴롭혔던 이야기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언덕에 멋있게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달려 마지막으로 노학당 기념비로 향했다. 독립을 위하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계기였다. 그리고 아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님밖에 없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11월 3일,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들의 첫 번째 일정은 무순 노천탄광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웅장한 규모의 탄광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탄광하면 동굴 같은 것을 생각했지만 이렇게 땅을 대규모로 파서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투먼강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탄광이 탄광으로서 의미뿐만 아니라 숙종 때부터 중국과 벌인 국경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통해 역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결돼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무순 평정산참안기념관이다. 이곳은 일본이 만주에서 한 민간인 학살의 역사를 볼 수 있던 기념관이었다. 기념관의 모양을 배로 하여 고인들을 편히 보낸다는 의미가 뜻깊었다. 그리고 백골관을 갔을 때는 그저 충격이었다. 수많은 유골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특히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유골, 두개골이 구멍이 나거나 부서져 있는 유골들을 보고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이 기념관을 끝으로 선양으로 돌아와 길고도 짧았던 항일유적지 탐방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보고 접하니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항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뜻깊은 탐방이었다.

중국에서 피 흘린 항일투사를 떠올리다
- 김건오(선양한국제학교 11학년)

11월 1일, 4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전날에 챙겼던 짐이 담긴 여행 가방을 끌고 학교 앞에 따로 주차된 대형 버스에 올라탔다. 짐을 넣고 자리에 앉아 기다린 지 몇 분, 버스가 마침내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출발한 지 십 여분이 지나고 도착 시간이 늦은 시간일 거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셔서 버스에서 간단하게 각 학년의 각오를 들으면서 발대식을 했다. 그리고 교감 선생님께서 이번 탐방의 목적을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다. 이렇게 본격적인 2박3일 간의 동북삼성 항일유적지 탐방이 시작됐다. 출발지인 학교에서 1차 목적지인 길림성 통화시까지는 약 4시간 정도가 걸린다 하여 1시간 정도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보냈지만, 그 뒤로는 미리 눈을 붙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고 나서 눈을 떠보니 몇몇 학생들이 카메라를 들고 밤하늘을 찍기에 창밖을 보니 바깥에는 도시의 네온사인 부재 덕분에 달과 더불어 수많은 별이 또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카메라로 담기에는 잘 찍히지 않아 기억으로 간직해야만 했다. 몇 시간 뒤, 마침내 통화시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 식사를 한 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텔로 갔다. 호텔은 또 어찌나 좋던지, 수학여행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 방에 짐을 풀고 시간을 보내다 첫 번째 날이 지나갔다.

두 번째 날, 아침에 눈을 뜨니 21층의 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침 풍경이 아름다웠다. 바로 나갈 준비를 하고 집합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니 두 번째 날 일정의 설명이 시작됐다. 첫 번째로 갈 곳은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의 터였다. 먼저 경학사는 1910년 말에 이회영의 다섯 형제와 안동의 유림이 가족을 거느리고 와서 토지를 개간하여 세운 독립운동 기관이다. 경학사의 의미는 말 그대로 농경과 배움, 주경야독을 의미한다. 이렇듯 경학사는 구국 인재를 양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두었는데 이 시설은 이후 접경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 되는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진다고 한다. 가까운 거리에 신흥무관학교가 존재하던 터가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 약 3000명의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훗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주요 인물로 활약을 한다. 더 나가서는 독립이 됐을 때 북한 쪽 대부분의 고위 군관들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의 터는 설명을 들을 때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안타까웠다.

이후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7인열사 능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일제의 무자비한 학살의 희생양이 되신 한인학교 교사 7명이 묻힌 곳이라고 한다. 당시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경로에 있는 마을들을 모두 초토화했다. 이곳에서 나는 절대 일본의 무자비한 행태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로는 만주지역의 대표 항일단체인 국민부가 위치했던 곳이라든가 만주의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이자 전신(戰神)이라 불린 양세봉 장군을 기념하기 위한 흉상이 있는 곳에 들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유관순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이신 윤희순 선생께서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해 설립하신 노학당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도 보았다. 두 번째 날 여러 군데에 분포한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보면서 느낀 점은 국내에서는 이런 유적지들이 잘 보존되고 있지만 이런 타지에 있는 조선의 항일운동 관련 유적지들은 생각보다 잘 관리가 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몇몇은 이미 건물이 없어졌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이후, 둘째 날은 숙소로 들어가 저녁에는 고기 파티를 하고 불꽃놀이를 하며 보냈다.

