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율 칼럼] 나의 창업스토리③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승율 칼럼] 나의 창업스토리③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 승인 2020.09.14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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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무협 소설을 읽다 보면, 무술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려면 ‘생사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즉시 폐쇄되는 혈맥(’임독양맥’)이 있는데 이 관문을 뚫고 정진해야 마침내 최강고수(最强高手)로서의 공력을 얻는다는 설명이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그런 허황한 ‘생사관문’은 아니지만, 죽을 둥 살 둥 고비를 넘기다가 마침내 자발적으로 도전한 ‘부산충혼탑건립공사’라는 험난한 산을 넘고 나니 마치 내가 이 관문을 통과한듯한 특이한 느낌과 정신적 공력(?)을 얻게 됐다.

이 말이 틀린 게 아닌 것이, 그 이후 어떤 어렵고 힘든 여건의 일을 만나도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으며, 부닥치는 대로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습성이 붙었다. 공사의 난이도나 실행 조건의 유불리를 떠나 ‘일’ 그 자체를 달성하는 데서 오는 재미와 보람이 더 컸다. 마치 무술인이 ‘무술’ 그 자체를 즐기듯이 나도 사업가로서 ‘사업’ 그 자체를 즐기며 일하는 게 자신의 정서에 걸맞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무척 초연해졌다. 특히 ‘돈’ 문제가 그랬다.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벌면 버는 대로, 또는 손해를 봐도 그러려니 하고 담대하게 넘어갔다. 사업을 단순히 돈벌이로만 생각지 않고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한 ‘가치행위’로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다.

돈이 싫을 리야 없지만, 돈은 사업을 하다 보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돈을 유일 목적으로 삼아 인생의 승부를 걸기엔 너무 치졸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돈벌이 목적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사람에게 매이는 일이 점점 싫어졌다. 사회적 관계를 지키고 존중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지만, 사람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은 내 양심상 허용할 수 없었다.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생각, 즉 일과 사람을 구분하여 인간관계의 순수성을 지켜가면서 ‘할 일’을 다 하는 태도가 무척 귀하게 여겨졌다. ‘철학적 의협심’이랄까? 사람과 사람과의 순수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실한 우애, 소통, 협력, 공감 등이 일을 통해 만나는 사회적 관계(갑, 을 관계)에서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할 ‘사회적 가치’로서의 맥락이라고 믿어졌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창업 이후 15년 이상 하청 업무를 계속하면서 나름대로 지켜온 비즈니스의 모럴이었다.

그러나 갑, 을 관계에서 그런 일이 평탄하게 유지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산화력, 삼천포화력 이후에도 한전에서 발주한 발전소 관련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 일을 숱하게 했다. 큰일만 챙겨도 삼랑진양수발전소, 고리원자력#3,4호기, 울진원자력 #1,2호기, 한전 본사 사옥, 무주양수발전소, 분당열병합발전소, 영광원자력 전시관 및 #3,4호기 준공대비공사가 대표적이다.

그런 가운데 얼마나 많은 상관관계가 있었겠는가. 얼마나 술도 많이 먹고 돈도 많이 뿌렸겠는가. 이런 과정에 가장 싫었던 일은,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일’ 그 자체는 좋아서 했지만,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날 때 나의 인격이나 인생 자체가 ‘을’ 또는 ‘병’의 처지에 놓이는 게 너무 싫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하청 신세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조경공사업 종합면허(1989년)와 토목건축업 면허(1994년)를 갖추어 작은 기업이지만 원청(도급업체)을 할 수 있는 종합건설회사로 탈바꿈했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15년이 걸렸으며, 그 후 해외건설업(건설엔지니어링, 2003년), 산림사업(산림토목, 2013년), 주택건설사업(2015년)까지 갖추어 명실공히 종합건설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현업에 이르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일관되게 지켜온 두 가지 원칙적인 사업주제(Two subjects of business) 가 있었으니 그것은 집사람과 함께 하는 가족기업형 회사라는 하드웨어를 잘 지키는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 토대 위에 어떻게 하면 이를 지속가능한 경영으로 이끌고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주된 과제였다.

