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단군세기는 정사(正史)다
[기고] 단군세기는 정사(正史)다
  • 정성남 환단역사문화연구소 부회장
  • 승인 2020.01.07 16: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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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이 낯선가? 하지만 사실이다. 여론 조사를 하면, 과반수가 “단군은 신화”라고 응답하는 시대에 살기에 낯섦을 이해한다.

하지만 최근에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그런 사정의 선두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인터넷 사이트이다. 그곳에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전문이 공개된다. 두 사서를 요즘 책의 글자 크기로 조판하면, 500페이지 한문책이 무려 1,500권이다. 정말 방대한 양의 사서이다.

흔히 쓰이는 단어를 검색하면, 수천 건에서 수만 건의 기사가 뜬다. 필자가 알바 4명에게 의뢰하여, 하루 5만 건 가까이 복사하여 축적하며, 5~10년간 내용을 정리할 생각이다.

필자의 첫 검색어가 단군(檀君)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단군이 104건의 기사에 나오는데, 모두 실존 인물로 나온다. “우리 동방의 시조(始祖)”라는 서술이 제일 많고, “도읍을 정했다” “천 년 이상 지속된 나라(실제로는 2,096년)” “서거했다” “국왕이라 칭했다” “해외에서 나라를 세웠다” “요와 함께 섰다” “개국 연도가 언제다” “옷과 신 등 유물이 남았다” “법을 시행했다” “음식과 거처의 예를 정했다” 등 모두 실존 인물로 나온다.

특히 세조실록에 단군의 신위(제사에 쓰는 지방(紙榜))를 “시조 단군(始祖 檀君)”으로 바꿨다는 기사가 나온다. 제 나라의 사서에 “첫 조상 단군”이라고 나오는데, 학교에서는 “단군은 신화”라고 가르치는 나라가 한국이다. 정말 웃기는 나라이다. 또 “시조 단군(始祖 檀君)”이 전혀 보도되지 않는다. 국사학자들이나 언론이나 국민을 가지고 논다. 모두가 엉터리인 나라, 그곳이 한국이다.

승정원일기 중 영조와 신하의 문답이다. 영조가 “단군 때의 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라고 묻자, 신하 김종수가 “아들 부루를 하나라에 보냈던 문적이 있다”고 답하고, 영조가 “그건 기록에 실렸지. 됐네”라고 수긍한다(上曰, 檀君時, 有可證事蹟乎? 鍾秀曰, 七年, 有遣子扶婁朝夏文蹟矣. 上曰, 此則載錄, 無妨矣). 영조가 다른 증거를 기대하며 물었던 듯하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얘기가 나오자, “됐네”라며 화제를 마친다. 이처럼 영조와 신하들이 모두 단군세기를 읽었고, 단군 조선의 정사라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이 왜 그것을 모르나? 단군세기가 태조, 태종, 세종 연간에 심한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와 명나라가 아주 험악한 사이였다. 명나라가 “정벌하겠다”고 우리나라를 위협했고, 상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우리 사신 3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아주 험악하게 나왔다. 정도전은 그에 맞서 “요동 정벌”을 공언하며 군대를 훈련시키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정의 관리들이 명나라의 침공을 심각하게 걱정했으리라.

단군세기 중 왕검 단군 조에, 중국 대륙의 북쪽 절반이 우리 땅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또 중국 대륙에 분조를 뒀고, 순임금이 감독하도록 했다는 기사도 나온다. 그런 기사를 중국이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큰일 난다. 단군세기의 사본들을 민가에서 모두 거둬들여 불태워야 한다”는 신하들의 걱정이 커졌고, 임금이 결국 동의했다고 본다. 그러니 단군세기는 기사의 내용 탓에 그처럼 우여곡절을 겪을 운명이었다. 냉정히 말해, 단군세기는 대한민국 전에는 읽힐 수 없는 책이었다. 대한민국에서나 읽힐 사서였다.

그런 우여곡절을 현대인이 모른다. 그래서 “단군세기가 단군 조선의 정사이다”는 주장에 냉소한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세조실록 중 “시조 단군(始祖 檀君)” 네 자와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영조의 말, 즉 “단군왕검이 아들 부루를 하나라에 보냈던 일은 기록에 실렸지. 됐네”라는 말을 고려해야 한다. 그 두 기사는 단군세기를 단군 조선의 정사로 봐야만 납득할 수 있다. 단군세기가 단군 조선의 정사가 아니라면, 저 두 기사를 해명할 수 없다. 두 기사가 웅변한다. “단군세기는 단군 조선의 정사이다.”

