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율 칼럼] 나의 창업스토리②- 역경을 어떻게 이겨 낼 것인가?
[이승율 칼럼] 나의 창업스토리②- 역경을 어떻게 이겨 낼 것인가?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 승인 2020.09.11 14: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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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산화력발전소 준공대비공사를 수행하면서 가장 부족하고 힘들었던 부분이 ‘돈’ 문제였다. 선급금을 일부 받아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 후 일을 공정에 맞춰 잘 추진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비축돼 있거나 아니면 조달 능력이 있어서 그때그때 자재 구매와 인건비 지출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내가 제일 못한 게 그 부분이다. 거의 맨몸으로 시작한 일이 되다 보니 늘 자금에 쪼들리고 궁했다. 집사람이 구해오는 ‘빚’으로 공사를 추진하면서 매월 말 기성이 나오면 이를 갚아주고 또 빌려오는 형국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의 일은 박수현 소장 팀이 잘해 주어서 아무 탈 없이 진척되고 있었지만, 사업자 처지에서 이들을 뒷받침하는 데는 무엇보다 ‘돈’ 문제가 제일 중요한 관건이고 골칫덩어리였다. 어찌 보면 ‘돈’이 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소원처럼 집사람에게 되뇐 말이 “우리 돈 벌면 집을 한 채 지어서 그걸 은행에 담보해 놓고 융자받아서 일해 봅시다” 였다. 매월 빚쟁이 눈치 보느라 여념이 없었으므로 ‘은행 돈’을 이용해서 마음 편히 사업하는 게 큰 소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만한 기회가 왔다. 3월 중순부터 시작한 아산화력발전소 공사가 여름을 지나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을 때다.

양재동 은광여고 후문 앞에, 예전에 장모께서 동생(막내 이모)을 위해 장만해준 조그만 집터(30평 정도 되는 땅)가 있었다. 처 이모부가 그걸 우리에게 팔겠다고 해서 인수하게 됐고 그런 참에 그 옆에 있는 40평쯤 되는 땅도 사들여 상가주택(1층: 가게 2칸, 2~3층: 주택) 형태로 신축하기로 계획을 세우게 됐다. 땅 매입비와 건축비용은 그동안 6개월 공사를 하면서 번 돈과 은행 융자금 및 세입자 전세금으로 어느 정도 충당할만했다. 건축 공사를 맡아줄 현장 팀은, 그 당시 우연히 만났지만, 대치동에서 집 장사를 하고 있다는 집사람의 중학교 동창인 분(A)이 추천한 일꾼들로 정했다.

9월 초에 건축 허가를 받고 그다음 주에 바로 공사를 시작했다. 터파기를 해 놓고 기초 콘크리트 작업을 마쳤던 날 밤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왔다. 두 내외가 사무실(영동시장 앞)에서 늦게까지 일한 후 집(역삼동 전셋집)으로 퇴근하려다가 현장이 걱정돼 양재동으로 가 보기로 했다. 밤중인 데다 비가 많이 오고 있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길가에서 한참 기다린 후에 합승하게 됐는데, 뒷자리에 남자분이 타고 있어서 내가 뒷좌석에 타고 집사람은 앞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양재동 쪽으로 가는 도중에 뒷좌석 승객을 무지개아파트에 내려 준 다음(집사람은 원래 앉아 있던 조수석에 그냥 앉아 있었고) 나만 잠시 차에서 내렸다가 도로 뒷자리에 앉아 양재동 현장으로 갔다. 은광여고 후문 쪽 길은 언덕배기 지형이다. 현장 부지도 언덕배기에 연해 있어서 경사지 부분을 먼저 굴착한 다음 건물 기초를 앉혀야 하는 그런 지형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너무 많이 왔기에 터파기한 후 기초 콘크리트 작업을 해 놓은 곳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염려가 돼 달려간 것이다. 그날 밤(1979.9.14) 우리 내외에게 큰 불행이 닥쳤다.

우산을 든 채로 현장 이곳저곳을 살펴본 다음 특별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택시(뒷자리)를 타고 양재동에서 역삼동 쪽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사람은 여전히 앞자리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길은 역삼동 쪽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 당시 영동대로 길 양쪽에는 버스 노선을 위한 분리대 화단이 조성돼 있었다. 밤 11시경 어두운 밤길이었다. 비가 집중호우처럼 쏟아져서 택시 기사가 그 분리대 화단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리막길이고 차도 없으니 속도를 좀 냈던가 보다. 경찰 진술에서 기사가 70km를 달렸다고 했지만, 최소한 80km 이상 달렸을 것이다.

