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칼럼] 깨달음을 위한 시간
[대림칼럼] 깨달음을 위한 시간
  • 이미옥 재한조선족작가협회 이사
  • 승인 2020.05.29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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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봄에 ‘무문관(無門關)’이란 영화를 보았다. 세상과 문을 닫고 세 평 남짓한 방에서 무수한 세월을 하나의 화두를 붙잡고 보내는 스님들의 이야기. 실제 스님들의 3년 폐관 수행을 기록한 그 영화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웠지만 너무나 일상을 벗어난 이야기였기에, 스님들의 내면을 다 담아내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외부는 고요한 정적,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철저한 침묵이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벌어진다. 영화는 스님들이 삼년 폐관을 마칠 때까지 성실하게 그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지만, 스님들이 그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왔는지 상상하는 것은 온전히 관객들의 몫이었다.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 깨달음이라는 것.

삼년 폐관 수행 끝에 두 명은 중도탈락을 하게 되고 그중의 두 명은 고된 고행 끝에 암까지 얻게 되었다. 수행이 끝나고 11명의 스님 중 유일하게 인터뷰할 수 있었던 한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끝이 났는데 돌아보니 3년이란 세월이 안 보여요. 나라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게 하고. 원하는 것이 많은 지. 나를 없애지 않고서는 이 공부에 들어가기가 참 힘들겠구나···” 개봉 첫날 충무로의 한 극장에서 숨죽이고 이 영화를 보면서 여전히 가닿지 못하는 그들 내면의 깊은 심연에 또 한편 치열한 구도행위를, 나 또한 어느 生에선가 해 본 듯한 착각이 들어 문득 내 마음에도 깨달음을 향한 작은 방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세속적인 것들은 늘 바다생선처럼, 비린내를 풍기며 쉴 새 없이 반짝이며 유혹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 또한 덧없다는 것을 서른 중반을 넘기며 쓸쓸하게 깨달아 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사찰이라는 곳에 처음 가 보았다. 서울에서는 2시간 거리의 증평군에 위치한 미륵사라는 크지 않은 절이었는데 무려 22년 폐관 수행한 스님이 있다는 것이었다. 불교에 갓 입문한 친구 따라가게 된 거였지만 내심 떨리고 기대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스님이 도통하셔서 전생까지 봐준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생은커녕 어린 시절 기억마저 곧잘 잊어버리는 나한테 있어 “전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뼛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편이 되지 않을까. 뭐든 좋다. 인간은 늘 자신을 새롭게 들여다보기 위해 타자가 필요하고, 타자로서의 거울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법이니까. 스님은 내가 전생에 치열하게 수행한 여러 생의 삶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온 것은 돈과 명예 같은 것을 추구함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10년 동안 한 우물을 파온 학문도 아니라고 했다. 일개미처럼 부지런히 쌓아온 삶의 모든 역사를 부정해버리는 듯한 뉘앙스에 묘하게 쾌감을 느꼈다. “모든 걸 버릴 수 있는가?!” ‘버리고 싶다. 아니, 버릴 수 없다. 아니, 버리고 싶다. 다시 생각해보면 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도 버리고 싶다.’ 이게 무어란 말인가. 생각해보니 언어의 벽돌을 하나하나 쌓는 일도, 인생의 단계를 한 땀 한 땀 수놓아 가는 것도 얼마나 진부한 일이었단 말인가.

내 눈에 비친 허무의 그림자가 확인되었다. 다크 서클을 타고 내려 온 허무의 그림자가 어느새 발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허무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니체는 이를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양분한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말 그대로 어떤 일을 목적함에 있어 크나큰 허무함을 느껴, 삶은 무가치하다고 느끼며 결국 자신조차 지양해버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체념과 저항을 반복하면서 부정하는 행위를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능동적 허무주의는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 왔던 가치가 빛바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과정 또한 자신의 정신이 성장하는 하나의 발판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금껏 추구해 온 환상과도 같은 세계를 더는 좇지 않고 새로운 창조를 준비하는 힘이다. 허무주의가 발생하는 것또한 기존의 가치에 대해서 더 이상 수긍하지 못하는 ‘최고가치의 탈가치현상’으로 발생하는 것이니 자신이 납득할 만한 새로운 세상을 찾기 전에는 어쩌면 이러한 병리적 상태가 지속할 수 있다고 니체는 슬며시 경고한다.

니체는 사실,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그 결과 의미가 상실되어 인간이 어디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시대적 현상을 허무주의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시대적인 거는 개나 주라 하고, 내 허무함의 근원에는 늘 ‘죽음’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단순히 목숨을 다한, 물질적 소멸의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 모든 끝나가는 것들의 끝없는 순환에 대한 종결 같은 것이다. 시작하면서도 과정을 겪으면서도 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겨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의미를 창조하려는 창조력 자체가 간과되고, 실망이 지배적 상태가 <된다>. 하나의 ‘의미’를 믿지 못하는 무능력, ‘불신’”(프리드리히 니체, 『유고1887년 가을~1988 3월)』 p.42) 이것이 수동적 허무주의의 특성이다.

세상이 그랬듯이, 스님 또한 어떤 방식이든 새로운 길을 제시했지만 나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했다. 니체의 말처럼, 허무주의에 대한 질문은 사회가 갖다 놓은 것이라 해도 그 해답과 선택은 결국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지구행성에서 부여된, 세상에서 주어진, 사회에서 지켜져야 하는, 성공과 인정으로 이끄는 모든 권위에 대한 불신을 뒤로하고 새로운 과제를 찾아내는 일들 말이다. 그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또 다른 것에 쉬이 권위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들여다보는 자신의 조그마한 호흡에서 시작된다. 들이켜고 내쉬는 매 순간의 들숨, 날숨에서 비롯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새로운 목표가 없을지라도 완전한 연소를 통해서 ‘철저한 허무주의’의 바닥을 보았을 때 비로소 통찰하고 다시 열망할 힘이 생긴다. 그것이 화려한 조명이 있는 무대 위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무대 아래 지하 18층이든 우리는 모두 나아가고 멈춰있다 또 나아간다. 생성, 상승, 번창도 있지만, 쇠락, 퇴진, 소멸을 통해서 아파하고 죽어가는 것들 속에서 삶은 굴러간다. ‘스스로 긍정하는 힘’, 그 힘은 철저한 허무주의 끝에 오는 한 줄기 통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 아니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삶에 정답이란 없는 것처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깨달음에도 우리의 존재 양태만큼이나 무수한 길이 나 있다.

인사동에서 종각 가는 길에 걸어놓은 연등 행렬이 한 달째 내려지지 않는다. 부처님이 오신 날, 4월 30일에 하기로 되어있던 연등 행사가 코로나로 인해서 한 달로 연기되면서 연등도 계속 걸려 있는 것이다. 조금 전 뉴스에서는 그 연등 행사마저 취소되었다고 한다. 5월30일 이후면 사라질 저 아름다운 연등들, 시간이 가기 전에 오래오래 눈 안에 넣어두고 봐야겠다.

필자소개
이미옥 재한조선족작가협회 이사: 서울대학교에서 한·중 현대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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