단군세기가 우리나라의 첫 정사가 아니라 두 번째 정사이다. 우리나라의 첫 정사는 배달유기로, 역시 현존한다. 우리나라 역사 시대의 첫 나라였던 배달이 존속 기간 내내 사서를 지었다. 그 사서를 바탕으로 단군 조선의 초기에 배달의 정사를 편찬했다. 이름이 배달유기이다. 배달유기가 그 후 계속 전승되다, 세종의 재위 시에 발견되어 한역됐다. 배달유기의 한역본이 현존한다. 그런데 일제가 근대 조선의 조정 내 문헌을 모두 훔쳐 가서, 배달유기를 당장 읽지는 못한다.

우리나라 역사 시대의 첫 정사이며,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사서인 배달유기를 찾아내어 한역하고도 세종이 공포하지 않았다. 근대 조선의 두 사서에 그런 기사가 없다. 세종이 대신 이순지에게 천문류초(天文類抄)를 편찬하라고 지시했는데, 그 천문류초에 배달 시대의 오성결집이 나온다. 기원전 2470년의 오성결집이 나오는 천문류초를 편찬하라고 지시했던 세종의 의도가 무엇일까?

“배달유기를 찾아내어 한역했다”는 암시이다. 이를 봐도 알 수 있다. 태조, 태종, 세종 연간에 우리나라와 명나라가 아주 험악한 관계였다. 그래서 조정의 관리들이 전쟁의 발발을 심각하게 걱정하며, 명나라의 심사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했다. 배달유기의 발견과 한역을 공포하지 않았고, 단군세기의 사본들을 민가에서 모두 거둬들여 불태우는 쇼까지 벌였다. 그런 처사의 여파가 몇 년 전까지 지속되며, 학교에서 “단군은 신화”라고 가르치는 사태로까지 악화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근대 조선의 두 사서의 전문을 공개하며, 비로소 그 여파에서 벗어나는 돌파구가 생겼다.

우리 역사의 진실이 명료하다. ① 우리나라 역사 시대의 첫 정사이며,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사서인 배달유기가 현존한다. ② 단군 조선의 정사인 단군세기가 현존한다. ③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서를 통일 신라의 조정이 고려본기(高麗本紀), 백제본기(百濟本紀), 신라본기(新羅本紀)라는 이름으로 한역했고, 모두 현존한다. ④ 앞 다섯 권의 사서를 일제가 모두 훔쳐 갔다.

최근에 크게 달라진 사정의 두 번째가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의 부활이다. 우리 조상들이 5,916년 전부터 배달유기를 기록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말의 기록이었다. 인류 최초의 문자가 5,1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출현했는데, 우리 조상들은 그보다 약 800년 일찍 기록을 시작했다. 단군세기는 4,351년 전부터 기록됐다. 이것이 사실인데, 온 민족이 옛 기록 방법을 망각해서 큰 혼란이 빚어졌다. 우리 역사를 둘러싼 논란도 현대인이 사운드 코드 기록법을 망각한 탓이 크다.

사운드 코드 기록법이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이었다. 잠시 설명한다. 궁, 상, 각, 치, 우 등 5개 음이 매듭으로 기록되는 새끼줄 2가닥에서 25개의 사운드 코드가 나오는데, 각 코드에 기역, 니은, 디귿 등의 값을 줘, 말을 기록했다. 각 코드의 값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몇 년 후에나 밝혀낼 듯하다.

한 달 전에 사운드 코드의 값을 하나 알았다. 승정원일기 중 영조와 신하 사이의 대화에 나오더라. 구절(句絶), 즉 한글의 쉼표나 마침표에 해당하는 사운드 코드가 “궁궁+궁궁+궁궁”이었다.

그 기사의 원문이다. “신하 수봉이 말했다. 여섯 개의 궁을 세워 구를 끊어 읽으면, 환합니다. 일제가 말했다. 여섯 개의 궁을 세워 구를 끊어 읽으면, 문장의 의미가 나으며, 저는 억설을 늘어 놓지 않겠습니다. 임금(=영조)이 말했다. 여섯 개의 궁은 어떤 직이고, 어떤 위인가?” (臣壽鳳曰, 以立六宮, 句絶以讀, 則可曉然也. 日躋曰, 立六宮句絶以讀, 則文義似勝, 而臣不敢臆說以陳矣. 上曰, 六宮是何職何位耶?)

“구를 끊는다,” “읽는다,” “문장의 의미가 낫다” 등이 모두 글의 읽기와 관련되며, 그 글은 “여섯 개의 궁 음을 세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운드 코드 기록이었다. 구절의 사운드 코드가 “궁궁+궁궁+궁궁”이라는 위 기사가 사운드 코드 기록법이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이었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사운드 코드 기록의 명칭에 암호(暗號)를 뜻하는 한자가 쓰였다. 사운드 코드가 옛 사람들에게 암호처럼 여겨졌으리라. 신라의 비기(祕記)나 고려의 비서(祕書) 중 비(祕)가 그런 예이다. 근대 조선의 등록(謄錄)의 등(謄)도 그런 예이다. 배달유기의 유기(留記)는 “머무는 기억”이라는 뜻이다. 배달 시대에나 쓰였던 명칭이라고 보라. 단군세기의 세기(世紀)는 단순히 편년체 사서라는 뜻이다.