택시는 분리대를 들이받고 도로변으로 튕겨 나가다가 가로수에 걸려 급정거를 한 상태가 됐다. 천만다행으로 사고 지점 바로 옆 도로변에 정형외과 병원이 있었다. 택시 기사와 나는 고꾸라져 있는 집사람을 끌어내 등에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차체 앞 범퍼에 얼굴을 부딪쳐 크게 다친 집사람은 그날 밤 입 주변에 8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빨도 4개나 부러지고 경추(목등뼈)도 크게 손상을 입은 중상이었다. 나는 뒷자리에 있다가 (어디에 부딪혔는지 알 수 없지만) 앞이마가 찢어지고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아! 그런데 지금껏 생각해도, 그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사람을 응급조치해 주셨던 그 의사 선생님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외과 의사라고 평하고 싶다. 80바늘을 꿰매는 과정에 찢어진 입술과 입 주위 피부조직을 어떻게나 정밀하게 잘 다지고 맞춰 주었던지, 그 후 1년쯤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보니 코밑에 약간 희미하게 표가 날 정도이지 남이 보면 전혀 모를 정도로 수술 자국이 깔끔했다. 그나마 얼마나 큰 다행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가지 않아도 될 공사 현장을 구태여 다녀오다가 큰 사고를 낸 자신을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불행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통사고 난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집사람 곁에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장모님이 병실로 들어오셨다. 얼굴과 머리통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딸자식을 내려다보시며 한참을 울고 나시더니 내게 불쑥 흰 종이 하나를 내밀어 보이셨다. 이게 웬일인가! 멀고 먼 일본 땅에 계시는 장인어른(재일 교포)께서 지난밤에, 그것도 우리가 사고 난 그 비슷한 시간에 심장마비로 운명하셨다는 전보 쪽지였다.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장모님을 뭐라고 위로도 못 한 채 입술을 깨물고 울기만 했다.

그 당시 우리 내외는 일 때문에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해서 시골에 혼자 계시는 장모님더러 서울에 올라오셔서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드려 역삼동 전셋집에서 함께 모시고 있었다. 아! 그런데 어쩌다 이런 불행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단 말인가! 한마디로 미칠 지경이 됐다. 어떤 검은 함정-인생의 험악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2.
사고 난 다음 날 곧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한 후 석 달 가까이 집사람과 같이 한 병실에서 지내다가 12월 초순 무렵 퇴원했다. 그동안 회사 직원들 십여 명 인원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일거리는 전혀 없었다. 이전부터 몇 가지 사업 건을 추진해 왔으나 회사 대표 내외가 장기간 입원하게 되자 협의해 왔던 모든 일이 중단되거나 다른 회사로 돌려졌다.

아산화력발전소 일은 박수현 소장이 잘 마무리해서 10월 중순에 무난히 준공검사를 마쳤다. 그러나 참으로 암담한 일이 발생했다. 12월 초 퇴원하는 대로 바로 양재동 건축 현장으로 달려가 봤다. 공사는 건물 뼈대만 세워져 있고 아직 지붕 상량도 올리지 않은 상태로 중단돼 있었다. 현장에는 집 지키는 노인 한 사람만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현장 소장이 어디 갔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

실은 우리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공사를 중단하려고도 생각했으나, 이미 벌려 놓은 일이고 또 집사람 동창생 되는 분(A)이 자기가 책임지고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니 그를 믿고 은행 통장까지 맡기게 됐다. 그런데 석 달 후 퇴원하고 나와보니 이 모양이었다. 겨우 수소문해 A를 찾아가 만났더니 도리어 우리를 보고 통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대치동에서 집을 몇 채 동시에 발주해 공사를 하다 보니 자금 사정이 나빠져 우리 돈까지 쓰게 됐다. 부득이 이번 겨울 지나고 봄에 집을 완성해 주겠으니 좀 참아 달라. 그리고 역삼동 전세 기한이 지나서 어디 갈 데가 없으면 자기 집에 와서 한두 달 있는 동안에 다른 전셋집을 얻어 주겠노라고 했다.

아이고! 참으로 암담했다. 그동안 아이들(2명)을 돌봐주신 장모님을 시골로 내려가시게 하고 우리 네 식구는 할 수 없이 A의 집에 보름 정도 머물러 있다가 나중에 역삼동에 방 한 칸(지하실 방) 월세 집을 얻어 나가서 그 혹독한 겨울, 참담하고 불행한 겨울을 지냈다.