세번째 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밝아왔다. 원래는 조금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로 오전 스케줄은 모두 취소돼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의열비와 의암기념원에는 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바로 심양 근처 무순에 있는 노천탄광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보였던 것은 넓은 구덩이였다. 이 지역은 석탄이 비교적 얕은 위치에서 채굴이 가능하여 일반 광산과는 꽤나 다른 형태였다. 무순탄광은 조선이 청나라과 백두산 경계로 영토문제가 있던 때에 일제가 을사조약 이후에 멋대로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받은 탄광이다. 이후 점심식사를 하고 갔던 곳은 평정상참안기념관이다. 참고로 여기서 참안은 참혹한 일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그 참안은 9.18사변 이후 무순탄광에서 발생한 일본군 토벌에 대한 보복으로 평정산촌에 사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일제는 무고한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시체들을 한 곳에 모아 태워 사건을 묵살시키려 했다. 이곳에서 본 광경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당시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유골들이 그대로 전시돼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 아이와 엄마의 모습들이 그대로 백골로 남아 당시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았다. 또한 일제의 어마어마한 만행에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당시 일제는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지역에서도 이러한 만행들을 저질렀다. 실제로 화성 제암리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기념관을 나오면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많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며 나왔다.

이렇게 2박3일 동안 일정이 끝나고 버스는 SR 서문에 도착하며 탐방은 완전히 끝이 났다. 이번 여행은 여러 의미에서 잊지 못할 여행이 됐다. 왜냐하면 역사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여러 항일 유적지를 방문하고 그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아무 죄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알았고 중국 지역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어서 의미 있던 탐방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성장케 한 여행
- 김현수(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저는 더욱 성장했습니다.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저에게 있어서 굉장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 관하여 그저 학교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토대로 얇은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의 아프고도 아름다운 희생의 역사를 알 수 있어서 정말 유익했고, 또한 이번 연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를 보고 봉오동전투에 관한 속 내용과 봉오동전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밑 배경을 알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번 여행이 지금 우리나라가 직면한 커다란 숙제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현재, 일본이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사과는 물론이고 반성하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도로 대한민국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과거에 반민특위를 통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조금 더 확실하게 친일파를 청산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현재는 현재이므로 미래에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지금이라도 친일파 청산에 힘을 써 깨끗하게 만들어야 하고 또한 이 시국 속에서 다시는 일본인들이 대한민국을 얕볼 수 없게 선조들의 강한 정신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이번 여행을 갔다 와서 가장 본받고 싶은 두 분이 있었습니다. 그 두 분은 이진룡 장군님과 양세봉 장군님입니다. 이진룡 장군님을 본받고 싶은 점은 어떠한 고난이 와서 흔들어도 짓밟을 수 없는 굳은 애국심입니다. 자신을 길러주고 키워준 조국이 힘든 상황에 놓여있을 때 비록 조국에 있지는 않았지만 조국 밖에서 자신의 몸을 다 바치는 애국심이 지금 이 시국에 선양에 있는 어른만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국을 포함하여 조국 통일을 위해 외국에 거주하는 청소년들이 무관심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거운 가슴과 애국심을 갖고 조국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세봉 장군님 같은 경우는 민족과 이념을 초월하는 리더십을 본받고 싶습니다. 저의 진로가 비단 어느 한 집단만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갖고 있는 여러 집단을 서로 화합시키고 타협하여 평화로운 사회로 이끌어 나가는 평화와 번영의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본받고 싶습니다. 지금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이념 대립으로 분단 돼 있는 한반도를 이러한 양세봉 장군님의 리더십을 본받아 조국의 반 독립이 아닌 완전한 독립에까지 힘을 써 조국 통일을 이루어 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저희가 아는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등은 저희에게 잘 알려진 위인들입니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저희가 흔히 알고 있는 위인들만 이루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음지에서 이런 위인들을 밝게 빛낼 수 있게 했던 다양한 위인들이 세상의 빛을 못 본채 잊혀가는 현실이 굉장히 안타까웠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배운 위인들뿐만 아니라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위인들을 이제 양지의 따뜻한 햇빛을 비출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삶의 목표를 재설정할 수 있었던 계기
- 김희은(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힘든 몸을 뒤로 한 채 버스에 올랐고 3일 내내 열심히 달리고 달리며 그분들의 흔적이 남은 곳을 찾아다녔다.

