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칼럼] 응답한 건 시대가 아니라 양준일이다
[대림칼럼] 응답한 건 시대가 아니라 양준일이다
  • 전은주(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02.0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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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이중성

한국사회는 요즘 ‘양준일 신드롬’으로 뜨겁다. 90년대 한국사회는 낯설고 이상한 가수였던 1969년생 ‘양준일’에게 돌을 던졌다. 한국어가 서툴고 영어를 마구 쓴다는 이유로 재미교포였던 그에겐 철퇴가 내려졌다. 그는 90년대 초반 파격적인 안무와 가사, 패션 감각으로 젊은 청중을 후끈 달구었지만, 당국은 그를 ‘선정적 퇴폐’로 몰아 방송 출연정지를 내렸다. 그런 그에게 아무도 노래를 주지 않았고 비자도 연장해주지 않았다. 출입국관리소의 어떤 직원은, “나는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다는 게 싫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이 도장은 절대 안 찍어줘! 너는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어!”라며 증오로 비자 연장을 거절했고, 그 20대 초반의 청년은 히트곡 몇과 궁금증만 남긴 채, 황급히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30년이 흐른 뒤, 한국사회는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 ‘20세기를 살아온 21세기의 천재’로 양준일을 다시 소환했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자신이 겪었던 모국에서의 아픔을 담담하게 얘기하는 양준이를 보며, 겸손하고 성숙한 그 모습에 손석희 앵커마저 미안함과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대중들은 그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듯 ‘양준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면 3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지금 이사회에는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었던 ‘스무 살의 양준일’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 만일 ‘22세기 양준일’ 이 등장한다면 세상은 선뜻 그를 열렬히 환영해줄까?

얼마 전, 여성의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설리는 악플러들의 온라인 ‘조리 돌림’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나치게 앞선 그녀의 여성적 권리는, 아직 많은 이들에게 포용 받기 힘든 ‘노매너’였던 것이다. 한때 ‘리틀 싸이’로 인기를 얻었던 십 대 소년 역시 다문화가정의 자녀라는 이유로 악플러들의 총알받이가 되고 말았다. 세상은 더 글로벌하고 더 자유롭게 변하고 있지만, 나와 ‘다르다는 것’은 여전히 ‘틀린 것’이 되고 너무나도 쉽게 적대적 공격의 대상이 되고 만다. 

물론 이제는 30년 전처럼 직접 무대를 향해 돌을 던지지는 않겠지만, SNS의 익명 뒤에 숨은 무차별 공격의 칼날은 더욱 예리해졌다. 지난 2019년을 돌이켜봐도,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성차별, ‘노키즈 존’에 관련된 아동차별, 지역갈등, 임대아파트, 다문화, 장애인 등등, 세상은 차별과 편견으로 넘치고 있다. 오히려 30년 전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세분화되고 잔인해졌다. 설령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도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선량한차별주의자』, 2019)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30년 전에는 응답받지 못했던 그가 50대가 되어 다시 세상의 부름을 받고 빛을 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를 찾은 사람

사라진 가수를 찾는 프로그램인 ‘슈가맨’에 양준일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과 미안함이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50대가 된 그는, 현재 미국의 한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매달 월세와 생활비를 걱정하면서 살고 있다. ‘슈가맨’에서 그를 찾았을 때도, 프로그램을 위하여 한국에 오면 그 며칠 사이로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망설이기도 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울컥했던 것은, 그가 안타까워 보여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담담했고 또 소박했기 때문인 것 같다. 다음날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가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슬퍼했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웃으면서, “저는 슬프지가 않았어요. 사실(현실)이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슬퍼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가 착함을 가장하지 않고 선량함을 위장하지 않는 것에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슬프게 본 ‘가난’을 그는 ‘사실’(현실)이라고 한다. 참 그랬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가난은 슬프고 궁상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사실(현실)은 그 자체로 소박해서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무엇 때문에?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왜 오랫동안 ‘가난’을 부족한 것, 숨기고 싶은 것, 모자란 것들로 규정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 했을까? 