최근에 이르러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해 본다. 나와 집사람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아왔는가? 자문해 보면 불행한 일도 많았지만 일(사업)을 통해서 두 내외가 한 몸처럼 일해 온 것은, 처음에는 부득이한 케이스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일과 삶’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융합체적인 시너지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흔히 말하는 ‘워라벨(Work-Life Balance)’ 차원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균형을 뛰어넘어, ‘일과 삶’이 서로 섞이고 상호작용하면서 삶이 일을 더 풍성하게 하고 또한 일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의 ‘워라하(Work-Life Harmony)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면 그건 틀림없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이렇게 말해줘야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해온 집사람에게 만분지 일이라도 그 사랑의 빚을 갚는 셈이 되리라!

큰아들(이동엽 원장)과 같이 설립한 참포도나무병원도 이런 측면에서 아주 행복한 프로젝트다. 가족 기업형의 병원으로 의료기술과 서비스와 미션 마인드가 함께 어우러져 ‘일과 삶’이 대를 이어 유기적으로 상호 연계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부모 된 입장에서 너무나 행복하다. 그러나 이런 가족 기업형 회사나 병원이 더 큰 발전을 이루기 위해선 나름대로 특별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과 지속가능경영에 대한 원리적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하겠다.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기업의 위험관리 중요성과 더불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이행하려는 시대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참고로 1987년 유엔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가 제시한 ‘지속가능성’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결합해 21세기 기업경영의 메가 트랜드가 됐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가족기업’도 앞으로, ‘백년 장수기업’을 목표로 지금까지 연마해온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해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뒤안길을 돌아보니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어진다.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의 절개를 지킨 집사람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도, 살 수도 없었으리라! 그 긴 세월의 고난과 역경이, 지금은 복이 되어 오히려 신앙 가족공동체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통로가 되어 주었으니 ‘고난이 유익이라’라는 성경 말씀이 그대로 믿어진다. 그런 뜻에서 그동안 40여 년에 이르는 건설업 기간에 특별히 생각나고 간증할 만한 일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혹시라도 ‘나의 창업 스토리’를 읽고 자기 앞의 인생에 가로 놓여 있는 ‘생사관문’을 통과하기를 원하는 분이 계시면 서슴지 말고 자신에게 이렇게 소리치며 뛰어나가기를 권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격언이 자신을 이김으로써 마침내 세상을 이기는,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절륜한 공력’이 되리라 믿는다.

#2. 궁정동 무궁화공원
1993년 3월 초, 김영삼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사업이다. 옛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전가옥(5채)을 철거하고 시민휴식공원을 만드는 일이다.

6월 말까지 완공해야 하는 긴급 공사로 발주됐기 때문에 시공자가 설계안을 내는 ‘턴 키’(일괄도급) 방식으로 추진됐다. 관할 구청인 종로구청에서 청와대 내 공사 경험이 다수 있으며 ‘턴 키’ 실적이 있는 종합조경면허업체로 입찰 제한을 했다. 3개 업체가 지명입찰에 응했고 그중에 우리 회사(반도조경건설주식회사)가 포함됐다. 공사비도 적지 않았지만, 문민정부 출범 후 첫 청와대 발주(경호실)공사인 데다 그곳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기에 누구나 다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프로젝트였다.

입찰 일정이 공지됐는데 하필이면 우리 내외가 조용기 목사님(여의도순복음교회)의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성회 수행 기간과 겹쳤다. 집사람에게 입찰 업무를 내가 챙겨 볼 테니 당신 혼자서 성회 다녀오라 하고 일렀다. 그런데 막무가내였다. 해외 성회를 수행하는 기관인 여의도실업인선교회에서 기획팀장으로 봉사하던 때였다(나는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1990년 1월 초 오산리금식기도원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집사람은 하나님과 약속한 일이니까 무조건 성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도 강력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입찰 업무를 몽땅 직원들한테 맡겨 놓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 후 성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경유지인 파리에서 하루를 묵고 떠나는 날, 그날이 입찰일이었다. 우리 내외는 조 목사님께 기도 요청을 했고 함께 갔던 실업인선교회 임원들께도 합심기도를 부탁했었다. 우리가 파리(Charles de Gaulle)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밟고 있는데 서울 본사에서 입찰 담당 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 우리가, 우리가 낙찰됐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란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수주한 공사를 어찌 소홀히 했겠는가! 설계안부터 특별히 신경 썼다. 공원 부지 중앙에 궁정동을 상징하는 우물 정(?)자 분수 샘터(2.5m×2.5m 크기의 화강석 통돌)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흘러내린 물이 사대문을 거쳐 8도로 퍼져 나가는 형태의 의미체로 조성했다.