우리의 첫 걸음은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였다. 마음 속 한가득 기대를 품고 갔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너무 놀랐다.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었고 너무 한적하고 추웠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나의 가슴은 아리어 왔고 차디찬 바람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그분들은 누구보다도 성실했고 자신보다 조국을 먼저 생각하는 깊은 애국심을 지녔으며 강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 가짐이 ‘대한민국’이라는 산물을 낳은 것이 아닐까 싶다.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한 조국광복을 이끌어낼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던 이회영. 대한민국의 시작은 바로 ‘이회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치욕을 주던 일본의 발달된 기술에 대적할 수 있도록 만든 이회영.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아팠을까? 그의 흔적이 남은 곳에는 뭐 하나 특별하게 남은 것 없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가슴 깊이 와 닿았다.

뿐만 아니라 양세봉 장군의 뚜렷한 목표의식은 나를, 우리를 더 강인하게 만들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목표를 향해 빠르고 강하게, 또 정확하게 나아갔다.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한 명의 리더로서 나의 편함은 버리고 그들까지 안고 가는 포용력. 때론 너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오직 조국 하나만을 보고 나아간 양세봉 장군의 마음은 공부로 인한, 꿈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마음이 지친 우리에게 새로운 힘이 됐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닮아 우리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리더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양세봉 장군이 원하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어린 학생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섰지만, 시간이 지나 우리 모두가 잘 컸을 땐 지금보다 더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찾아 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들이 만든 대한민국은 또 다른 내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의 내일은 우리의 손에 달렸고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렸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고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나라를 위한 것 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조국을 최우선으로 두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독립운동가와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작고 소중한 마음이 모인다면 어쩌면 정해져 있을지도 모를 대한민국의 미래를 우리가 바꿀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가 인정한 발전의 상징 대한민국. 우리는 끝까지 발전할 것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다.

비록 나는 조국의 땅이 아닌 중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아프고 힘들어도 이겨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들이 이룬 우리가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비록 큰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에 ‘나’라는 사람이 조금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또 다른 대한민국을 선물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잊지 못할 여행
- 이해빈(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이번 항일유적지 탐방을 끝으로 학생 신분으로서 떠나는 여행은 끝났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설렘이라는 불을 지펴주었다. 비록 2박3일 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번 여행은 수학여행보다 더없이 값지고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나는 크나큰 기대와 설렘을 안고 길림성 통화시로 가는 버스에 올랐고 장장 4시간을 달려 통화현에 도착했다. 첫날은 학교가 끝난 뒤에 출발했기에 별다른 일정 없이 바로 호텔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이번 유적지 탐방기간이 짧은 만큼 일정이 정말 촉박하다는 걸 알려주듯이 버스에서 눈을 좀 붙이려 하면 항상 다음 장소에 도착해 전날 호텔에서 노느라 잠을 충분히 못 잔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흥강습소와 신흥무관학교 터를 방문해 이와 관련된 이야기와 사건을 전해 들으니 나를 괴롭히던 피곤함을 씻은듯이 사라졌다, 특히 신흥무관학교 터에 방문했을 때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독립지사들을 계속해서 양성해 일본에 대항하던 신흥무관학교와 관련된 일화들을 들으니 독립군들이 정말 자랑스럽고 이들의 용맹이 내게까지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7인열사 능원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일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마구 휘몰아쳤다. 7인열사 능원은 간도참변 때 일본군에게 살해 당한 한인학교 교사들을 기리기 위한 묘지공원이다. 무덤 앞에 서서 간도참변의 희생양이 된 교사 분들을 생각하니 숙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하지만 촉박한 일정 때문에 오래 있지 못하고 여기서 받은 여운과 숙연함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이동해 양세봉 장군 기념비와 노학당 기념비를 보러 갔다.