봄(3월)이 됐으나 A는 차일피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일을 계속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회사 직원을 반으로 줄이고 아산화력발전소 준공 이후에 받은 공사 잔금으로 겨우겨우 회사를 운영했다. 어떤 이는, 특히 친가 부모님은 회사를 치우고 어디 취직이나 하라고 야단치듯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때 우리 내외는 결심했다. 죽어도 회사 문은 닫지 않겠다고! 더구나 아내의 전공을 살려보겠다고 세운 회사가 아닌가! 또한, 늦깎이 학생이지만 철학을 전공하면서까지 인생의 진실을 찾고 세상 속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 보겠다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내가 아닌가!

이 정도 고난과 역경이 있다고 해서 회사 문을 닫고 물러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게임’에서 영원히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은 굶어도 결코 회사 문은 닫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지키며 우리 두 내외는 다시 한번 창업한다는 마음으로 봄의 아지랑이 피는 언덕을 향해 올라갔다.

4월 중순부터 건축 공사를 재개했다. 모든 일을 직영으로 처리했다. 공사비는 우리가 오히려 통사정해 A로부터 받아낸 일부 현금과 명동에서 복덕방 하는 영감님의 알선으로 사채를 쓰기로 했다. 일꾼들은 박수현 소장이 소개해준 인부들을 공사 종류별로 맡겨서 시켰다. 처음 지어 보는 집이지만 그런대로 무난히 잘 지었다. 다만 공사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공기가 5개월이나 걸렸다.

9월 말에 입주한 다음, 집에 살면서 매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은광여고 후문 쪽 언덕배기라서 위치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집이 팔리지 않아 결국 겨울을 신축 주택에서 지내게 됐다. 그다음 해(1981년) 1월 초에 셋째 아이(현주)를 낳았다. 나는 한전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아산화력발전소 ‘턴 키’ 방식으로 삼천포화력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 설계업무에 주력했고, 집사람은 봄 시즌을 놓치지 않으려고 정원공사뿐만 아니라 농장 조성이라던가 시내 빌딩에 나무 몇 주 심어 주는 작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맡아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복리 이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일 년 정도 살면서 집을 팔아보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10월 말에 사채권자에게 집을 통째로 넘겨주고 나왔다. 그러고 나서 거처를 옮긴 데가 역삼동 연립주택단지 사이의 공터에 10평 규모로 지은 비닐하우스였다. 난생처음으로 비닐하우스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참담한 상태에서도 우리 내외는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엘리트 부부가 운영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결코 망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명적 자존심’도 있었지만, 이런 과정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신 분들과의 관계가 너무나 소중했다. 집사람의 교회 교우들은 물론이고 사업과 사회활동을 통해 만난 분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 주신 몇 분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그 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돈이나 명예보다 더 소중한 ‘사회적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또한, 고생해서 지은 집이지만 부채 청산용으로 털고 나니 돈에 매여 안달하던 마음이 많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비닐하우스 생활을 택했다.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빚지고 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기왕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유능한 사업가가 돼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고 또한 이웃을 위해 선하고 유익한 일을 하고 싶어졌다.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히려 밑바닥에서 벽공을 바라보며 심기일전해 새 삶을 살아 보자는 결단이 우리로 해금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게 하는 역설적인 계기가 됐다. 설사 그것이 ‘시지프의 고통’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고달팠다. 이년 기한으로 세를 얻은 300평 공터의 전면도로 쪽에 수목 전시장 형태로 상록수를 잔뜩 심어 놓고 그 나무들 사이로 샛길을 만들었다. 비닐하우스에 이르는 진입로였다. 뒤편 빈 땅의 한쪽 편에 비닐하우스를 지어놓고 전기와 수도는 담장 너머 옆집(태화연립주택)으로부터 공급을 받았다.

그리고 화장실은 유원지에서 쓰는 간이화장실 한 세트를 구해서 설치했다. 비닐하우스 안에 2평 되는 부엌을 칸막이로 막아 놓고 연탄 아궁이를 만들어 솥을 걸었다. 방바닥은 흙을 돋우어 온돌형으로 난방을 했으며 시멘트 바닥으로 마감한 후 그 위에 전기장판을 깔았다. 그렇게 해서 여섯 명이 한방에 자면서 겨울을 지냈다. 우리 내외와 아이들 세 명, 그리고 또 한 명은 아내가 무남독녀라서 외롭다고 장모님이 오래전에 세 살짜리 여식 아이를 입양해서 키웠는데, 그동안 대구에 있다가 장모님 대신에 갓난아이(막내딸)를 돌보려고 올라온 처제(당시 14살)다. 슬프지만 참으로 특수한 ‘실험적 인간조건’의 생활이 시작됐다. 더는 내려갈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인간의 실존적 진면목을 체험하는 긴박감이 몸서리치게 침습해왔다.