양준 일의 30년 동안의 삶은 분명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도 표현했듯이 마치 롤러코스터 같았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투명인간으로 살았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가수의 꿈을 접으면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모국이 밉고 원망스러웠을 것이고, 실패를 거듭할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하며 자신을 미워하거나, “사람들은 왜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라며 사람들을 탓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나 좌절한 ‘비운의 천재’로 우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천재’들을 여럿 만난 적이 있다. 드문드문 만난 천재들의 등장은 모두의 부러움과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만난 그들은 대체로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가 되어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함께 시대를 탓하거나 안타까워하며 동정을 보내거나 손가락질을 하거나 당연하다는 듯, 이미 예견했었다는 듯 뻔한 반응들을 보였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지극히 보편적인 패턴이었다. 시대를 잘못 만났거나, 부모를 잘못 만났거나, 상사를 잘못 만났거나, 친구를 잘못 만났거나, 대체로 우리들의 ‘실패’는 늘 뭔가의 ‘탓’과 연결되었다. 오죽하면 얼굴도 보지 못한 조상 탓과도 연결할까. 특히나 천재로 불렸던 사람마저도 실패하는 ‘세상’이라면, ‘나’라는 개인의 실패 정도는 당연하다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스스로에 대해 위안거리로 삼기도 했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들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의 탓이나 외부적 상황 탓으로 돌려왔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악화하지만, 한사코 자신의 책임에서도 망치면서 살아왔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럴진대, 아주 잠시라도 인기의 중심에 섰던 스타라면 더더욱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어려운 삶을 살고 있더라도 “나도 한때는 잘나갔는데”라는 과거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 위치를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 거지로 살면서도, 어린 시절에 점쟁이가 왕이 될 상이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왕이 된 줄 착각하다가 죽을 때도 ‘짐이 붕어한다’며 죽었다던 이야기도 있지않는가! 

그런데 양준일은 그 패턴을 깨뜨린 채 귀환했다. 분명히 가난한데, 비참하지는 않은 사람으로! 그 이유는 그가 뉴스룸에서 했던 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의 실패를 바탕으로 미래를 가늠하는 그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비우고 버려내 고공 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살면서 나는 왜 존재하냐는 문제 마크가 매우 큰데, 나 자신의 편견을 버리기 위해, 노력을 생활처럼 해왔습니다”

자신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 위해 노역했다는 그 한마디를 그는 쉽게 했지만, 실천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나 생각에서는 좌절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면 될 것 같지만, 막상 힘든 현실이 닥치면 이 내용 기를 잃고 부딪쳐보기도 전에“안돼”, “못해!”라고 부정하기 쉽다. 그러한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이 어쩌면 자신에 대한 자신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그 한 겹을 벗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만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양준일은 어쩌면 자신의 허상을 비워냄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서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20대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욕심대로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을 걸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될 수밖에 없어.”

그는 결코 자신의 과거를 원망으로 채울지 않았다. 물론 그도 수없이 시대를 탓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 모국을 탓하고 자신을 탓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수시로 거침없는 증오와 원망이 그를 덮쳤을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비우고 버리는 행동을 통해 그는 매일 자신의 ‘현재’와 만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필연적’으로 다시 모국으로 돌아와, 그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자신에게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증명해냈다. 

우리는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난 안돼!”,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말을 가끔 한다. 과거의 실패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포기해버린다. 그 실패의 순간마저도 그때 자신의 실력으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완벽’했음을 믿지 않는다. 그가 한 것처럼 끝없이 ‘자기성찰’을 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현재에서 늘 도망쳐 팔자 탓, 세상 탓만 하다가 영원히 ‘2019년의 양준일’ 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열광해야 할 것은, 그의 노래나 춤보다도 그가 스스로 비워내어 얻은 ‘깨우침’이며, 그가 그의 ‘현재’를 찾은 일일 것이다. 비록 그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양준일의 귀환’은 우리가 받은 가장 멋진 선물이 될 것이다!

필자소개
전은주: 연변대학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객원연구원, 2008년 계간 ‘창작21’ 시인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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