그리고 중앙 분수대를 중심으로 무궁화 화단을 조성한 다음 그 외곽으로 원형 산책로와 함께 휴게시설 및 화장실(초가형)을 배치하여 시민들이 편하게 접근하고 휴식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정도면 청와대에서 요청하는 시민휴식공원의 기능은 충분히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은 단순히 시민들의 휴식만으로 그칠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역사의 한 현장이 아닌가! 그래서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자리에 표석이라도 하나 세우자고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번번이 무시됐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부지 가장자리에, 주택가와 연하여 있는 서쪽 편 땅에 낮은 토산을 조성하고 거기에 3~4m 높이, 30m 정도의 길이로 성벽 형태의 자연석 쌓기를 했다. 그런 다음 그 성벽(역사의 흐름을 상징)이 죽 이어 오다가 갑자기 무너진듯한 자리에 폭 1m, 길이 1.5m 정도로 작은 체구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 앞자리에 반석을 앉히고 반석 위에 ‘새’ 형상의 자연석(일종의 표석)을 하나 올려놓았다. 그리고 무너진듯한 성벽의 뒷마당에 30년 이상 되는 낙락장송 세 그루를 심어서 배경을 이루게 했다. 한마디로 말해, 조경 기법을 활용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장소를 추모하는 공간으로 그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조성한 그곳을 매년 10월26일이 되면 빠짐없이 참배해 왔다.

준공 기일이 얼마 남지 않은 6월 중순쯤이었다. 또 한 번 소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모스크바 성회에 다녀와야 하는 일정과 겹친 것이다. 내가 남아서 작업 마무리를 할 테니 당신 혼자서 성회에 다녀오라고 집사람에게 종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막무가내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도 완강히 항변(?)해서 할 수 없이 경호실 윗분께 사정 얘기를 하고 부탁을 드렸다. 그분 말씀이 “나갈 때는 당신들 마음대로 나가지만, 들어올 때는 맘대로 못 들어올 거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한마디로 출국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하기야 경호실 책임자로서, 7월 1일 VIP를 모시고 준공식 겸 공원 개원식을 하는 날짜가 불과 2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작업을 총괄하고 마무리해야 할 시공회사 책임자 두 내외가 다 빠져나간다고 했으니 그도 크게 당황했을 게 분명하다. 도저히 방안이 나오지 않자 우리 내외는 더는 경호실과 의논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놓고 담담한 심정으로 모스크바로 출국했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내외가 성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짜가 준공일을 불과 사흘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보통의 경우 청와대 식재공사를 하다 보면 담당자들이 충성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막판에 당치도 않게 자재 반품, 수종 변경 등을 요구하며 갑질을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현장에 회사 대표가 없으니 실무진에게 요구해 봐야 소용이 없었던 게다. 그냥 원래 설계한 ‘턴 키’ 내용대로 시공을 완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원 설계안 그대로 작업을 마무리 한 것이다. 우리 두 내외가 돌아와서 한 일이라곤 고작 호스를 들고 경내 물청소를 도운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의 결과는 어떻게 평가됐나?

1993년 7월 1일, 궁정동 무궁화공원 개원식에 오신 VIP께서 테이프커팅 자리에서 경호실 관계자들을 치하하면서 크게 만족한 뜻을 표했다. 그러자 이 ‘일’에 관계해 온 청와대, 서울시, 종로구청 공무원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일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게 아닌가! 이런! 아무튼, 발주처로부터 큰 호평을 들으니 우리 팀도 신이 났고 보람에 넘쳐 한껏 고무됐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날(토요일) 오후 개원식 행사를 마칠 무렵 MBC 기자가 다가와서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고 해서 기자가 묻는 대로 문민정부의 출현에 따른 시민사회의 반응과 궁정동 안가(安家) 철거 후 조성한 시민공원의 의의에 대해 적당히 답변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저녁 시간에는 관계 공무원들과 지역 주민 대표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느라 뉴스를 못 봤다.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다음 날 주일이었다.

