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사달 난 뿌리교육 
[이영승의 붓을 따라] 사달 난 뿌리교육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9.12.31 16: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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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 들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는 것 같다. 내 자식도 예외는 아니다. 기회 되면 자랑스러운 조상내력에 대해 꼭 한번 얘기해 주고 싶었다. 수년 전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내 생일을 맞아 식구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다. 자식남매를 조용히 불러 앉혔다. 아내도 함께 있었다. 진지하게 강론을 시작했다.

그날 하고자 했던 강의요점은 내 조상 고성이씨(固城李氏) 시조 및 선조 몇 분의 인물사와 안동 낙향 유래 그리고 임청각 종손 석주선생의 독립운동사 등 이었다. 그런데 1막 강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남매가 모두 지루해하는 표정이었다. “어른이 말을 하는데 자세들이 뭐냐?”고 주의를 줬더니 반성하는 듯해서 다시 열강을 시작했다. 그러나 후반부 강의도중 나의 ‘뿌리교육’은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아들이 “아버지, 너무 길다고 생각지 않으세요?”하고 브레이크를 걸었으며, 딸도 이에 동조한 것이다. 내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자 아내가 아이들을 두둔하고 나섰다. 더 파탄나기 전에 내가 참아야 된다는 신호임을 모를 리 없다. 만장일치 의견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괘심하고 허탈했지만 화를 속으로 삼켰다.

세월이 흐른 후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날의 사달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었다. 내 열강에 스스로 도취되어 시간 배정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나도 젊은 시절에는 조상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퇴직 후 시간여유가 나니 관심이 조금씩 생겨났다. 종친회에도 나가고, 문중 제례행사와 조상 유적답사도 기회 되면 참석했다. 조상에 관한 문헌과 족보도 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 자랑스러운 조상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 마음을 자식들한테도 심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대했던 뿌리교육 특강은 나의 미숙한 준비와 과욕으로 중도에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중요한 과업을 한 번 실패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그때 제대로 말하지 못한 조상내력을 장시간 공들여 정리했다. 자식들한테 메일로라도 보내주기 위해서다.

- 시조, 황(璜): 일찍이 문과에 급제 후고려 덕종 2년(1033) 맹교위(猛校尉) 벼슬에 올랐고, 거란족 침입 시 세운 공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철령군(鐵嶺君) 봉호를 받았으며, 문종 17년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제수 받았다. 묘소는 알 수 없으며 경남 고성에 단소(壇所)가 설치되어 있다.

- 9 세, 암(행촌): 고려 충선왕 5년(1313)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정왕 때 좌정승,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에 올랐다. 공민왕 몽고 침입 때 왕을 호종하여 안동으로 피난한 공으로 1등 공신 철성부원군이 봉해졌다. 학문이 높아 단군세기, 태백진훈 등 명저를 남겼으며,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李穡)을 가르친 바 있다. 동국의 조자앙으로 불릴 정도로 글씨에 뛰어나 신라 김생, 조선 안평대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명필로 불린다.

- 11세, 원(용헌): 1385년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예조좌랑 등을 거쳐 조선개국 후 지평에 올랐고, 태조1년 좌명공신에 책록 되었다. 1403년 승추부제학 재임 시 고명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헌과 판한성부윤을 거쳐 경상도관찰사, 영상주목사를 겸직하며 철성군으로 진봉되었다. 그 후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세종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었던 그는 세종 3년 좌의정에 제수 되었다. 고성이문 씨족의 7할 정도가 직계 후손으로 중시조라 할 수 있다. 권근의 손자로 좌의정을 지낸 권람이 사위이며, 안동 영호루에 자작 한시 현판이 있다.

- 12세, 증(참판공): 단종 즉위년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진해. 영산현감 봉직 후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용헌의 6자이며 안동 입향조(入鄕祖)이시다. 안동으로 낙향해 정착하게 된 유래는 장인(이희, 이제현의 현손)과 연관이 있다. 경상도관찰사이던 장인이 안동 순찰 중 순직하여 안동에 묻히게 되었으며, 증도 장인의 경제적 기반지인 안동에 일시 기거하게 된 인연 때문이다. 당시 권세가이며 아버지의 사위였던 좌의정 권람의 고향이 안동인 것도 이곳 정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 13세, 명: 증(增)의 3자로 형조좌랑에 봉직했으며, 1519년 99칸의 임청각을 건립했다. 임청각 맞은편 낙동강 건너에 자리한 귀래정(임청고탑과 함께 안동팔경)은 개성유수를 지낸 증의 2자 굉(汯)의 정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원이 엄마’의 남편이 바로 굉의 직계 후손이다.

- 30세, 석주(이상룡):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국권을 되찾고자 조상 위패를 임청각 뒷산에 묻고, 300여 명의 종을 면천한 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많은 가산을 처분하여 1911년 백여 명의 식솔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22년간 처절한 독립운동을 했으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해를 환국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2년 74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석주선생 3대를 비롯해 10명의 독립운동유공자를 배출한 임청각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고 있다.

고성이씨는 안동유림과 인연이 깊다. 한양의 권세가이며 정승의 아들인 이증(李增)은 안동에 낙향해 살면서 지역 명망가들과 상부상조 결속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1478년 결성한 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계모임인 ‘안동 우향계’인데 1903년까지 425년간 지속되었다. 최초의 우향계 계원은 이증 외 4개 문중 12명(안동권씨 3명, 흥해배씨 4명, 영양남씨 4명, 안강노씨 1명)이었으며, 계첩에는 계원명단, 좌목, 시첩 등 여러 사료와 당시 대문호였던 서거정의 축시도 담겨있어 귀중한 문화재로 인정받는다. 원본 하나가 봉화 유곡리 권벌 종가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임청각은 타 문중과 맺어진 인연도 깊다. 달성서씨 중시조격인 약봉(서성)의 외가가 임청각이며, 이곳에서 태어났다. 약봉의 부친 서해(권근의 외손자, 서거정의 현손)는 17세에 임청각을 지은 명(洺)의 5자 무남독녀(맹인)와 결혼해 약봉을 낳은 후 23세에 요절한다. 맹모는 약봉 교육을 위해 분배받은 가산을 처분 상경하여 훈도에 진력, 명 정승으로 대성시켰다. 약봉 후손은 문과급제 121명, 정승 9명, 대재학 6명을 배출하는 등 명문거족이 되었으며, 맹모는 신사임당, 장계향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현모양처로 일컬어진다. 또한 임청각은 서애 유성룡 선생의 형님인 겸암 선생의 처가이기도 하다. 겸암은 결혼 초기 유서 깊은 임청각에 살면서 학문을 연마했다.

내가 애써 요약해 보낸 조상내력을 자식들이 제대로 읽었는지 나도 모른다. 설령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걱정하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보게 될 것으로 믿는다. 나도 그랬으니 말이다. 세월이 흐른 후 다시 한 번 읽었는지 확인할 예정이다.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면 또 보낼 것이며, 조상에 관심을 보인다면 특강도 해주고 싶다. 애족은 결국 애국의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인류애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절대 사달나지 않도록 강의를 잘 하리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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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소 2020-01-06 17:11:34
역시 명문귀족의 후손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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