양세봉 장군은 역사를 배울 때 익히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노학당을 세운 윤희순이라는 분은 처음 들어보는 인물이었다. 이 분도 당시 독립운동가 배출을 위해 노학당을 세워 교장을 맡으신 대단한 분이었다. 나는 이렇게 신흥무관학교와 노학당을 통해 학교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왜 이회영이나 윤희순 같은 분들이 돈을 털어가며 학교를 세웠는지 다시금 그중요성을 알게 됐다. 이렇게 촉박한 둘째날의 일정을 소화하고 우리는 드디어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민박집 형식이고 거기에서 캠프파이어도 한다는 소식에 나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민박집은 예상 외로 호텔방처럼 구성돼 있었고 게다가 짐을 풀고 나오니 마당에는 바베큐 파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불판과는 다르게 거대한 양의 삼겹살을 구워먹으니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삼겹살뿐만 아니라 감자와 고구마도 구워 먹고 폭죽을 사서 가지고 노니 나에게는 마치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았다. 나는 이렇게 친구들, 후배들과 좋은 추억을 쌓으며 보내는 금쪽같은 시간이 빨리 흘러가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금세 셋째 날 아침이 밝아왔다.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은 뒤 바로 무순 노천탄광으로 향했다. 노천탄광이 훤히 보이는 장소에 도착해서 탄광을 바라보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 광활한 풍경이 보였다. 정말 풍경만큼은 내가 역대 여행 가서 봤던 풍경들 중 손에 꼽힐 만큼 넓고 운치 있었다. 다른 산이나 강이 아닌 탄광의 풍경에 반했다는 게 조금은 내가 봐도 의아하지만 그만큼 장엄하고 멋있는 풍경이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제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평정산 참안기념관에 갔다. 가서 기념관 안을 보니 엄청 많은 유골들이 보전돼 있었다. 이 유골들은 일본군들이 평정산촌의 촌민들 3천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시체들을 숨기려 태웠는데 이때 미처 소각되지 않은 유골들이 평정산에 묻혔던 것이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정말이지 일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을 이 처참한 광경이 증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번 학생으로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통해 일제의 이러한 만행들을 우리 민족은 영원히 잊지 말고 항상 유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 더욱 나에게 배로 의미가 깊은 여행이 된 것 같아서 좋았다.

비석조차 세우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 박주원(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지금까지 내가 가본 유명한 관광지들은 그 지역의 랜드마크가 있고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었다. 이번 여행을 가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 있는 역사탐방은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표소가 있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멋진 공원에 역사적 건축물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역사탐방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사탐방이 시작된 이후, 나의 여행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과 완전히 다름을 깨닫게 됐다.

사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본 것은 비석들이 전부였다. 2박 3일 동안 차를 타고 내려서 비석을 보고 또 차를 타고 내려서 비석을 보고 이것만 반복했다. 유명한 관광지에 당연하게 있는 매표소 하나 없이, 그 드넓은 초원에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곳들을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달리는 여행이라니, 처음에는 힘들기도 하고 도대체 이게 무슨 역사탐방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나의 이런 생각이 얼마나 부족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됐다.

비석이 전부인 이번 여행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비석만 보러 여기까지 왔나 하며 투덜거리기 전에, 이 먼 곳에 비석밖에 놓을 수 없었을 우리의 과거가 갑자기 슬퍼졌다. 이번 여행에서 봤던 비석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이지 우리가 보러 가는 비석들이 박물관 안에 있고 정말 관리가 잘 돼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논 한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석뿐만 아니라 경학사 본부 터, 신흥강습소 터, 신흥무관학교 터 모두 관리가 되지 않아 사라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관리를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관리가 되지 않은 이유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다.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 관리를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우리는 관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석이나 학교 터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 땅에 위치한다. 우리나라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관리할 수 있겠는가?

다른 나라에 내 나라의 비석을 세우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중국은 분명 다른 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함부로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며 관리조차 못 하게 막았을 것이다. 그러면 남아 있지도 않는 흔적들을 찾아, 그리고 그 자리에 그 비석 하나를 세우기 위해 과연 누가 이렇게 노력했을까를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직도 이 주변에는 우리가 본 비석들뿐만 아니라 아직 세우지도 못한 많은 비석들이 있다고 한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의 해였다. 시간이 점점 흘러 우리의 항일유적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봐 걱정이 됐다. 더 늦기 전에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은데 비석조차 세우지 못하게 하다니 정말 속상하고 안타깝다.

만약 항일운동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면? 우리는 비석뿐만 아니라 박물관까지 만들어 엄청난 관리를 했을 것이다. 물론 일제의 탄압으로 우리나라 땅에서는 항일운동 자체를 할 수 없었으니 다른 나라 땅에서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 사는 것도 여러모로 힘든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항일투쟁을 다른 나라 땅에서 했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상상하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 우리나라 땅이 아니라서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많은 분들의 비석을 못 만들어 드리다니.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곳, 학교 터를 가보니 우리 민족들의 아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정말 큰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던 것 같다. 여행 중에 보았던 비석들 중에 ‘노학당 기념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바로 누가 생각나는가? 많은 사람들은 유관순 열사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유관순 열사도 엄청난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신 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관순 열사 외에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된 여성 독립운동가는 윤희순이다.