#3.
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아내는 봄철 공사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맡아놓은 일감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처제와 함께 아이들 셋을 데리고 뚝섬유원지로 놀러 갔다. 어린이날이라 이날 만큼은 특별히 아이들에게 부모 구실을 잘해 주고 싶어서다. 수양버들 숲이 우거져 있는 공터에 어린이 놀이터가 조성돼 있었다. 아이들에게 간식과 마실 음료를 사준 다음 자기들끼리 놀아라 해 놓고 나는 물가로 갔다. 물가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잔잔히 흐르는 물결 위에 햇빛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반쯤 감은 눈의 망막 위로 지난 세월에 겪은 여러 가지 사연들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되새겨진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연상됐다. 책에 보면, 강변에서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며 수많은 사람의 얼굴로 윤회해온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도 그와 같아서 수많은 사연의 얼굴이 윤회하며 현재의 나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갑자기 이 혹독한 인연을 끊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술김에?) 불같이 일어났다.

빈 소주병의 목을 쥐고 물가에 있는 돌멩이를 내리쳤다. 그러고는 깨진 병을 움켜쥐고 왼쪽 팔목을 찔렀다. 겁이 나서 깊이 찌르진 못했다. 그러나 깨진 병을 옆으로 긋기만 해도 정맥을 끊기는 충분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한참(1분 정도?)을 바둥대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어린아이 소리가 들려왔다.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니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막내딸(2살)이 땅에 엎어져 있고 (처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같이 놀던 아이와 부딪쳐 넘어진 것 같았다), 아들 둘(9살, 6살)이 그네를 타고 놀다가 동생이 넘어져 있는 곳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덩달아 튕긴 듯 일어나 달려갔다.

깨진 병을 그냥 물가에 집어 던진 채로…. 흙 묻은 얼굴로 울고 있는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이 어린것을 두고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가라는 생각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새 화장실에 다녀온 처제에게 집에 갈 준비를 하라 일러 놓고 나는 다시 아까 앉아 있었던 물가로 갔다. 깨진 병을 주워 모았다. 손에 상처가 나면서 피가 흘렀다. 영혼의 핏물 같은 슬픔과 회한이 뼛속 깊이 흘러들었다.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깨진 병 조각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 후 아이들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1982년 어린이날 행사(?)였다.

택시가 역삼동 수목 전시장 앞에 도착했다. 큰 애 둘은 학교(역삼초등)에 가서 좀 더 놀다 오겠다고 했다. 그리하라 하고 막내딸을 업은 이모와 함께 먼저 비닐하우스로 돌아왔다. 얼굴과 손발을 씻고 하우스 안에서 쉬고 있는데 담장 쪽에서 애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오는듯한 인기척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하우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큰 애 둘이서 막 담장에서 뛰어내린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너희들 왜 담을 타고 넘어왔냐고 야단치며 물었다. 그때 큰아이가 했던 말이 지금도 가슴에 못이 박혀있다. “아빠, 저 길로는 못 들어오겠어요.” 바깥 도로에서 비닐하우스 쪽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가리키며 울먹이던 그 말을 나는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다. 어린 마음에 비닐하우스에서 산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고 힘들었던 모양이다.

담장 건너 연립주택에 사는 것처럼 주택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가 담장을 타 넘고 들어온 것이다. 그때 비로소 알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가거나 밖에 놀러 갈 때도 늘 그렇게 담장을 넘어서 들락날락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어린이날), 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온 집사람과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연초부터 공사를 수주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었다. 비닐하우스에 산다고 주눅 들지는 않았다. 각오하고 나서니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태연하게 사람들을 만났다. 로비한답시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런다고 일(큰일)이 금세 손에 잡히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턴 키’ 방식으로 접근해 무상으로 설계해 주었던 삼천포화력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가 3월 초에 발주돼 도급업체인 한라건설로부터 지명입찰에 참여토록 요청을 받았었다. 결국, 돈이 될만한 식재 공사는 도급업체와 관계가 깊은 D 회사가 가져갔고, 우리 회사는 단종(식재 공사)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까다롭고 이윤이 박한 준공기념탑설치공사와 부대시설을 맡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한전 측에서 끝까지 도움말을 해 줘서 받았지 그러지 않았으면 이 일조차도 못 받았을지 모른다. ‘실력과 성의’라는 두 팻말을 달고 ‘실성’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내가 측은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 대견스러워 보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끝까지 의리를 지켜 주었고, 그럴수록 나는 일을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매월 2회 삼천포 현장에 내려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박수현 소장을 도와 작업을 독려했다. 그런 가운데 어린이날이 돼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에 다녀온 그 날 나는 자신의 불행보다 더 큰 자식들의 아픔을 깨닫고 부모로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됐다.

