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51] 프랑스에서 만난 허션(和珅)
[유주열의 동북아談說-51] 프랑스에서 만난 허션(和珅)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3.2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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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비상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국가적 거리두기도 일상화되고 있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다. 언제까지 일지 모르지만, 이웃 일본이나 중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됐다. 마크롱 대통령이 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 중이라고 선언한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가 텅텅 빈 것을 보니 불현듯 과거 프랑스 여행이 생각났다.

프랑스 여행에는 고성 순례를 빠트릴 수 없다. 현직에 있을 때 출장은 가끔 갔지만, 일정에 쫓겨 파리 시내를 둘러보는 정도로 끝날 때가 많았다. 수년 전 퇴직했기에 파리 시내 호텔에 느긋하게 머물면서 고성 순례를 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곳이 있었다.

파리에서 50km 떨어진 맹시에 보르비공트(Vaux-le-Vicomte)라는 고성이 있다. 성에 들어가면 건물이며 정원이 어딘가 본 적이 있는 인상을 받는데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모델이 된 브르비공트 성 위에는 전망대가 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천재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의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다. 보르비콩트의 성주는 루이 14세의 재무상 니콜라 푸케(1615-1680)였다.

푸케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두뇌가 명석하여 당시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의 신임을 받아 38세에 재무상이 된다. 푸케는 마자랭의 비호 하에 프랑스의 재정을 관리하면서 막강한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연로한 마자랭의 후계자로 부상됐다. 푸케는 당대의 최고 장인들을 동원하여 국왕 루이 14세가 거주하는 퐁텐블로 궁전을 능가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보르비공트 성을 지었다.

루이 14세는 부왕 루이 13세가 급서한 후 어린 나이(5세)에 왕이 됐지만, 모후와 마자랭의 섭정을 받으면서 마자랭에 대한 불만을 키워왔다. 1661년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왕권을 되찾을 기회로 생각했다.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자신감에 넘친 푸케는 세도를 과시하듯 집들이 명분으로 루이 14세를 초청했다.

보르비콩트 성에는 다람쥐 그림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서부지방 사투리로 다람쥐를 푸케(foucquet)라고 하는데 ‘다람쥐가 못 오를 곳이 어디 있겠느냐’는 의미도 있지만 푸케 집안의 발음과도 비슷하여 다람쥐를 집안의 문장(coat of arms)으로 정했다고 한다. “짐이 곧 국가다”라면서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연, 태양왕 루이 14세를 푸케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국왕으로 보고 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귀족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루이 14세는 후에 재무상이 되는 콜베르와 근왕 총사대 다르타냥에게 지시하여 공금횡령으로 푸케를 체포토록 했다. 루이 14세는 앙드레 르 노트르 등 보르비공트 성을 건축한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파리 교외 왕실의 사냥터 베르사유에 보르비콩트 보다 훨씬 더 크고 호화로운 궁전을 짓도록 했다.

루이 14세는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선왕 대에서 쌓아 둔 부(富)를 축내기 시작했다. 세금이 오르고 민중의 원성이 높아지면서 루이 16세가 단두대의 이슬이 되는 프랑스 혁명(1789년)의 싹을 키웠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베르사유’가 호화 궁전을 지으면서 일어나는 사건과 귀족 부인들과의 방탕한 생활 그리고 절대왕정을 구축해 가는 루이 14세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푸케의 재판은 국외추방으로 판결이 났지만 루이 14세는 종신형으로 바꾸고 이탈리아와의 국경 요새인 피네로르(지금은 이탈리아 령)에 투옥시킨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에 철가면의 이야기가 있다. 피네로르 요새에 갇힌 철가면 죄수가 푸케라고 한다. 루이 14세의 왕권 강화의 희생양이 된 푸케는 옥사할 때까지 20년간 철가면을 쓰고 복역을 했다. 보르비콩트 성의 지하에는 철가면을 쓴 죄수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도 비슷한 운명에 처한 인물이 있다. 베이징대학의 캠퍼스에는 웨이밍후(未名湖)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데 이 호수 주변은 ‘리틀 원명원’이라고 할 정도로 황실 원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호수는 본래 원명원의 일부인 숙춘원(淑春園)에 딸린 호수로 청조 건륭제가 총신 허션(和珅 1750-1799)에게 하사한 것이다. 허션은 호수 주변에 황실의 별서를 흉내 내어 사치스러운 건물을 다수 지었다. 웨이밍후의 호심도(湖心島)는 원명원의 봉래도를, 석방(石舫)은 이화원의 석방을 모방했다.

허션은 건륭제 외가와 같은 정홍기(正紅旗) 만주족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4개 국어에 능통했다. 건륭제를 알현코자 피서산장을 찾아간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특사 매카트니 백작은 자신의 일기에 허션의 외교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기록을 남겼다.

허션은 황제의 신뢰를 받아 30대 초반에 호부(재무)상서를 시작으로 6부의 상서를 고루 지내고 30대 후반에는 사실상 재상인 문화전대학사 겸 군기대신에 오른다. 건륭제의 허션에 대한 총애는 허션의 아들을 부마로 맞이해 자신의 사돈이 되게 할 정도다.

허션의 지나친 권세욕은 정세 판단력을 잃게 하여 건륭제의 아들 가경제의 질투와 분노를 일으켰다. 건륭제가 죽자 가경제의 명령에 의해 허션은 부정부패로 전 재산이 몰수되고 능지형(凌遲刑)을 받는다. 그러나 가경제의 여동생인 허션의 며느리 간청으로 비단 띠로 목을 매는 자진을 허락받았다. 허션의 몰수된 재산이 후에 가경제의 내탕금이 되자 사람들은 ‘허션이 실각하니 가경이 배불리 먹었다(和珅跌倒 嘉慶吃飽)’고 조롱했다고 한다.

베이징 시내 공왕부(恭王府)는 본래 허션의 저택이었다. 허션의 호화로운 저택은 몰수되어 공친왕의 왕부가 되고 그의 별서는 황실의 원림이 됐다가 의화단의 난 이후 미국 기독교 재단의 연경대학에 불하됐다. 현 베이징대학 캠퍼스를 연원(燕園)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연경대학의 캠퍼스였기 때문이다. 1949년 신중국 건국으로 연경대학은 중국에서 철수하여 하버드 대학의 옌칭스쿨(Harvard-Yenching Institute)’이 됐고 베이징 시내 홍루(紅樓)에 있던 베이징대학이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필자소개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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