이 분은 유관순 열사와 좀 다르다. 유관순 열사는 우리나라 박물관이나 독립운동가 기념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독립운동가가 바로 윤희순 선생님이다. 엄청난 일을 하셨지만 아쉽게도 비석만 세우고 박물관이나 기념관 등 큰 건물들은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분을 더욱 기억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희순 선생님의 비석은 바로 ‘노학당 기념비’이다. 윤희순 선생님이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해 설립한 노학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라고 한다.

이 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왜 기억을 해야 하는지 중요한 몇 가지 사건들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윤희순 선생님은 춘천 의병장 유홍성의 장남 유제원과 결혼한 후 시재 당숙인 의병장 유인석의 영향을 받아 여성 의병으로 활약했다. 1911년 일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12년 남괴마자의 너른 들에 동창학교 본교인 ‘노학당’을 세워 교장을 맡아 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윤희순 선생님은 의병활동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신 아주 멋지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 땅에서 학교를 세워 교육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인데 학교에서 50명의 졸업생까지 배출하셨다니 미래의 선생님을 꿈꾸는 내가 정말 본받아야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위대하신 윤희순을 우리 모두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번 역사탐방은 나에게 정말 잊지 못할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역사탐방에 참여하지 못했더라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북지역이 우리나라의 역사의 혼이 깃든 중요한 곳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슴에 새기고 보존해야 할 우리의 항일유적지들을 우리가 관리를 하지 못하는 이 아픔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타국에서 목숨을 걸고 노력하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배웠던 사건들이나 중요한 인물들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느낀 이 감정들을 잊지 말고 꼭 기억을 해둬야겠다. 정말 좋은 기회였고 다시 가고 싶다.

항일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
- 이유정(선양한국국제학교 9학년)

우리는 경학사 본부 터, 신흥강습소 터, 7인열사 능원 등 중국 동북에 있는 항일운동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경학사 본부 터와 신흥강습소 터였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모두 우당 이회영의 일가가 지은 곳이다. 우당 이회영의 일가는 당시 10대 명문세가에 드는 굉장히 재력이 있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여섯 형제는 당시 약 300만원, 현재 약 600억 정도 가치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 300만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일가는 항일운동을 위해 그 재산을 모두 사용했다는 것에 나라면 과연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하게 됐다. 그들이 지은 경학사 본부는 당시 서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다고 한다. 100여 명의 가족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가서 그들은 학술을 연마하고 인재를 양성했다고 한다.

신흥강습소는 독립운동의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 설립한 무관학교인데, 우리는 신흥강습소의 터만 볼 수 있었다. 우당 이회영은 이곳에 학교를 짓기 위해 약 1년 전 종이 장수로 위장해서 이 동북삼성 일대를 다 돌아본 후 가장 일제의 간섭을 덜 받을 것 같은 곳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의 기후 조건을 잘 몰랐던 우당 이회영은 결국 후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로 이전하게 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은 신흥강습소의 학생은 약 40명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국내 식민교육을 완전히 배제했다고 한다. 우리의 항일운동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이곳은 현재 벽돌공장이 됐다.

역사 시간에 신흥무관학교, 신흥강습소, 경학사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역사의 현장에 가서 세세한 설명을 듣지 않았기에 그곳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 작년에 정말 좋은 기회로 나는 우당기념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우당 이회영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됐다. 그곳에서 들은 설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일가의 말년이었다. 대부분 전 재산을 독립자금에 사용했기 때문에 초대 부대통령이었던 이시영을 제외한 5명은 모두 굶어 죽거나 순국했다고 들었다. 그저 역사의 일부라며 흘려듣던 내가 이곳에 와서 그 현장에서 그분들의 업적을 들으니 과거 나의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조차 높은 벼슬이기에 명예와 지위, 그리고 부까지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불투명한 조선의 미래에 힘쓴 것이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 정말로 이회영 일가의 자금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했을 것 같다.