우리 내외는 열심히 일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철이 되자 일감도 제법 많이 늘었다. 한전 공사는 거의 나 혼자서 관리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일은 집사람이 직원들을 데리고 직접 실무를 맡아 일을 했다. 작업의 수준과 전문가적 역량이 점점 더 크게 향상하는 걸 느꼈다. 집사람을 칭찬하고 직원들을 격려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사내 분위기가 안정됐을 뿐 아니라 회사에 대한 주변의 신망도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 내외가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직원들도 함구했지만, 그 어떤 사람도 우리 하우스에 데리고 온 사람이 없다. 심지어 부모 형제들조차도 전혀 모르게 했다. 교인들만 몇 분 고정적으로 심방을 와서 기도해 주고 간 게 까짓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10월 초 추수감사절이 다가왔다. 토요일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책을 읽고 있는데 집사람이 “동엽이 저거 아부지요”라고 불렀다. 우리 내외는 쑥스러워서 서로 ‘여보, 당신’ 소리를 못 했다. 왜 그러냐고 반문하듯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집사람이 이렇게 찬찬히 말했다. “내일이 추수감사절인데,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안정이 됐으니 내일 추수감사절 헌금을 좀 하고 싶어요.”

그리하라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동안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집사람과 아이들이 교회 가는 걸 한 번도 막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착해서라기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보편타당한 철학적 상식에 따랐을 뿐이다.

그다음 날 저녁밥을 먹고 난 다음에 또 집사람이 “동엽이 저거 아부지요”라고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늘 교회에 추수감사절 헌금을 드렸고 그동안 몇 년간 제대로 헌금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마음먹고 좀 많이 했노라고 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집사람이 다시 한번 나를 빤히 쳐다보며 추궁하듯 말했다. “얼마 했냐고 왜 안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뭐 하나. 헌금했으면 됐지.” “그래도 한번 물어봐요” 그래, 얼마 했어?” 그러자 집사람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헌금…. 오백만원 했어요.” 나는 그 순간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내가 내 손을 잡아 이끌더니 “미안해요…. 고마워요”라고 하면서 눈물 젖은 얼굴로 내 품에 안겨 왔다. 말없이 눈을 감은 채 몸을 맡긴 아내를 엉거주춤 끌어안고 있다가 이윽고 나는 오른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입을 뗐다. “어쩔 수 없지 뭐. 우야겠노. 이미 헌금을 했다는데…. 잘했어. 잘했어요” 그때 헌금한 오백만 원은 당시 비닐하우스에 살며 어렵게 저축해 온 전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 밤 우리 내외는 또 한없이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었다. 아!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4.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해 추수감사절 이후 분명히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 가지 특이점들이 나타났다. 우선 한가지, 집을 이사하게 됐다. 10월 중순, 삼천포화력 준공대비공사를 마무리하느라 바빴을 때다. 삼천포 현장에 있는데 집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1년 가까이 우리에게 전기와 물을 공급해 주었던 옆집 태화연립 104호에서 자기 집을 사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는 거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일반시세보다 높지 않으면 무조건 사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다음 주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계약을 했고 두 달 후 12월 중순에 이사를 마쳤다. 비닐하우스 생활 13개월 만에 밑바닥을 딛고 정상적인 생활의 무대 위로 기어 올라온 셈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기쁘고 감사했던 것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새로 이사한 집에서 교회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일이다. 집사람도 그랬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행복감을 느끼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랜만에, 진실로 오랜만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즐겁고 기쁜 성탄절을 맞이한 것이다. 그날 우리 내외는 큰 애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특별한 제안을 했다. 아이들의 공부와 생활 습관 지도를 위해 가정교사를 채용해 주기로 한 일이다. 아이들은 물론 좋아했다. 다름 아니라 S대 공대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8촌 조카에게 미리 부탁했었다. 조카는 그 후 석박사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 아이들 셋을 잘 지도해 주었다. 우리 내외가 건설 분야 직업상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아서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는데, 조카가 함께 생활하게 됨으로써 아이들의 성장 과정과 훈육에 큰 도움이 됐다.

두 번째로, 10월 말경 오랜만에 현대건설 토목부에서 전화가 왔다. 바쁘지 않으면 한번 본사를 방문해 줬으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3년 전(1979년) 아산화력발전소 준공대비공사를 마친 후 그동안 특별한 프로젝트가 없었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친교는 계속해오던 참이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 봤더니 공무를 담당하는 P 부장이 울산에 있는 현대건설 영남지사(본사 토목부에서 관장)로부터 올라온 품의서를 보여 주었다. 공문을 보니 ‘부산충혼탑건립공사’의 하도급을 맡을 작업반(하도급업체)을 결정해 이른 시일 내 현장에 투입해달라는 요청이었다.