여의도순복음실업인회관 빌딩 지하실에 차를 주차해 놓고 선교연합회 본부가 있는 8층으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동안 수없이 조용기 목사님을 만나고 수행했지만 한 번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 1층 문이 열리자 조 목사님이 부목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쑥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반갑게 인사를 드리는 나를 보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 이 집사, 자네, 말도 잘 하대”라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 MBC 뉴스를 보신 것이다. 그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느낀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누가 알랴! 그때 내 마음속에는 이런 감동이 메아리쳤다. “아! 하나님이 조 목사님을 통하여 칭찬해 주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차고 넘쳤다. 그렇다. 케냐 나이로비 성회 때도 그랬고, 나중에 모스크바 성회 때도 그랬다. 일 년 전부터 조용기 목사님의 해외 성회 일정을 짜 놓고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 궁정동 무궁화공원 조성공사가 긴급 공사로 발주되는 바람에 공교롭게 입찰 시와 준공 시 두 번 다 일정이 겹쳐 성회에 참석할 수 없는 처지이었지만, 그 개인의 일을 모두 뒤로하고, 하나님의 일을 먼저 챙기고 헌신한 믿음을 이쁘게 보시고 칭찬하시는구나 라는 게 그때 내가 느낀 감동이고 솔직한 신앙고백이다.

#3. 여의도공원
1971년 여의도에 있던 공군기지가 이전된 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이곳을 신시가지 건설 및 주택용지로 개발하려 했으나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시장직을 물러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개발 청사진을 을 주도했던 김수근 대표(설계사무소 공간)의 계획을 취소시킨 장본인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연상시키는, 조경이 잘 된 공원광장계획을 세워서 보고했으나 한마디로 싹 밀어버리고 비상활주로 용도의 콘크리트 광장으로 엎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5.16 광장이다. 그 콘크리트 광장이 푸른 녹지의 대형 공원으로 탈바꿈한 이면에는 우리 회사의 기적 같은 간증 거리가 숨어 있다.

김영삼 정부 말기로 접어들었을 때(1997년)의 일이다. 당시 조순 서울시장이 대권의 꿈을 안고 추진한 도시개발사업 가운데 하나가 여의도 공원화 프로젝트다. (지하에 근린시설과 주차장을 조성하고 그 위에 공원을 만들었으면 훨씬 더 멋진 도심 시설녹지복합공간이 됐을 텐데) 졸속으로 발주한 이 공사의 입찰이 4월에 있었다. 우리 회사도 당연히 참여했다. 저가 낙찰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사전적격심사제도(PQ)를 도입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입찰 전에 회사 실적을 증빙하는 자료가 들어가야 했고 5년 이내 국가 공공기관의 표창이나 우수업체 인증을 받은 자료가 있으면 가산점이 붙는 그런 제도였다. 입찰하기 이삼일 전으로 기억된다. 조달청 담당자로부터 표창 자료가 더 있으면 추가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회사가 미리 다 챙겨서 접수(5건)했지만, 혹시 추가할 게 있는지 살펴보라는 내용이었다

왠지 이상한(?) 감이 왔다. 나는 직원들을 풀 가동하여 그동안 일했던 공공기관에 찾아가 자료실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5년 전에 주택공사에서 납품우수업체로 표창받은 자료 한 건이 누락된 것을 발견하고 입찰 하루 전에 추가 접수하게 했다. 그 결과 가산점 1점이 추가되어 0.5점 차로 낙찰됐다. 여의도공원 2공구(공원 중앙에서 마포대교 방향 구간) 사업을 맡게 된 것이다. 그 공사 구간 바로 앞에 국민일보 사옥이 있었고 8층(최고층)에 조용기 목사님의 집무실(국민일보 이사장)이 있었다. 집사람과 나는 여의도 공원공사의 수주를 위해 일찍부터 조 목사님과 교우들께 기도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낙찰 소식을 접한 그들은 우리 내외보다 더 좋아했고 자기 일인 양 그렇게 기뻐해 주셨다.

공사 기간에 조 목사님 집무실에 한 번씩 들릴 때면, 목사님께서 창을 통해 작업 구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거 다 우리 정원이다”라고 하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가운데 내게 영감으로 주어진 하나의 임무(?)가 생겼다.

평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2공구 끝부분 언덕(인공으로 조산한 곳) 위에 정자와 더불어 조그만 폭포가 조성되어 있다. 그 아래에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물은 순환 펌프로 가동하여 24시간 흐르게 되어있다. 원 설계안에 보니 연못이 큰 특징 없이 디자인되어 있었다. 감리단 측과 협의하여 연못 형태를 서울시 지도 모양으로 조정했다. 그런 과정에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기도의 제목이 ‘서울시성시화운동’이었고 지금도 그 제목은 마음 언저리에 남아 있다.