합니하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터에서도 그들의 정신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신흥강습소의 군사 교과를 보강하여 정식 군인을 양성했다고 한다. 이곳은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 등의 교육과정이 있었고, 이곳에서 30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 독립군들이 청산리대첩 같은 곳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조선식 무관학교를 다니다가 일본 무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 지청천은 대학교 2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을 하게 됐다. 이러한 일본의 무시를 이겨내고 일본의 최신식 교육을 보고 이에 대항할 교본을 만들어 훗날 청산리대첩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항일운동에 대한 역사를 배울 때, 지청천, 양세봉, 간도참변 등을 같이 페이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저 암기할 게 많다고 시큰둥하던 내가 정말 창피해지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설명을 들으며 나는 나의 어리석은 생각에 반성을 하고 우리 조상들의 그 피와 땀이 담긴 그곳에서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전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너무나도 귀한 이곳이 중국 정부로부터 그 터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담했다. 그곳은 단순히 터만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빠른 시일내에 그곳이 신흥무관학교 터였다는 것이 정확해졌으면 한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에서 멀리 가지 않아 7인열사 능원을 볼 수 있었다. 간도참변으로 인해 희생당한 한인학교 교사들의 넋을 기리는 묘지공원이다. 일제는 간도에 있는 독립군들을 소탕하기 위해 중국의 마적단을 사주하여 간도일본총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했다. 거짓 명분으로 일제는 일본군을 대거 보냈고, 독립군들은 깊은 산속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독립군의 본거지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일제는 몇 개월에 걸쳐 한인마을을 불태우고 식량과 재산을 약탈했다. 이때 희생당한 교사 7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인데, 나는 이곳에서 내가 정말 역사 속의 현장으로 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그 묘를 보며 어쩌면 지금 내가 이곳까지 걸어오고 심지어 서 있는 이곳까지도 불과 몇십 년 전 울음과 슬픔이 끊이지 않는 피바다일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무기를 들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도망가는, 그러한 곳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그런 마음이 들었다. 더군다나 묘비 앞에 있는 비는 검은색으로 변색이 되고, 누군가 올렸을 바나나가 말라비틀어진 것에 더욱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분들의 넋을 매번 기리지는 못하더라도 그분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으로 큰 변화가 오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가져 보았다.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온 국민부 본부 터, 이곳은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운동 단체이다. 이곳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금의 청와대 겸 국회의사당이라고 보면 된다. 국민부는 지금의 국가형태와 같은 형태를 띠었는데, 이는 국민부가 정치, 금융, 교육, 경제 등의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또, 이곳에는 이전에 화흥중학교가 있었다. 1929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국민부는 1934년 양세봉 장군의 죽음으로 인해 점차 흐지부지 사라지게 된다. 화흥중학교의 경우 후에 조선족이 운영을 하다가 한족이 마지막으로 운영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한족이 다니는 학교가 된 후 양세봉 장군이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양세군 장군의 흉상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됐다. 이렇게까지 조선혁명군과 국민부가 양세봉 장군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이유는 그는 청산리대첩 이후 연해주에서 독립군이 사라지게 되는데 양세봉 장군이 이 힘을 다시 모았기 때문이다.

양세봉 장군의 흉상은 그곳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었다. 1920~30년대 만주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을 기리기 위해 만든 흉상이다. 평안북도 출신의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18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가장이 됐다. 가난을 버틸 수 없어 이곳으로 왔지만 중국인 지주에게 소작 활동을 하는 것으로 연명했다. 후에 3.1운동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직접 본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들어가 차근차근 올라갔다. 그의 신념으로 그는 공산당, 한족들과 연합하게 된다. 양세봉과 연합군들은 여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그의 측근이 러시아에서 무기가 들어왔으니 보러 가자는 말에 가는 도중 뒤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 당시 양세봉 장군을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었던 일본군 때문에 양세봉 장군의 무덤을 평장으로 만들었지만, 다음 날 일본군이 들이닥치더니 양세봉 장군의 시체를 꺼내라고 했다. 양세봉 장군의 부하 장수가 못한다고 하니 부하 장수도 죽여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협박을 하는 일본군들 때문에 결국 가족들이 그 위치를 알려주었고 일본군들은 양세봉 장군의 무덤에서 끄집어내서 머리를 잘라서 저잣거리에 걸어 놓았다.

양세봉 장군을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선양하기 시작한 이유는 김일성의 아버지와 양세봉 장군이 의형제를 맺게 됐기 때문이다. 후에 양세봉 장군이 김일성의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북한을 만든 다음 양세봉 장군의 후손들을 초청한다. 양세봉 장군의 후손들은 김정은의 취임식에 참가했다고 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역사 속 인물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양세봉 장군을 검색해보니 다른 독립 운동가에 비해 그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짧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 나오는 조선혁명군과 그의 업적인 국민부 본부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할 항일 역사 중 일부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느 항일독립운동가들 만큼 양세봉 장군도 알려져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인 것 같다. 다행히도 이제 선양하고 있다고 하니, 하루빨리 이 분의 업적이 알려졌으면 한다.

