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55] 펄벅의 한국사랑
[유주열의 동북아談說-55] 펄벅의 한국사랑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9.1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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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위한 백악관 만찬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주둔 비용이 너무 많아 골치가 아픈데, 미국이 빠져나오고 대신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고 하자, 펄벅 여사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모르는 대통령의 인식에 충격을 받고, “그건 마치 우리 미국이 옛날처럼 영국 지배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습니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올해는 펄벅 여사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지 60년이 되는 해다. 그녀는 1960년 가을 한국의 농촌을 여행하면서 겨울이 되면 먹이가 귀해지는 까치를 위해 감을 모두 따지 않고 일부를  남겨두거나, 지게를 진 채 소달구지를 끌어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농부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고 한국을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필자는 베이징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어느 해 여름, 장시성의 루산(廬山)을 찾았다. 루산의 주변은 단애로 이루어져 "비류직하삼천척"이라는 시귀로 유명한 폭포와 함께 산의 경색이 특별했다. 안내자는 산 전체가 초려(草廬, 짚이나 갈대 따위로 지붕을 인 집) 같아 루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설명하고, 사마천이 루산을 사기(史記)에 소개한 후 역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다녀간 기록이 도처에 남아 있다고 했다.

19세기 후반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개방되자 수많은 선교사가 난징에 거주하게 됐다. 중국의 화로(火爐)라는 난징의 여름을 견딜 수 없던 어느 영국인이 루산 중턱, 해발 1,100m 고원지대에 피서용 별장촌을 개발하고 쿨링(cooling)의 의미를 담아 꾸링(牯嶺)이라고 불렀다. 안내자로부터 당시 별장촌에 거주했던 유명한 서양인으로 펄벅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펄벅 여사를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 못 했다. 그녀의 아버지 압살롬 사이든스트리커(중국명 賽兆祥)가 1897년 가족의 건강을 위해 대지를 분양받아 붉은 지붕의 석조별장을 짓고 매년 여름 루산을 다녀갔다고 한다. 펄벅은 이곳에서 <대지> 등 주요 작품을 집필했고 그녀의 아버지가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곳이 바로 꾸링이었다.

펄벅의 부모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으로 1880년부터 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됐다가 안식년을 맞아 일시귀국 중인 1892년 6월, 딸을 낳고 순결과 우아함을 상징하며 6월의 탄생석이기도 한 ‘펄’(진주)로 이름을 지었다. 그들은 바쁜 선교 일정으로 생후 3개월밖에 되지 않은 펄을 안고 서둘러 중국으로 돌아왔다. 양쯔강과 대운하가 교차하는 장쑤성 전장(镇江 진강)에 파견된 펄의 부모는 중국인을 존엄과 존중으로 대해야 한다면서 선교사들의 공식 거주지(missionary compound)를 피하고 중국인 마을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중국어는 유모로부터 배우고 영어는 어머니로부터 익혔던 펄은 싸이전주(賽珍珠)라는 중국이름으로, 중국식 여자아이 옷을 입고 중국 학교에 다니면서 중국 아이들과 뛰놀아 스스로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펄이 8세 때인 1900년 중국에는 반외세, 반기독교의 의화단 난이 일어났다. 펄의 가족도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상하이로 피신했다. 펄은 상하이에서 선교사 자녀를 위한 여학교를 다니면서 급우들이 중국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펄은 1910년 버지니아의 랜돌프 메이컨 대학에 입학해 4년 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당초 계획했던 미국 생활을 접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펄은 뉴욕주 출신으로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에 온 농업 선교사 존 루싱 벅을 만나고 그의 중국 농촌 조사를 도우면서 사랑이 싹터 1917년 5월 결혼했다. 그녀의 성은 그때부터 ‘벅(Buck)’이 됐다.

펄벅 부부는 안후이성 동북부 쑤저우(宿州)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쑤저우는 전형적인 농촌이지만 초나라 항우가 사면초가에 빠진 역사적인 해하(垓下)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펄벅은 쑤저우 생활에서 가난한 중국 농민의 생활을 알게 됐고, 한발과 기근을 견디는 중국인과의 현실체험이 <대지> 등 그녀의 작품에 골고루 녹아들어 있다.