내가 준거한 성경 말씀은 열왕기하 2장 19~22절이다. 선지자 엘리사가 여리고성에 갔을 때 그 성읍 사람들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했다.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해서 갖고 오자,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다고 하니 그 후 물이 고쳐져서 옥토로 변했다는 기록이다. 나는 이 ‘물 근원’이라는 용어를 성경 구절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신앙의 본질적인 그루터기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모든 교육선교와 철학적 이해의 근원이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가 연길시 북산가 언덕 위에 있는 연변과기대(PUST)를 바라보며 올라갈 때마다 묵상하는 것도 바로 이 ‘물 근원’이다.

여의도공원조성공사를 착공한 지 2년 가까이 된 1999년 2월에 준공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적의 선물’로 주셨다고 믿기에 준공일이 다가오자 특별한 기념행사를 열고 싶어졌다.

기독교계 음악선교를 리드하고 있는 분들과 의논한 끝에, 미국, 유럽, 호주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어떤 특별한 이슈가 있으면 날짜를 잡아 공동찬양집회를 열어 주는 ‘Integrate’ 팀을 소개받게 됐다. 그들을 사비로 초청해서 여의도공원 중앙부에 있는 광장에서 이틀간 찬양집회를 개최했다. 교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순복음교회 교우들과 일반 청년대학생들도 많이 참석했고, 이 찬양집회를 계기로 기독청년들에게 음악선교와 더불어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비전을 새롭게 장려하고 부흥시키는 성과를 얻게 됐다.

#4.경기테크노파크
한국 IMF 외환위기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 11월에 우리나라가 가진 외환이 너무 부족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사건이다. 국가경제가 일시에 침몰하는 현상을 빚었고 기업경영은 최악의 상태에 달한 듯 피폐해졌다. 부도 업체가 속출했으며 건설업계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우리 회사도 재정적 어려움에 빠져 구조조정에 따르는 비상조치를 했으며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적잖이 매각하여 긴급자금으로 수혈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전에도 어려움이 왔을 때 결심했던 것처럼, 어떤 일이 닥쳐도 회사 문을 닫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소신으로 버티고 응전했다. 그런 가운데 큰 곤경에 처하는 고약한 일이 발생했다.

건설업계에서는 관공사를 수주하게 되면 상호보증제라는 게 있어서 업체들끼리 품앗이 형태로 주고받으며 보증해 주곤 한다. 영종도 인천공항건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공항청사 주변 식재공사를 맡은 M 회사가 공사이행보증을 요청해 왔다.

전에 신세를 진 업체라 당연하게 보증을 해주었다. 공사 기간이 2년 가량 걸리는 제법 큰 공사였는데 이 업체가 IMF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 견디다 못해 부도를 내고 말았다. 잔여 공사가 삼분지 일이나 남아 있었다. 기성고를 이미 많이 받아간 상태에서 부도를 냈기 때문에, 잔여 공사를 다 하려면 15억 원 이상 추가로 투입해야 마무리할만한 일이었다. (업계에서는 M 회사가 일부러 부도를 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몹시 억울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남의 일을 마저 다 해 주려니 ‘생돈’ 거금을 투입해야 했고, 보증 이행을 피하려면 우리 회사도 부도 처리하는 게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죽어도 그 짓은 못하겠고, 참으로 힘들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를 간절히 묻고 간구했다.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잔여 공사를 우리 회사에서 전적으로 이행하기로 했다. 결국, 일이 다 끝나고 정산을 해 보니 약 10억 원 정도를 밑 빠진 독에 물을 갖다 부은 셈이 됐다. IMF 사태로 위기를 맞고 있던 회사 차원에서는 엎친 데 덮친 꼴이었다. 그래도 인내하며 용케 잘 버텨 나갔다.

그러다가 2000년 가을을 맞았다. 안산테크노파크신축공사가 발주됐다. 지금은 경기테크노파크로 불리지만, 당시 통상산업부와 경기도지사 간 기술연구 집적화 연구단지 조성 협약을 맺고 시행하는 특수 비영리법인 사업이며 안산시가 공사를 주관했다. 부지 위치는 한양대 안산캠퍼스 바로 옆이다.