우리의 항일운동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여성 독립운동가를 물어본다면 대부분 유관순 열사를 말한다. 하지만, 여기 ‘노학당 기념비’를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아주 대단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알 수 있다. 노학당 기념비는 ‘윤희순’이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해 설립한 노학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윤희순은 춘천 의병장 유홍석의 장남 유제원과 결혼 후 시재 당숙인 유인석의 영향을 받아 여성 의병으로서 그 이름을 떨쳤다. 1911년 일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그녀는 1912년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세워 교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5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녀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남녀노소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여성들도 할 수 있는 만큼 의병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당시 글을 모르는 여성들에게 이 뜻을 알릴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안사람 의병가>라는 노래를 통해 여성들의 의병 활동을 독려했다고 한다.

이곳으로 온 이후 시아버지와 당숙인 유인석, 남편도 죽게 된다. 아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말년에는 아들이 수배를 당하다가 아버지 제삿날 윤희순의 집으로 와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 헌병에게 잡혀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도 살았던 아들은 돌아와 엄마 품에서 죽게 된다. 그 모습을 본 윤희순은 곡기를 끊고, 끊은 지 11일 만에 그녀 나이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사람 의병가> 가사: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르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고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단순히 그 시대에 사회가 만들어놓은 여성으로서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 힘쓴 모습을 보며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변에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자신 혼자 남았을 때, 그 허무함과 공허함은 파란만장한 삶에서도 굳건히 지키던 그녀조차 버틸 수 없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아들이 자신의 품에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할 때 그 아픔은 정말 듣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웠다.

사실 나 역시 유관순 열사 외의 여성 독립운동가는 잘 알지 못한다. 알려진 사람만 안다고 해서 그 역사를 아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독립운동을 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빛을 보게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일제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예전부터 조선과 청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선으로 자주 다툼을 벌였다. 결국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상이 진행됐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움으로서 해결이 되는 것 같았으나, 이후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이주와 개간을 장려하면서 간도영유권 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자 동북삼성 일대를 통째로 내주고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대신에 무순 노천탄광 개발권과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우리나라의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된 이 일을 시작으로 광부들을 데려와 채광을 시켜 제2차 세계대전을 준비했다. 무순 노천탄광만으로 욕심이 안 찬 일본은 러시아의 사할린으로 광부들을 보냈다. 이때, 광부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가족까지 데려왔다. 하지만 러시아 부대가 일제의 석탄 선박을 침몰시키고, 일제는 탄광부들만 다시 모아서 일본으로 데려가서 일본 탄광을 시켰다. 일본으로 간 남편들을 기다리며 한 맺힌 마음은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옛날 노래에 담겼다.

탄광을 처음 봤는데,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라 더욱 씁쓸했다.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 동북삼성에 와서 살고 있었고, 간도참변도 생각 이상으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순 노천탄광의 크기는 정말 한눈에 압도당할 정도였지만, 전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씁쓸함이 먼저였던 것 같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무순 평정산 참안기념관에 갔다. 이곳은 일제가 만주에서 자행한 자원 약탈 및 민간인 학살을 확인할 수 있는 기념관이다. 9.18사변 발발 이후, 동북의 인민들이 일제의 채굴에 조직적으로 반기를 들자 일제는 수백 명의 일본군을 출동시켜 평정산촌을 에워쌌다. 그리고 사람들을 산 아래에 모이게 한 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총격을 가했다. 무려 3시간 동안 무고한 촌민 3천 명이 숨을 거두었다. 더군다나 일제는 시체에 기름을 붓고 만행의 흔적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미처 다 소각되지 않은 시체들이 평정산 아래에 묻혀 있다가 유해 발굴 과정에서 드러났다. 현재 평정산참안기념관은 실제로 당시 촌민들이 학살을 당한 그 위치에 설립했으며, 내부에 들어가면 백골관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일제의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전까지의 항일유적지들은 터나 묘, 기념비 등의 형태로 남아있는데, 이 백골관만 유일하게 그 현장을 가장 생생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분들이 희생당한 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 같아 마냥 보기만 할 수가 없었다. 또, 이렇게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 화가 나기도 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역사를 더 생생하고 자세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역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구나’라는 생각과 내가 오만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그들이 지금의 우리를 위해 노력한 만큼 우리도 그들의 대단함에 대해 알려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우리가 역사의 주인
- 장서연(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2박 3일 동안 중국 동북지역의 항일유적지를 찾아보았던 이번 여행은 나에게 여러모로 뜻깊은 여행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첫째 날, 늦게 출발하여 도착하자마자 숙소에서 지내야 했지만 가는 동안 그리고 숙소에서 우리가 탐방하게 될 지역들에 대한 사전 정보를 조사하면서, 그동안 책과 영상으로만 접해왔던 경학사 본부 터와 신흥무관학교 터 그리고 7인의 열사 능원 등에 대해서 상상해 보았다.