1920년 펄벅은 남편과 함께 장로교 등 미국 교회재단에서 건립한 난징의 진링(金陵)대학에 교수로 임용돼 영문학을 가르쳤다. 그 무렵 진링대학 영문학과에 다녔다는 독립지사 여운형 선생이 펄벅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진링대학은 1950년대 초 난징대학에 흡수돼 지금은 기념관이 된 펄벅 부부가 살았던 집(故居)은 난징대학에 가야 볼 수 있다. 그해 난징에서 첫 아이 캐롤이 탄생한다. 캐롤은 지적장애로 태어나 펄벅에게는 한평생 짐이 됐지만, 작가로 성공하는 동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1924년 안식년을 맞은 남편이 코넬대학에서 학위 공부를 이어갈 때 펄벅도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25년 펄벅 부부가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중국의 국내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해 3월 국부 쑨원이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작고하자 국민당의 장제스가 실권을 잡고 지방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을 개시했다. 1927년 3월 북벌군이 난징을 점령하면서 그 와중에 일부 군인들이 외국의 영사관을 습격하거나 외국인을 살해하고 거주지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위험에 빠진 펄벅 가족을 중국 지인이 자신의 농가에 숨겨줘 위기를 모면토록 했다. 펄벅 가족은 혼란을 피해 일본 나가사키로 일시 피신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펄벅은 자신의 체험을 소설로 표현하는 작가의 길을 생각하고 집필한,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그린 처녀작 <동풍서풍>이 뉴욕의 존데이로부터 출판제의를 받았다. 펄벅은 리처드 웰시 사장을 만나 집필 중인 차기 작품에 대해 상의하고 작가로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펄벅은 뉴욕의 장로교 교단으로부터 중국 선교 관련 강의 요청을 받았을 때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인에 대해 잘 모르면서 저지르는 무시(ignorant)와 오만한(arrogant) 태도를 버려야 한다며 중국의 선교 행태를 비판해 교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무렵 웰시 사장의 후원 아래 펄벅의 작품활동은 절정을 이뤘다. 1931년 <대지>, 1932년 <아들들>, 1935년 <분열된 일가> 등 이른바 3부작이 존 데이 출판사에서 차례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을 뿐만 아니라 1932년 퓰리처상에 이어 1938년 미국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러나 펄벅의 결혼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아버지처럼 가정보다 학교 일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남편 존이 싫었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순종적인 선교사 아내가 되기를 거부, 1934년 존과 헤어지기로 하고 단신 귀국해 자신을 이해하는 웰시 사장과 재혼하고 미국에 정착한다.

중국에 남은 존벅은 중국 여인과 재혼하며 1남 1녀를 두고 중국 농업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1944년 가족과 함께 귀국한다. 중국 농업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존벅은 국제연합 산하의 농업 관련 국제기구에 근무했고 고향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가 1975년 생을 마쳤다.

펄벅은 자신이 미국에서 태어 나 중국에서 자란 '정신적인 혼혈아'라고 하면서 웰시와 함께 필리핀, 베트남 등 아시아국가에서 미군으로 인해 태어난 혼혈아에 관심을 갖고 입양사업에 몰두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한 혼혈아 문제를 돕고자 ‘박진주’라는 한국 이름으로 수차 한국을 방문했다.

펄벅은 한국 지인들과 함께 소사희망원을 설립하고 한국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개화기 구한말 양반 집안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다룬 소설 <살아 있는 갈대(The Living Reed)>를 저술(1963년 출간)해 한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 주었다.

<살아 있는 갈대>는 독립투쟁의 큰 별이었던 주인공의 별칭으로, 비록 꺾였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다시 자라나 무성해지는 갈대처럼 주변 강대국의 불의와 폭력 앞에 꿋꿋이 저항했던 한국인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한때 푸른 눈의 중국인이라고 불리던 펄벅은 자신의 조국 미국 다음으로 사랑한다는 한국을 “고결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했다.

난징대학살(1937) 등 잔혹한 방법으로 중국을 점령 통치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망하고 물러간 후 중국은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펄벅은 중국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미국과 국교가 단절된 냉전체제 아래 ‘제국주의자’로 낙인찍혀 갈 수가 없었다.

펄벅에게 기다리던 중국 방문의 기회가 찾아왔다. 펄벅 나이 80세가 되는 1972년 2월 미·중 데탕트의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닉슨 대통령의 방중이 결정되고 펄벅이 동행하게 됐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여전한 입국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4년 중국을 떠난 이래 펄벅은 다시 중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73년 3월 비통한 마음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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