입찰 준비를 하면서 단독 입찰이 어려워 동양고속건설(주)을 파트너로 잡고 우리 회사가 신랑(주계약자) 역할을 했다. 산을 뭉개고 200,000㎡의 대지 위에 전체면적 4만㎡ 규모의 신축 연구단지를 조성하는, 2군 건설업체(종합건설면허)까지 참여하는 3백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몇 년간 IMF 위기에 시달려 온 업계로서는 상당히 큰 프로젝트로 소문이 났었고, 수주 경쟁이 치열했다.

입찰은 오후 3시에 있었다. 5시경 입찰 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 우리 2등 했어요.”

건설 분야 입찰에서 ‘2등’이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학교 공부나 콩쿠르 시상식 같은 데서는 2등도 있고 3등도 상을 주지만, 입찰에서 2등은 죽은 몸이다. 그날 본사 직원들은 낙심하여 누구는 울기까지 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2등이라니! 차라리 꼴찌나 하고 말지 이런 심사조차 났다. 우리 내외도 기분이 가라앉아 일이 더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저녁 먹고 술이라도 한잔하라고 일러 놓고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왔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다음 7시 뉴스를 보고 있는데 화면에 ‘퇴출 기업’ 명단이 수십 개 죽 뜨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 명단 가운데 오늘 입찰에서 1등 한 삼익건설(주)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일순 심장이 멎는 듯한 감을 느꼈다.

나는 부랴부랴 발주처에 전화해서 물어봤다. 1등으로 낙찰한 회사가 퇴출 기업이 되면 그다음 낙찰자가 누가 되며 또는 재입찰을 하는 것인지 떨리는 마음으로 질문했다. 담당자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1등은 죽고 2등이 1등 되는 겁니다.”

그날 밤 우리 내외는 또 한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성경에서 ‘거듭난다’라고 한 말이 실감 났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공식적으로 계약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고비를 넘겼다. 본디 3등이었던 삼성물산(건설 부문)이 2등으로 치고 올라오면서 1등으로 회생한 무명의 중소업체를 어찌하든 젖혀 보려고 백방으로 힘을 썼던가 보다. 우리 회사의 실적과 세무 관련 사항, 기술 인력 및 면허 규정에 이상이 없는지 샅샅이 체크를 했다. 발주처에서도 시간을 끌면서 상대방에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입찰한 지 두 달이 지나도 낙찰 선언을 하지 않자 지역 사회에서 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K 일보에서 이를 취재하고 기사화하자 발주처에서 며칠 가지 않아 낙찰 선언을 해 주었다. 그때가 2000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다.

그 후 약 2년에 걸쳐 공사를 마치고 정산을 해 보니 우리 회사의 몫(토목, 건축, 조경)으로 일한 결과로 얻어진 이익금이, 2년 전 영종도 인천공항 조경식재공사보증 이행으로 치렀던 손실금 10억을 훨씬 능가했다. 아! 참으로 신비(?)한 감동을 했다. 하나님께서 옆에 계셔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보면서 그분이 필요할 때에 적절히 사랑과 은총을 베푸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다. 섬찟할 정도로 강력한 초월적인 힘(Divine Power)이 느껴졌다.

지금도 회고해 보면, 당시 회사를 지켜보겠다고 ‘생돈’을 퍼부어 가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한 곤혹감으로 일했던 영종도 하늘이 이제는 그립기 조차하다. 그 한없이 힘들고 억울했던 심정을 위로하시면서 새롭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5.
이상으로 몇 가지 중요하고 은혜를 만끽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곰곰이 되새겨 보니 나도 참 파란만장했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 이런 일들뿐이겠는가!