P 부장의 설명을 들어본즉슨 이랬다. 부산시가 발주한 대청봉공원화사업의 일환으로, 원래 용두산 공원에 있었던 충혼탑이 부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충혼탑은 대청봉으로, 경남도충혼탑은 창원으로 옮기게 됐는데, 부산시 지하철(1호선)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6개 도급업체가 성금을 모아 부산충혼탑을 건립해 헌납하는 일이었다. 이 공사의 수주를 전담했던 영남지사에서, 낙찰을 받은 후 처음에는 후속 공사까지 기대하면서 좋아라고 파티까지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작업반을 선정해 달라고 본사 토목부에 품의가 올라와서 알아봤더니 아무도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업체가 없었다고 한다. 공사 종류 상 건축부가 할만한 일이다 싶어서 본사 건축부로 이첩했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공사 자체도 힘들지만, 실행예산을 짜보니 도급계약금액보다 하도급 견적이 훨씬 더 많이 나와 적자 현장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공사내역 중에 화강석 판석 물량이 많아서 이를 대량 취급하고 있는 주택사업부에 협조 요청을 했으나 거기서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품의서를 도로 영남지사에 내려보내야 하는 시점에 아산화력발전소 준공기념탑공사를 했던 반도조경공사가 혹시 이 일을 해낼 수 있으려나 하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제안을 받고 며칠간 심히 고민했다. ‘현대’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도면과 공사 내역을 살펴봤더니 참으로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대청봉 꼭대기에 70m의 탑을 세우는 일로써 작업 여건이 최악인 현장이었다. 설계는 당시 김수근 대표(설계사무소 공간)와 쌍벽을 이루며 한국건축계를 이끌어 온 김중업 선생이 주력했던 작품이다. 나는 먼저 박수현 소장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도 무척 곤혹스러워했다. 내가 다그치듯 물었다.

“삼천포화력 인부들을 용병으로 쓰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 목수팀에다 대형 철물 구조물을 다루는 작업반을 갖다 붙이면 한번 해 볼 만 하지 않겠습니까?”
“일이야 하면 되겠지만……. 돈이 문제지요. 이 공사 백 프로 받아도 아까지(손해)납니다.” “손해나면 내가 나지 어디 박 소장님 보고 물리라 할까 봐서요?”

의사 결정을 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이럴 때는 나 혼자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불을 꺼놓고 곰곰이 숙고하는 버릇이 있다. 그날도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명상을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덜컥 들었다.

“현대건설을 이기는 일이 내가 사는 길이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더 이상 다른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정했다. 그다음 날 현대건설 토목부에 부탁해 영남지사에 연락을 취해 놓은 다음 다짜고짜 식으로 울산에 내려갔다. 그리고 영남지사장인 K 전무를 만나 이렇게 제안했다.

“현대건설이 수주한 금액의 90%만 받겠다. 100%를 달라고 하면 내가 도둑놈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모든 작업은 우리가 책임지고 할 테니 자재만 대 주고 기술적인 문제나 인력을 쓰는 등 공사 방법에 대해선 일절 간섭하지 말라. 이 조건이 수락되면 우리 회사가 이 일을 맡겠다.”

K 전무는 횡재를 만난 사람의 표정을 짓더니 내 손을 불끈 잡아 주었다. 당장 그날부로 계약을 맺었고 공사에 착공한 지 10개월 만에 준공했다.

현대건설로부터 받은 도움, 즉 아산화력발전소 ‘턴 키’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건설 인생의 새길을 걷게 된 것에 대한 그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은, 우리 회사가 현대건설보다 한걸음이라도 더 빨리 일하고 한치라도 더 앞선 기능으로 현장의 목표를 달성해 주는 것, 그것이 대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의 결과보다 동기를 중요시하고, 돈이나 명예보다 ‘일’로 깨닫는 성취감과 인간적 자긍심을 더 소중히 여기며 ‘가치 창출’하는 일이야말로 사회 속에서 최고로 아름답게 빛나는 선(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적 기개와 확신과 자유의지의 소산이 그 ‘어렵고 힘들고 돈도 안 남는 공사’를 맡아서 아무 탈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근본적 동력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때 나이가 우리 나이로 35세였다.

세 번째 이야기가 참으로 은혜로운 내용이 될 것 같다. 태화연립으로 이사를 하였고, 부산충혼탑건립공사를 착공한 그다음 해(1983년) 봄이다. 4월 중순 무렵으로 기억된다.