1910년대 서간도 지역 최초의 한인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던 경학사 본부는 아쉽게도 흔적만 남아 있었다. 밭 갈 경(耕) 자에 배울 학(學) 자를 써서 이름을 지은 경학사는 밭을 갈고 공부를 하는 조직으로 예전에 UCC를 만들면서 조사했던 이회영 선생의 흔적이 많이 묻어있는 곳이다. 신민회 간부들이 모여서 만든 이 경학사는 가장 먼저 무관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운영됐고,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면서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약 3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내었다. 이렇게 배출된 졸업생들은 이후 독립군에서 활약하며 청산리대첩 등을 이끌면서 독립 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비록 지금은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땅에 선 것만으로도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뜨거운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척박해 보이는 이런 땅에서 당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고 애쓰신 선조들의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애국심이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 방문한 7인열사 능원은 경신참변으로 희생당한 한인학교 교사 7명의 무덤이었다. 당시 학부모들이 직접 무덤을 만들어 준 것으로 이 먼 지역에까지 와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노력하시다가 참변을 당하신 선생님들의 큰 뜻과 노고를 느낄 수 있었다.

1929년 만주에 설립된 한인자치기관이자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던 국민부 본부 터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 국민부는 당시 만주지역에서 각기 세력권을 이루면서 활동하던 참의부와 정의부 그리고 신민부가 모여서 만든 통합 단체인데, 1929년 결성 초기에는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점차 길림성 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본부를 요녕성의 신빈현으로 이전한 뒤에 군사 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여 활동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활동을 전개하던 중에 당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었던 양세봉 장군의 죽음 이후에는 국민부 자체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활동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혁명군을 이끌면서 만주를 호령한 양세봉 장군의 흉상이 남아 있는 기념비를 방문해 보니 작년과는 다르게 관리가 잘 돼 있는 모습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같은 곳을 방문했을 때 군데군데 계단이 무너져 내리고 잡초가 무성한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는데 다행히도 보수가 됐는지 온전한 모습의 흉상을 볼 수 있었다. 당시 통화 전투, 흥경 전투 그리고 영릉가 전투 등 다양한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승하며 항일 독립 전투사에 큰 획을 남기었고, 중국의용군과는 한중연합작전을 펼치면서 국가와 이념을 뛰어넘어 노력하신 양세봉 장군의 정신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 후 우리는 여성의병장이었던 윤희순 의사가 건립해서 운영했던 동창학교 노학당 분교 터에 세워진 기념비를 방문했다. 양세봉 장군의 흉상처럼 작년과 다른 모습의 기념비에 놀랐다. 보수가 돼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노학당 기념비를 볼 수 있어서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 지도자로서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윤희순 의사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사망한 뒤에 아들마저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사망하자 11일 뒤에 장남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다.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거의 없던 그 시절에도 윤희순 의사는 독립 투쟁 전선의 최일선에서 활동했으나 그녀에 대한 평가나 예우는 불공평할 정도로 부족하던 중에 2008년 9월에 돼서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면서 그녀의 삶이 어머니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같은 여자로서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당시의 삶 속에서도 한 명의 한국인으로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갔던 그녀의 삶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기념비와 대조적으로 보이며 공허한 울림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2일차를 마무리 지은 우리는 3일차에 무순 노천탄광과 평정산참안기념관을 방문했다. 참안이란 참혹한 사안을 뜻하는 말로 1932년 9월 16일 일본이 당시 무순의 평정산에 약 3000여 명의 무고한 사람을 약 3시간 만에 몰살시킨 사건을 뜻한다. 일본의 잔학상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으로 기념관 내의 백골관에는 약 800여 명의 뼈가 그대로 보관돼 있으며 그곳에는 시체를 태운 목재라던가, 시체를 태우기 위해 사용됐던 휘발유통, 엄마와 아이가 바로 옆에 껴안고 있는 처참하기 이를 데 그지없는 흔적들이 보관돼 있었다. 기념관 내부의 천장과 벽면을 빼곡히 메운 당시 희생된 평정산 마을 주민 3000명의 이름과 백골관 내부의 그 흔적들을 함께 보고 나오니 일제 치하에서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끝까지 독립을 위해 노력해주었던 선조들에게 너무나도 감사했다.

이번 항일유적지 답사를 통해 독립운동가분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힘썼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더는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역사의 주인인 우리만은 이 역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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