자칫하면 집사람과 이혼할 뻔했던 일도 있다. 88올림픽과 더불어 회사가 크게 신장하고 종합건설면허까지 보유하게 되니 조경공사 부문에만 안주해 있을 게 아니라 좀 더 큰일(?)을 해 보고 싶었다. 그때 당시 여러 군데 골프장 조경 및 토목 쉐이핑 작업을 수주하여 시공했고 또 미국 유명 골프장을 돌아볼 기회가 있어서 차츰 골프장 건설사업을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던 참이었다.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나는 1990년 1월 초부터 교회를 나가게 됐다. 그해 6월에 교회 식구들과 같이 중국 여행을 다녀오는 과정에, 중국 그 넓은 천지에 골프장이 북경, 상해 딱 두 군데만 있고 그것도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한중 수교가 되기 전에) 빨리 가서 선수를 쳐야 하겠다는 들뜬 심정으로 산둥반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칭다오 석노인관광개발지구 안에 18홀 골프장으로 책정된 대지를 매입하려고 애쓰다가 농민들 토지 보상 문제가 어려워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국가 주석이던 양상쿤 주석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김진경 박사(연변과기대 설립 총장)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무튼, 그때 칭다오 석노인관광개발지구에 골프장 건설계획을 세우고 매월 두 차례 칭다오를 방문하여 시(市) 관계자들과 협의하는 과정에, 옛날 독일조차 지역에 조성됐던 별장들 가운데 위치가 좋은 곳을 택하여 석노인골프장의 숙박 시설(호텔 및 펜션)로 이용할 계획도 같이 세웠다. 그러다가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집사람이 내가 칭다오만 다녀오면 집을 사겠다고 하니 “당신 여자 생겼지! 여자 생긴 게 틀림없어! 중국만 갔다 오면 집 사겠다고 하니,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혼장에 도장 찍어 놓고 하세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불신과 오해가 점점 더 깊어 가던 참에 북경에서 우연히 김진경 총장을 만난 것이다.

그때 나는 돈 벌러 갔지만, 미국에 있는 재산까지 팔아 와서 조선족 사회를 위해 대학을 세우겠다고 설파하는 김 총장님의 말씀을 듣고는, 가슴을 치는 충격과 함께 오랫동안 ‘세속의 덫’에 잠자고 있던 내 영혼이 깜짝 놀란 듯 깨어났다. 젊은 날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불교 철학까지 전공하며 열정을 불태웠던 그 철학적 탐구 정신의 아궁이에 기름을 갖다 붓는 듯한 영적 감동을 느끼게 됐다. 결국, 그 후 중국에서의 골프장 사업 계획을 모두 접고 김진경 총장과 함께 대학(연변과기대)을 세우고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사업(이 사업은 돈 버는 사업이 아니고 돈 쓰는 사업이다)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게 됐으며, 그런 ‘선한 일’에 집사람도 흔쾌히 동참하게 됐으니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겠는가! 거기로부터 인생 후반전의 새길이 열렸으며 또한 ‘일 ‘벌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글로벌 미션(CBMC실크로드 미션, 환황해경제기술교류협력, 동북아공동체문화사역 등)과 함께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일(평양과기대 사역)까지 맡게 됐으니 이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그렇게 연변 땅에 인연을 쌓아 가면서, (3년간 애쓰다가 무산된 일이지만) 연길시 박동길 시장을 모시고 한전 본사를 드나들며 연길에 열병합발전소를 건설해 보겠다고 쫓아다닌 일이며, 그때 중국 길림성 관료들과 어울리며 만일 그 일이 성사되면 발전설비 자재를 나진항(*항만증축계획 포함)을 통하여 훈춘-도문-연길로 수송할 수 있도록 산업도로를 신설하고, 거기에 연하여 나진항 배후지역에 중국과 남북한 합작으로 신경제 도시를 건설하여 국제무역항으로 키우는 일도 같이 해 보자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호기를 부렸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런 ‘개발협력(Cooperative development)’ 방식의 창의적 대안으로 남북한에 새길을 열고, 두만강유역개발(UNDP)에 새로운 전기(환동해 유라시아경제권)를 마련함으로써 장차 중국 동북 3성 지역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도 함께 연결하여 잃어버린 한민족의 역사-‘발해의 꿈’을 오늘에 되살리는 ‘그랜드 비전’의 무대에 여러분 모두를 초청하고 싶다. 기독실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창업 스토리’를 나누다가 그만 여기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글을 읽는 청년들에게 진정을 다 해 고하고 싶다. “청년들이여! 큰 야망을 품어라! 성문으로 나아가 백성들이 올 길을 수축하며, 돌을 제하고,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신아시아시대의 미래 지평을 선도하는 BTS(Big Team Spirit)의 총아가 돼라!”

이런 희망으로, 늘 외롭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추스른 몇 가지 나의 다짐을 선물로 남기고 싶다.
첫째, 사람에게 매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
둘째, 한 우물만 파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셋째, 죽기까지 사명(Business as Mission)으로 일한다.
넷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필자소개
연변과학기술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의 대외부총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북경대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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