직원들은 모두 외출하고 집사람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문의 전화였다. 주택을 신축하고 정원공사까지 마쳤다. 그런데 집주인이 정원공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다시 보수공사를 하려고 한다. 지나가다가 수목 전시장 간판을 보고 전화를 했다. 이런 일도 귀사에서 해 줄 수 있느냐는 문의였다. 집사람은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온 분과 약속을 해 그다음 날 신사동 영동호텔 앞에서 만나 함께 논현동 주택으로 갔다. 회사 중간 간부직원 같아 보였는데 본인의 신분은 밝히지 않은 채 현장 안내를 마친 후 며칠 내로 보수계획안을 갖다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며칠 후 제출한 계획도면을 검토한 고위 인사가 곧 작업을 시작하라고 지시를 하셨다. 그때 맡아서 한 일이, 당시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의 논현동 주택 현장이었다. 전화를 걸어 왔던 중간 간부직원은 현장 소장 L 과장이었고, 고위급 인사 되시는 분은 건축부 최고 책임자인 K 부사장이셨다. 그 ‘우연의 접속’이 우리 회사의 진로와 발전에 일대 혁신을 이끌어 주었다.

논현동 작업의 결과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가 보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K 부사장께서 성북동에 있는 현대건설 영빈관 조경공사를 맡기셨다. 중동 출장을 다녀오신 정주영 회장께서 정원을 잘 꾸몄다고 칭찬을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후 현대건설 건축부에서 발주하는 대부분의 조경공사 하청 업무(직영공사는 물론 도급공사까지도)를 우리 회사가 도맡았다. 마치 건축부의 한 부서인 양 모든 일을 터놓고 기획하고 예산을 세우고 실행했다. 그렇게 10년을 일했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집사람은 이 모든 것을 순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의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어려운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을 지켜낸 집사람의 지극한 신앙과 헌신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일이라 생각했다. 1982년 추수감사절 이후 우리 집과 회사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희망과 도전, 감사와 회복이 넘치는 새 삶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5.
부산충혼탑(높이 70m)의 규모는 대단하다. 대청봉 정상에 약 400㎡ 원형의 인공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연못 위로 (여러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풍압을 대비해 설계한) 9개의 콘크리트 벽체(화강석 판석 마감)가 원형 열주(列柱)를 이루고 있으며, 그 열주의 상단에 브래킷으로 9개 벽체를 연결하는 링 콘크리트 구조체가 공중에 붕 떠 있는 형상으로 설치돼 있다(탑신부 39m). 그리고 그 링 콘크리트 내벽으로부터 9개의 갈빗대 형 철 구조물이 솟아나 하늘을 향해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여지고, 다시 그 위에 최상부 철탑이 3층 탑 모양으로 올라선 모습이다(상륜부 31m). 탑신 아래 연못 중앙에는 위패를 모신 반구형<돔>의 영령실이 있으며, 다리로 건너가게 돼 있어서 이승과 저승을 연결한다는 의미를 상징했다. 탑 공사도 시공하기에 엄청나게 어려웠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경 쓰인 구간이, 대청봉 공원주차장에서 충혼탑에 이르는 경사면 돌계단(폭 20m, 사면 길이 100m 가량) 작업이었다. 폭우가 오거나 세월이 지나도 그 돌계단이 침하하지 않도록 경사면을 안정시키는 기초작업이 매우 중요하고 험난했다. 여태껏 발주된 각종 메모리얼 타워 가운데 이토록 장대하고 웅장한 작품을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산봉우리 정상에 이토록 위험하고 난이도가 큰 구조물을 세워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이 공사 기간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무용담을 다 얘기하자면 밤을 새워야 한다. 그만큼 사연도 많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예를 들면, 탑신부 공사를 마친 다음 상륜부 철탑을 세울 때 헬리콥터를 사용하라고 권하는 부산시 관계자들의 건의를 조정하느라 애를 먹은 일(헬리콥터로 한강 올림픽대교 교각 상단에 조각 구조물을 설치하다가 사고 난 것을 기억해 보라)도 생각나고, 경사면 돌계단의 기초작업을 위해 백 개도 넘는 목 파일을 박은 일(몇 년 전 부산 출장 시 본 재단 이동탁 사무총장과 함께 거의 35년 만에 현장을 둘러봤을 때 한치의 침하도 없이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놀랐다)이며, 무엇보다 탑신 최상부 3층 탑 용접공사를 하다가 인부 한 명이 떨어져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9개 갈빗대 형 철 구조물을 끌어 올린다고 쳐놓은 와이어 줄에 한쪽 팔이 걸려 살아난 일(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내려갔을 때 그 인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3일 밤낮을 잠만 자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요 장면을 보듯 선명하게 기억된다.