신라가 비기 밖에 향악(鄕樂)이라는 명칭도 썼다. 향악이 우리나라의 음악을 뜻하는 용법이 압도적으로 많으나, 사운드 코드 기록을 의미하는 극소수의 용례가 있기는 있다. 고려에서 내서(內書), 고기(古記), 언전(諺傳) 등의 명칭이 쓰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고기가 사운드 코드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근대 조선에서는 종이가 흔해져서 우리말의 사운드 코드를 종이에 많이 기록했다. 결승의 새끼줄을 선으로, 새끼줄의 매듭을 점으로 인쇄했다. 또 결승의 선만 목판으로 인쇄하고, 수작업으로 점을 찍는 방식이 널리 쓰였다. 개인이 편지를 쓰거나 메모를 할 때에 유용했으리라. 근대 조선에서 사운드 코드의 종이 기록이 보통 서계(書契)라고 불렸다. 조정 내 문서 다수가 우리말 사운드 코드의 종이 기록이었는데, 등록(謄錄)이라고 불렸다. 현대인이 보게 될 우리말 사운드 코드의 기록이 이 등록이다. 현재 필자가 국민에게 보여 주려고 등록을 찾는다. 전통적인 사운드 코드의 새끼줄 기록은 초기(草記)라고 불렸다.

필자가 읽는 근대 조선의 두 사서에 초기와 등록이 아주 많이 나온다. 초기의 초(草)가 홀로 쓰이거나 또는 다른 한자와 결합하여 갖가지 의미를 표현한다. 근대 조선의 두 사서에 풀 초(草) 자가 나오면, 우리말 사운드 코드의 새끼줄 기록이라고 보라. 현대어에 풀 초(草) 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있는데, 현대인의 엉터리 해석이기 쉽다. 나중에 필자의 “근대 조선의 우리말 새끼줄 토와 종이 토”에서 상세히 설명하겠다.

필자가 2년 전에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은 새끼줄 악서”라는 책을 발간했다. 사운드 코드 기록법을 우리 역사 서술의 맥락에서 충실히 설명한다. 그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아, 사운드 코드 기록 시대의 종료를 서술하지 않았다. 영조의 1762년 명령에 의해 강제로 종료됐는데,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영조가 사운드 코드 기록의 시대를 강제로 종료시켰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이 1446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문서의 시대가 가능해졌으나, 백성이 습관적으로 토(우리말 사운드 코드의 기록이 “토”라고 불렸다. “말 끝마다 토를 단다”의 그 토이다)를 계속 썼다.

300년이 지나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자, 영조가 강제로 종료시켰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 명령의 마지막 구가 “알기 어려운 일을 잇기 위하여(蓋因胤玄事也, 개인윤현사야)”여서, 강제 종료에 힘을 실어 준다. 둘째, 그 명령이 비기(祕記)의 중의가 낳았던, 단순한 오해의 해프닝이라는 해석이다. 비기(祕記)가 신라에서 사운드 코드의 새끼줄 기록이라는 뜻이었으나, 근대 조선에서는 소위 흉서(凶書)나 참위서(讖緯書)의 뜻으로 더 많이 썼다.

영조는 그런 흉서나 참위서를 처벌하려 했는데, 하급 관리들이 사운드 코드의 새끼줄 기록 전체로 확대 해석하며, 사운드 코드 기록의 시대를 강제로 종료시켰다고 볼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사운드 코드 기록의 시대가 영조의 1762년 명령에 의해 강제로 종료됐음은 사실이다.

필자소개
정성남 환단역사문화연구소 부회장,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미국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커뮤니케이션 아트 석사
저서 <우리말의 옛 기록 방법은 새끼줄 악서>, <불역 논어, 불역 도마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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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와 2020-02-28 18:03:24
본 기사내용을 잘 읽었습니다.
우선 새끼줄악서라는 용어를 태어나 처음 접해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니 새끼줄악서라는 용어는 검색이 안됩니다.그시대에 통용되어 기록에 전하는지요? 아니면 저자께서 용어를 새로 창작하셨는지요?
새끼줄로 매듭을 지어 놓은것은 결승문자하며
결승문자라 명명한 그시대 학자 또한 어원정립의 잣대를 몰라 오류를 범하게되신것으로 새끼줄 악서라 하시는것은 결승문를 말하며 이것은 문자라고 규정될수 없는 것입니다.
즉 저자께서 연구하신 바가 맞다면 징소리 장구소리등의
음계를 규정한 음의표식입니다.
글씨(문자)는 바닥에 스크래치를 내어(긁어) 그린 그림의 약식을 문자라 하는것입니다.매듭방식은 고대 전세계에 존재했으며 문자의 발전단계에 있어 중간 단계라 보시면 됩니다. 조선글씨어원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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