준공식 하루 전날 밤이었다. 경내 모든 구간의 청소를 깨끗이 완료해 놓고 박수현 소장과 작업반 팀장들을 불러모아 음식 대접을 한 다음, 나 혼자 소주병 하나를 들고 충혼탑이 서 있는 대청봉 정상으로 올라갔다. 검은 허공에 (화강석 판석 색깔이 희므로) 허옇고 우람찬 로켓형 우주선이 산꼭대기에 내려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정경이었다. 그 돌계단을 한 단씩 올라가는데 갑자기 찔끔찔끔 눈물이 났다. 그리고 정상에 올라가 연못 옆 화단 언덕에 앉아 시내 야경과 부산항만 전경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가!

’일’을 완성해 놓은 다음에 느끼는 안도감과 벅찬 성취감으로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려니와 그보다 마침내 ‘현대’를 넘어섰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욱 감동케 한 것 같다. 그렇다. 뭔가 이루어낸다는 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고난을 이겨 낸다는 것. 역경을 이겨 낸다는 것은 자신을 이겨 낸다는 말과 다름없을 테다. 결국 ‘현대’를 이겨 냄으로써 자신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고 자신감을 회복한 것은, 충혼탑공사로 번 돈보다 수십 배 더 고귀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마음 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굳건한 틀이 돼 주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 비즈니스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하는, ‘자생력’을 키우는 길잡이 역할까지 해 주었다.

흔히 ‘일’을 대할 때 나타나는 세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며, 둘째는 어떤 일이 있는지는 알지만,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이며, 셋째는 그 일을 알고, 그 일이 잘되도록 이루는 사람이라고 한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일’을 대할 때마다 항상 세 번째 타입의 사람이 되고자 애를 써 왔다. 이번 부산충혼탑건립공사도 이런 정신으로 임했다고 자부한다.

여기서도 ‘경북고 야구’를 통해 배운 감투정신과 팀워크로 도전하는 플레이 메이커(Play Maker)로서의 리더십을 자신에게 부여했다고 믿어진다. 그것이 준공식 전날 밤 대청봉 정상에서 밤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베푼 가장 값진 보상이었다.

다음날 준공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마침 8.15광복절과 겹쳐 무슨 잔칫집 행사처럼 흥겨웠다. 부산시장과 국회의원들의 축사, 성금을 출연한 6개 업체 대표들의 메시지가 장시간 계속됐고, 시공회사 현대건설 이명박 회장과 설계자 김중업 선생이 감사패를 받았다. 준공식 마지막 순서로 테이프커팅을 마친 후 행사 참석자들이 앞다투어 돌계단을 밟고 대청봉 정상으로 올라갈 때 나도 함께 올라갔다. 집사람은 (논현동 주택 정원공사 건으로) 이명박 회장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악수는 했지만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김중업 선생은 공사 도중에 두 차례 다녀가셨고, 그때마다 시공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책임자 입장에서 시공 방법과 공정에 대해 브리핑을 했기 때문에 나를 충분히 인지하고 계셨다. 그날 대청봉 정상에 올라가 충혼탑을 하늘로 올려다보면서, 허공에 붕 떠 있는 링 콘크리트를 손으로 가리키며 하신 말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설계했지만, 너무 어려운 설계를 했어요. 이 사장이 나보다 더 실력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릴 줄은 알지만 이렇게 시공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소” 그날 준공식에서 받은 인사말 중 가장 큰 위로를 받은 대목이다. 그 한마디가 후일 어떤 어려움을 만나고 위기가 닥쳐도 흔들림 없이 정면 대결하는 용기와 담력을 갖도록 만든 ‘영혼을 춤추게 하는 촉매’가 돼 주었다.

이런 뜻에서, 지금, 이 순간 고난과 역경을 당하고 있는 분들께 ‘영혼을 춤추게 하는 촉매’가 될만한 몇 마디 조언해주고 싶다.

첫째, 긍정의 힘을 믿어라. 그 믿음을 굳게 지켜라.
둘째, 아무리 힘들어도 사회적 관계의 끈을 놓치지 말라.
셋째, 일 자체를 즐기고 KnowㅡWhy에 치중하라.
넷째, 감사하라. 감사하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필자소개
연변과학기술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의 대외부총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북경대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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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K 2020-09-21 12:47:57
저도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참 부족한 점이 많구나 하고 반성하고 나를 뒤돌아 보게 만드는 글 입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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